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54
이유가 무엇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감이 아주 강력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천둥의 신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감히 가까이 다가오려는 번개의 정령이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스슥-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정령들이 빠르게 멀어졌다.
정신체인 그들은 누구보다 초월적인 시선에 민감했다. 아이반의 배후에서 지켜보고 있는 신들의 존재가 버겁기만 했다.
치지직! 휘이잉- 화르륵! 천둥의 신이 모른 척 망치를 만지작거렸다. 폭풍의 신이 하나 남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의 신은 지금이 타이밍이냐며 불꽃을 피웠다. 감히 자신들의 권능을 빌리면서 잡스러운 정령의 힘을 섞으려 하냐는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속성이 겹치는 정령들은 이미 멀찌감치 도망을 가버렸고, 그러지 않은 정령들도 거리를 벌려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엘레나 이븐우드와 델피노, 사나운 이빨이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좀 나대지 마시오.’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한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자 딱 그만큼 정령들이 뒤로 물러났다.
여러모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이대로 정령은 그저 물 건너가는 것인가 싶었는데, 뒤에 있다가 쭈뼛쭈뼛 앞으로 나서는 녀석들이 있었다.
회색빛 털을 가진 늑대 두 마리, 짙은 검은색 깃털에 제법 커다란 덩치를 가진 까마귀 두 마리. 감정과 개념을 근원으로 삼은 정령들이었다. 무엇을 원형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아이반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놈들.”
정령은 자연적으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념이나 문화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있지만, 특히 미녀의 모습을 하는 것들이 많은 건 운디네의 영향이었고, 역시 수많은 불의 정령이 있었지만, 특히 도마뱀의 형상을 한 것들이 많은 건 샐러맨더의 영향이었다.
두 마리의 까마귀, 두 마리의 늑대. 그런 모습의 녀석들이 아이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후긴과 무닌, 게리와 프레키. 오딘이 데리고 다닌다는 녀석들을 원형으로 태어난 정령들이 틀림없었다.
‘나를 말 그대로 아바타로 만들 셈이야.’ 아바타(Avatar), 곧 하늘에서 내려온 자. 위대한 천상의 신이 지상에서 활동하기 위해 만든 분신. 예전이라면 집어치우라고 소리를 쳤을 것이다. 결코 닮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을 가진 전사라면 감격스러운 일이었으나, 아이반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저 묘한 불쾌감만 느껴질 테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신과 닮았다는 말은 신의 힘을 끌어내는데 부담이 적어진다는 말과 같았다. 그를 기원으로 하는 마법을 사용하는데도 저항이 적었다.
마법은 곧 기적의 재현이었고, 신의 흉내였다. 신이 직접 자신의 화신으로 만들고 있다면 가지고 있는 역량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코스프레 약간 해주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너무나 컸다. 이건 만족스러운 거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이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생각이 원래 본인의 성격과 묘하게 거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 반문한 아이반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법이 문제였다.
마법사의 신비로운 지식과 사고방식이 그를 물들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는 지독한 고집쟁이이며 자신만의 기준에 파묻혀 사는 괴팍한 자들이었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까지 서슴지 않는 미친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과 과정만 생각하는 마법사적 사고방식이 서서히 아이반에게 깃들고 있었다. 강해질수록 자신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그걸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반은 알 수 없었다. 그런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반이 가만히 서 있으니 엘레나 이븐우드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들이 그대와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나와 맞는 녀석들은 이놈들이 전부인가 보오.”
“그러면 정령석을 꺼내 마력을 불어넣으시면 됩니다.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함께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이반은 품에서 정령석을 꺼냈다. 그리고 정령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피를 마시고 시체를 뜯는 지옥에 함께 하고 싶으면 오너라.”
마력을 머금은 정령석이 녹아들 듯 사라지고, 잘게 부서져 빛으로 흩날렸다. 정령들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우웅- 아이반은 자신과 이어지는 또 다른 라인이 생긴 것을 깨달았다. 정령들의 존재가 좀 더 뚜렷하게 느껴지고 새로운 힘이 차올랐다.
하하하하하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령들의 순수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어두운 목소리였다.
“이제 출발하겠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으니.”
정비를 마친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엘레나 이븐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연합 왕국까지는 저희가 보내드리겠습니다. 숲을 벗어나시면 먼저 이곳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그녀가 자세한 설명을 해드릴 겁니다.”
요정의 숲은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에 위치한 곳이었고, 그 출입구는 대륙 전역의 숲에 흩어져있었다. 그래서 요정의 숲을 경유한다면 공간을 뛰어넘어 일종의 포탈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걸어가려 했다면 로만 왕국에서 서부 연합 왕국까지는 한참이나 가야 했다.
중간에 대수림이나 강철산맥이 끼어있어서 멀리 돌아가야만 했을 테니까.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을.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엘레나 이븐우드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자 이내 다른 엘프가 등장했다. 일행을 서부 연합 왕국까지 안내할 자였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새로운 엘프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점점 멀어지는 엘프의 마을과 요정의 숲을 보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습니다.”
델피노가 속삭이듯 말하자 사나운 이빨이 동의했다.
“이상한 곳이다. 하지만 잊지 못할 것 같다.”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이나 정령들의 쉼터, 기묘한 엘프의 마을까지. 하나같이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모험가가 경험하지 못할 풍경이다. 그렇게 몇 걸음 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어느새 요정의 숲을 벗어나 물질계로 돌아온 것이다. 푸른 잎과 꽃이 가득하던 요정의 숲과 달리 이곳은 나무들이 다들 앙상했다.
“그래도 여기는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군요. 서부 연합 왕국으로 넘어와서 그런 걸까요?”
“그것보다 봄이 다가오는 셈이지. 이번 겨울은 참으로 길었소.”
숲의 경계까지 나오자 안내를 맡았던 엘프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숲을 벗어나서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끼리만 가도 될 것 같군. 그대는 돌아가시오.”
그 말에 엘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임무는 그대들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조금만 따라오십시오.”
안내자 엘프는 머뭇거리다가 숲을 벗어나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숲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사나운 이빨이 엘프를 흘깃 바라보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엘프의 표정이 저리도 풍부했군. 훨씬 살아있는 것 같다.”
노르드 전사에 빛의 신 아룬의 사제, 리자드맨과 엘프라는 기묘한 조합이었으나 서부 연합 왕국의 성문을 통과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거의 인간 위주인 로만 왕국과 달리 이쪽은 원래부터 이종족과의 왕래가 잦았기 때문이다.
경비병은 힐끔 그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검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아룬의 사제인 델피노의 영향이 컸다.
아룬 교단은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대륙 어디든 웬만하면 사제는 건들지 않았다.
안내자 엘프는 그들을 데리고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상업지구와 빈민가 사이의 애매한 지역으로 안내한 그는 어느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로 들어가서 그녀와 함께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이 어찌나 큰 스트레스였는지 엘프의 표정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행은 그를 굳이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조심히 돌아가시오.”
“부디 그대들의 앞길에도 축복이 가득하길.”
빠르게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길바닥에 계속 서 있을 생각이 아니라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똑똑똑! 아이반이 문을 두드렸으나 반응이 없었다. 분명 기척은 있었기에 그는 조금 더 강하게 문을 때렸다.
쾅쾅쾅! 그러자 단단히 잠겨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안쪽에서 다소 날카롭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와!”
일행이 안쪽으로 들어가니 누군가 반쯤 소파에 파묻힌 상태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스읍, 후- 한 뼘보다 조금 긴 곰방대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매캐하고 자욱한 연기 사이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백금발 머리카락에 짙은 녹색 눈동자. 몸매가 다 드러나는 꽤 자유분방한 옷차림에 심드렁하고 나른한 표정. 길고 뾰족한 귀엔 귀걸이 세 개가 흔들거렸다.
탁탁 곰방대의 재를 털어낸 그녀가 물었다.
“숲에서 보냈나?”
“그렇소. 요정의 숲에서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나 그녀에게 의뢰를 받았소. 사악한 의식을 막아달라던데.”
아이반은 대답을 하면서도 얼떨떨했다. 나름 열린 사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엘프에 대해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꽤 충격적인 것을 보면. 지금껏 그가 만난 엘프는 죄다 감정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없고 딱딱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동감이 넘치는 엘프를 만나니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요정의 숲에서 엘레나 이븐우드를 만났다? 요정의 숲이 외부에 함부로 개방될 곳이 아닌데, 직접 들어갔다 왔다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아이반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지금까지 만난 엘프들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세상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그래서 자기 생각을 감추는 것이 아주 노련한 얼굴이었다.
“세계수가 나에게 관심이 많더군. 덕분에 좋은 구경했소.”
“뭐? 아, 그래. 그랬어. 당신이 그 인간이란 말이지. 노르드 인, 아스가르드의 전사, 에시르손.”
스읍, 후- 그녀는 무심코 곰방대를 물었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뱉어냈다.
“불이 꺼졌네. 입맛만 버렸어.”
곰방대를 내려놓은 그녀는 기다란 바늘 두어 개를 마치 비녀처럼 사용해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했다. 굵기와 길이를 보면 명백히 바느질에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찔러 죽이기 딱 좋은 사이즈였으니.
“상당히 살벌한 것을 머리에 꽂고 계시는구려.”
아이반의 시선을 확인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인간들 틈에서 살아보니 이게 필요하던데. 엘프 옷고름을 한번 풀어보겠다고 덤비는 미친놈들이 워낙 많아서.”
“어리석은 남자들이군.”
“왜 남자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이반은 잠시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피 맛을 본 물건이오?”
“설마. 내가 그런 걸 머리에 꽂고 다니겠어?”
그녀가 싱긋 웃었다.
“항상 새것으로 교체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손짓하자 밀폐된 집안에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단번에 빠져나갔다. 정령의 힘을 다루는 솜씨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지금 보여준 것만으로 그녀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나는 이레인. 당신들은?”
“아이반 에시르손.”
“델피노입니다.”
“사나운 이빨이다.”
짧게 통성명을 마치자 그녀가 서류 더미를 꺼내며 말했다.
“좋아. 이제 서로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았네. 그러면 일 이야기나 하자고.”
서부 연합 왕국은 물자의 유통이 활발했다. 커다란 강과 서부 해안선을 끼고 있어서 수상 운송이 편리했고, 그 덕분에 다른 대륙과 동대륙 칼로난의 여러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부 연합 왕국은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웬만큼 특이한 일이 있어도 상대에게는 그런 문화가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넘어가곤 했다. 워낙 사건사고가 많은 곳이었다. 적당히 넘어가지 않으면 평범하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쪽은 흑마법사도 금지되어있지는 않아. 정당하게 시체를 구해서 연구한다면 네크로맨서도 인정을 하는 편이지.”
그 정당하다는 것이 실은 아주 복잡하고 어이없는 방식이었으나 어쨌든 법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