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51
“그건 짜릿한 일이다!”
“때로 개처럼 목숨을 구걸해야 할 수도 있소.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이 없어서 누군가를 죽이고 강탈해야 하는 지옥 같은 상황이 올지도 모르지.”
“나의 피와 살을 뜯어 먹겠다!”
사나운 이빨의 대답에 아이반이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좋소.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겠소.”
“무엇인가?”
“길은 내가 정하오. 내가 살라면 살고, 뒈지라고 하면 뒈지시오. 가능하겠소?”
사나운 이빨이 그의 이름에 어울리는 이빨을 보여주었다. 그건 그 나름의 웃음이었다.
“별것 아니군. 그리하지.”
아이반은 손을 내밀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 손을 붙잡았다. 그걸 보고 있던 웅크린 불꽃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선언했다.
“전사들의 앞길에 축복을! 축제를 열어라!”
축제라 하면 응당 먹고 마시는 것이 주된 일이었으나 리자드맨의 축제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미각이 그리 크게 발달하지 않아서 먹는 것으로 흥을 올리는 대신, 사냥감을 뱀신 모르나에게 바치고 북을 치며 노래하기를 즐겼다.
물론 그들의 언어라는 것이 인간이 듣기에는 기묘한 것이라 노래 역시 뭔가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축제는 축제인지 다들 즐거워했다. 그렇게 밤이 되면 다 같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씻는 것으로 축제가 마무리되었다.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들을 가다듬는다는 의미였다.
어디 하나 깨부수고 어제 안주로 뭘 먹었는지 확인하면서 길바닥에 몇 명쯤 널브러져 있는 것이 일상인 인간의 축제와 비교하면 참으로 건전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이틀쯤 축제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아이반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이 마을을 나섰다.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의 족장, 웅크린 불꽃은 직접 마을 어귀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했는데, 그 와중에 알게 된 것이 꽤 충격적이었다.
“잘 다녀와라, 아들아.”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아버지.”
사나운 이빨과 웅크린 불꽃이 서로 그리 인사를 하며 작별의 포옹을 했다. 그러니까 둘은 부자 사이였던 모양이다.
“족장의 혈육이었소?”
아이반이 그렇게 물으니 오히려 사나운 이빨이 몰랐냐는 듯 되물었다.
“그걸 몰랐나?”
“말을 안 했으니 몰랐지.”
“으흠, 그런가? 아버지와 나는 무척이나 닮아서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숨기려 한 것은 아니다.”
그 말에 아이반과 델피노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리자드맨 얼굴을 어떻게 구분하냐고 되물어봐야 싸우자는 말밖에는 안되니까.
“그나저나 짐이 무척이나 많군. 그게 다 뭘 챙긴 거요?”
사나운 이빨은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덩치가 큰데 그 덩치가 묻힐 만큼의 짐이라니.
“나에게 공용어를 알려준 늙은 전사가 인간의 마을은 몹시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챙겼지.”
그는 가방에 무엇이 있는지 일일이 읊어주었다. 이야기가 계속될 때마다 아이반과 델피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벌레퇴치용 약 같은 것은 그렇다 치고, 곰 사냥용 덫은 왜 들고 가는 거요?”
“저는 그것보다 입욕제가 그렇게 종류가 많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는 마을 근처에서만 움직이다 보니 장거리 여행이 처음이었다. 사냥하며 숲을 며칠쯤 돌아다니는 것은 익숙했으나,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걸릴지 모르는 모험은 한 적이 없었다.
노련한 전사의 면모 뒤에 어설픈 시골뜨기 모험가의 느낌이 흐른다. 구체적으로 집에 있던 비상금을 훔쳐서 용병이 되겠다고 가출한 농장의 세 번째 아들 같은. 아이반은 모험가가 어떻게 짐을 싸야 하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을 하면서 그의 짐을 대폭 줄였다.
산더미 같은 짐을 적당한 배낭크기까지 줄인 후 빼놓은 물건을 모두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것들은 내가 보관하고 있을 테니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하시오. 꺼내주겠소.”
대부분의 짐을 빼앗긴 사나운 이빨이 묘하게 기운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그는 화제를 돌리듯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마을을 떠나서 어디로 갈 생각인가?”
“음, 글쎄. 원래는 이곳 근처에 숨겨진 던전이라도 찾아볼까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효율적이지 못할 것 같소. 시간도 걸리고 오크 녀석들이 신경 쓰이니.”
“그렇다면?”
잠깐 망설이던 아이반이 대답했다.
“요정의 숲으로 가고자 하오. 내 눈을 고칠 수 있을 만한 비약이 그곳에 있으니까.”
아이반이 길을 정했다. 목적지는 요정의 숲, 엘프들의 영역. 델피노가 우려를 표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괜찮겠습니까? 엘프는 만만찮게 폐쇄적인 종족인데······.”
“인연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오. 그들에게 초대를 받기도 했지.”
그리고 폐쇄적인 종족이라는 것도, 사실 까놓고 보면 인간에게 개방적인 종족이 거의 없었다. 크게 보면 오히려 인간이 폐쇄적인 종족이 아닐까? 아무도 안 놀아줘서 스스로 모두를 왕따로 만드는 느낌.
“엘프의 초대라, 놀랍군요. 하여간 당신과 있으면 심심할 틈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조금 안타깝군. 나는 항상 심심하게 사는 것을 꿈꾸는데 말이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자신을 그렇게 놀려두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뭐라도 하라는 듯 등을 떠밀곤 했다.
그게 퀘스트가 되었든, 신의 의지가 되었든. 쉬더라도 침구류 일광건조하고, 장구류 정비하고, 청소 깔끔하게 한 뒤에 쉬라는 주말 당직 행보관 같았다. 그러면서 자기는 할 것만 하면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다는 소리나 내뱉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최대한 숲을 빨리 빠져나가겠소. 또다시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명의 맛을 즐겨야겠으니.”
“잠깐! 검문을 하겠··· 어?”
성문에서 일행을 막아선 병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제국이나 서부의 연합국과는 달리 대륙 동쪽에 있는 로만 왕국에서는 인간사회에 섞여 사는 이종족을 보기가 어려웠다. 특히나 리자드맨은 더욱.
“왜, 문제 있나? 병사?”
사나운 이빨이 유창한 공용어로 물었지만, 병사는 제대로 말을 들은 기색이 아니었다. 당황해서 얼이 빠진 모양이다. 다행히 옆에 있던 아이반과 델피노를 알아본 병사가 있어서 성문을 통과할 수는 있었지만 사나운 이빨은 퍽 기분이 상한 듯했다.
“항상 이런 식이군. 인간들은 나를 보면 놀라기부터 한다.”
“그, 세간의 이미지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인간들 사이에서는 리자드맨들이 두렵기도 하거든요.”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정작 다른 종족들을 깊은 산과 숲, 황무지로 쫓아낸 것은 인간이 아닌가? 우리가 인간을 두려워해야지, 왜 인간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거지?”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말하자 델피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원래 때린 것보다 맞은 것을 잘 기억하는 것이 사람이오.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들은 먼저 빛의 신 아룬의 신전으로 향했다. 거기서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아룬 신전의 사제는 사나운 이빨을 보고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을 반겼다.
“산맥으로 들어가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성과는 있으십니까?”
“그렇소. 여기 리자드맨의 도움으로 오크들의 진군을 차단했지. 그들은 결코 산맥을 넘지 못할 거요.”
“그건 다행이로군요.”
그러면서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동부는 이미 그린스킨에게 완전히 먹혔다는 것, 왕국의 정예들이 출동하고서도 큰 성과가 없다는 것, 그리고 새롭게 그린스킨과 국경선을 마주하게 된 남부의 제국이 오히려 패배해서 물러났다는 것.
“지금 분위기는 최악입니다. 그동안 무시하고 있던 그린스킨들이 이렇게나 무서운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죠. 소문이지만, 그린스킨에게 대항하기 위한 연합이 논의되고 있다 합니다.”
그저 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린스킨, 그러니까 피의 동맹과 맞서 싸우기 위해 신뢰의 연합이 만들어지는 것이 대략 지금쯤이니까. 아이반은 그 소식을 듣고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본격적인 난세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피와 죽음 속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런 아이반의 모습을 본 아룬 신전의 사제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게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사람에게 너무 좋지 않은 소식만 전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피곤하시겠군요.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이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고기, 맥주, 따뜻한 잠자리.”
사나운 이빨이 슬쩍 덧붙였다.
“거기에 목욕까지.”
아룬의 사제가 빙긋 웃었다. 스스로 산맥으로 들어가 오크들을 막아낸 영웅이 바라는 것이라기엔 너무나 소박하기만 했다.
“다행히 모두 가능한 것들이로군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룬 신전에서 준비해준 음식은 맛있고, 푸짐했다. 잠자리 역시 따뜻하고 푹신했으며, 목욕까지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영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확실히 분위기가 아주 무거워졌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에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완전 최악이군.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어둡고 불안과 짜증만이 가득하오.”
아이반의 말에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은 소식은 없고 전부 암울한 이야기뿐이니 사람들의 얼굴이 밝을 수가 없겠죠.”
“이런 곳에서는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할 것 같소. 적당히 준비되면 떠나도록 합시다.”
엘프의 숲은 여기서 며칠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이반이 알고 있는 엘프의 숲이 그렇다고 해야 옳았다.
엘프가 머무는 숲, 그러니까 요정의 숲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곳이었다.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의 어디쯤 요정의 숲이 있었고, 그곳으로 가는 입구만이 이런저런 숲에 흩어져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원론적으로는 세상 모든 숲이 요정의 숲과 이어져 있었다. 그중 물질계에 존재하는 엘프의 마을은 요정의 숲으로 들어가는 주된 입구를 지키는 관문인 셈이고. 아이반은 처음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났던 장소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며 수색을 시작했다.
단번에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영 막막했다. 쉽게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엘프들은 몸놀림이 무척이나 가벼워서 발자국이 깊지 않았다. 마치 풀 위를 밟고 지나가는 듯 땅에는 흔적이 없었다.
아이반에게는 레인저의 지식과 경험이 있었으나, 그것으로도 엘프를 추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믿을 수밖에.
“이런 식으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찾지 않더라도 근처까지 가면 그들이 나타날 거요. 낯선 이들이 요정의 숲으로 가는 입구에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니까.”
지루한 일이었다. 그러나 숲에서 먹고 자기를 반복하며 훑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결국 그들이 나타났다. 휘이잉- 겨울 숲속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바람이 스치고 부드러운 향기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