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52
육신의 감각이 아니라 정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기묘한 향기. 아이반은 눈을 하나 잃었으나,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기감으로 그들의 존재를 똑똑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엘프 다섯이 어느새 나무 위에 서서 활을 당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얼굴이었다. 그들은 델피노를 바라보았고, 사나운 이빨을 경계했으며, 아이반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당기고 있던 활을 내려놓았다.
“한둘 정도는 익숙한 얼굴이군. 나를 알겠소?”
“당연합니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아이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로군요.”
“나는 세계수의 초대를 받고 찾아왔소. 혹시 동료가 있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오?”
그 말에 엘프들이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었으나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는 듯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끝나고 엘프 하나가 입을 열었다.
“세계수의 초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당신들을 우리의 숲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엘프들이 일행을 데리고 겨우 몇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사방의 풍경이 달라졌다. 겨울 숲의 앙상한 나뭇가지는 모두 사라지고, 마치 봄이나 여름처럼 잎이 파릇파릇한 나무가 가득했다.
꽃이 피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결계를 통과해 요정의 숲으로 넘어온 것이다.
만약 엘프의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쉽게 닿을 수 없는 장소였다. 스르륵 엘프가 손짓하자 앞을 가리고 있던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비켜서 길을 만들어주었다.
온갖 정령과 요정들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델피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 멀리 시야의 끝에 커다랗고 커다란 나무가 솟아오른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커서 그 끝이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세계 전부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웅장함, 세계 그 자체일 것만 같은 위대함. 스윽 아이반은 가죽 안대를 쓰다듬었다.
그의 잃어버린 눈이 욱신거렸다. 마치 세계수가 그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왜지?’ 묘한 표정을 짓던 아이반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이반과 일행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움직였다. 정령의 숲은 참으로 기묘한 곳이었다. 마치 동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기분이다. 엘프의 마을은 참으로 제각각이었다. 어느 집은 흙으로 지어졌고, 어느 집은 돌로 지어졌으며, 어느 집은 나무로, 또 어느 집은 재료들이 섞여 있었다. 그렇게 재질도 다르고 모양도 달랐으나, 하나같이 주변과 어울렸다. 그렇게 다르면서도 통일감이 느껴졌다. 인간 둘과 리자드맨 하나. 낯선 방문객이 등장하자 마을에 있던 엘프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박혀 들었다. 엘프들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무감정한 듯 굳은 얼굴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기묘한 곳이다. 내 취향과는 영 맞지 않아.”
사나운 이빨이 낮게 중얼거리자 엘프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가 돌아왔다. 리자드맨의 언어로 한 말이었는데 저 엘프는 과연 알아들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엘프는 일행을 흙으로 만들어진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기본적인 가구는 갖춰져 있었고,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으나 생활감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비어있던 집입니다. 여기서 쉬고 계시면 곧 당신들을 안내할 우리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파수꾼 엘프들이 사라지자 델피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답답한 곳입니다. 이곳은 환상적이지만 불편하기만 하군요. 엘프들의 시선이 버겁습니다.”
“예전에 엘프를 만난 적이 있소?”
“예전에 서부 연합국에서 두어 번쯤 봤습니다. 그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집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살펴보던 사나운 이빨이 끼어들었다.
“그건 세계수를 벗어난 엘프들이라 그럴 거다.”
“예?”
“숲을 벗어나면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다고 들었다. 그러면 엘프들 역시 감정을 가지게 된다더군.”
세계수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어 있을 때 엘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수와 떨어지게 되면 항상 누군가와 공유하던 생각과 감정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엘프 역시 다른 생명체들과 비슷하게 변한다고 했다.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거들었다.
“넓은 호수에 차 한 숟가락을 타봐야 아무 변화가 없지만, 찻잔에서는 큰 변화지. 세계수를 벗어난 엘프들은 오히려 감정에 솔직하고 표현이 확실하다고 들었소. 나도 그런 엘프를 본 적은 없소만.”
항상 함께하던 세계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주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게 되니까. 그래서 숲을 벗어나 인간들 틈에서 활동하는 엘프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엘프들은 모두가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사나운 이빨이 투덜거렸다.
“엘프들의 집에는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없군. 씻는 즐거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아까부터 계속 무언가를 찾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더니 욕조를 찾았던 모양이다.
“엘프들만이 아니라 인간들의 집에도 욕조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소. 기껏해야 따뜻한 물을 받아서 끼얹는 정도지.”
몸을 담글 수 있을 만큼 뜨거운 물을 받아놓는다는 것은 사실 꽤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그만한 공간도 필요했고,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으며, 그걸 데우는데 들어가는 연료도 필요했다. 예전 사나운 이빨이 인간의 음식은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 이유가 그대로 목욕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뭣?”
사나운 이빨은 조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집마다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전에 머물렀던 인간의 집에는 커다란 목욕탕이 있었다!”
“그건 신전이잖소?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가 있으니. 그리고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았소. 공용 목욕탕도 있고, 훌륭한 저택에는 커다란 목욕탕이 딸린 경우도 많지. 다만 일반적인 서민의 집까지 그렇지는 않다는 거요.”
아이반은 그러면서 고급 여관에는 방마다 욕조가 딸린 욕실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고 속삭였다.
“그런 곳이라면 마음껏 목욕을 할 수 있겠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그 소리를 들은 사나운 이빨이 노동 의지를 불태웠다. 인간들의 돈을 모아 반드시 고급 여관에서만 묵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걸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델피노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엘프들이 대체 어떤 이유로 아이반을 초대했을까요? 외부인을 쉽게 자신들의 숲으로 들이는 종족이 아닐 텐데······.”
“글쎄, 그건 이제 알려주겠지.”
아이반이 진지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러고 있으니 곧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예전에 본 얼굴이었다. 엘레나 이븐우드, 세계수의 무녀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일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
“노크도 없이 들어오셨군.”
아이반의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인간들의 예의입니까? 죄송합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군요.”
하긴, 세계수로 연결된 엘프들이 노크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존재를 다 알고 있으니 의미가 없는 짓이지.
“세계수의 초대를 받고 찾아왔소. 그대가 전해주었지.”
“그렇습니다. 세계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아이반. 그리고 아룬의 사제, 모르나의 전사까지도.”
엘레나 이븐우드의 눈동자가 일행을 하나씩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의 눈은 마치 투명한 유리 같았다. 예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무런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딱히 세계수의 마음에 들 만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아이반이 그렇게 물어보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세계수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엘레나 이븐우드는 아이반을 밖으로 안내했다.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이 따라나섰고, 그녀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하늘을 떠받치듯 구름을 뚫고 솟아난 세계수의 위엄이 대단했다. 그들은 그쪽을 향해 걸었으나 전혀 가까워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도대체 세계수는 얼마나 큰 것입니까? 언제쯤 도착할 수가 있죠?”
델피노가 그렇게 감탄하며 묻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도착할 수 없습니다.”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세계수는 실존하는 나무가 아닙니다. 커다란 나무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결코 손으로 만질 수는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느껴질 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또다시 아이반의 잃어버린 눈이 욱신거렸다. 둔탁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아이반이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눈이 아프군. 마치 세계수와 공명이라도 하는 것 같아.”
아이반이 알기로 저 세계수는 노르드 신화에 나오는 세계수 위그드라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세계수라는 개념이야 워낙 흔한 것이 아닌가. 단군신화의 신단수, 기독교의 생명의 나무, 심지어 조지아 신화에도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나무가 등장한다. 그런데 어째서 오딘이 앗아간 눈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 오딘의 시선이 느껴졌다. 토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헤임달과 로키의 시선도 느껴졌다. 언젠가 한 번씩 그를 스쳐 지나간 이름 모를 아스가르드 신의 시선 역시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낯선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저 멀리, 거대한 나무가 그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아이반이 안대를 붙잡고 있으니 엘레나 이븐우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이제 세계수를 만나보시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까는 세계수는 실존하는 나무가 아니라고······.”
말을 하던 델피노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온 사방을 채우는 웅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으흠······.”
델피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득한 시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껏 아이반만이 느끼고 있던 초월자의 시선을 다른 이들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일행은 모두 엘레나 이븐우드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의 기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델피노는 빛의 주 아룬의 이름을 부르고 사나운 이빨은 큼지막한 검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있을 위험을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웅- 아이반은 어느새 자신이 낯선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우주, 그곳을 채우는 세계수의 모습.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엘레나 이븐우드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그대를 초대하였다.] 그 말을 듣고 아이반의 표정이 굳었다. 단순히 육성이 아니라 정신파에 가까운 의사전달. 이것이 무엇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세계수가 직접 강림했다고? 겨우 나 때문에?’ 경악하는 아이반에게 엘레나 이븐우드의 몸을 빌린 세계수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나는 이미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이 사용하는 세계수 네트워크 그 자체이자 엘프들의 집합의식이 신성을 얻은 실체 없는 초월자였다. 그 신성의 조각은 모든 엘프에게 나뉘어있었으니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계속해서 엘프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를 불렀소?”
아이반이 잔뜩 경계하며 묻자 세계수가 답했다. [그건 그대가 세계의 운명에서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운명이라는 것은 몹시 중요한 개념이었다.
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흐름. 세상 모든 것이 나름의 운명에 묶여있었으나 아이반은 아니었다. 그는 그 절대적인 흐름을 한 손에 쥐고서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이 수많은 신격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소.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하는데 도대체 내가 무슨 운명을 휘두른단 말이오?”
아이반이 불만스럽게 외쳤다. 지금껏 신들의 의지에, 퀘스트라는 빌어먹을 존재에 휘둘리기만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아이반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세계수는 단언했다. [그리하여 세계의 운명이 요동치고 있으니 그대가 운명을 휘두르는 것이다.
바뀌지 않는 미래가 변화하고 있으니 그대의 힘을 부인할 수 없다.] 모두 다른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는 예정된 것이었으나 아이반은 아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예정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존재조차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신격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에 얽매여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신격이었으니까. 빛의 신 아룬은 빛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오크투신 타르칸은 전투와 광기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며, 그들의 운명이었다.
플레이어. 하나의 세계를 게임판으로 삼아서 가지고 노는 존재. 한낱 캐릭터로 전락한 자신에게 아직도 그런 힘이 남아있었나, 그런 가치가 존재했었나.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그저 궁금해서 나를 불렀단 말이오? 그대의 장난감으로 쓸 수 있는 놈인지 아닌지가 궁금해서?”
독기가 가득 담긴 아이반의 물음에도 세계수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완벽한 신격이 아니니까. 오히려 나는 그대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무엇을 말이오?”
[나의, 우리의 운명을 바꿔주길 바란다.]“신격이 하지 못 하는 일을 나처럼 미약한 자가 잘도 하겠군.”
아이반이 그리 내뱉자 세계수는 문득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의 잃어버린 눈이 고통스럽다고 했지. 그것이 어째서인지 아는가?] “씨부럴, 빌어먹을 오딘이 가져간 내 눈으로 구슬치기라도 하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