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55
“하지만 악마 숭배는 아니야. 그건 대륙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경계하고 있어.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만큼 선을 넘어가면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지. 그래서 악마 숭배자들이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녀석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 최근 이유를 알 수 없는 실종과 사망이 늘어났어. 나는 그걸 녀석들이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음, 그렇군.”
“녀석들이 하는 의식은 연달아서 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어. 조만간 이곳에서도 의식을 시도할 거야.”
평소라면 악마 숭배자들이 날뛰든 말든 그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녀석들이 하는 짓이 요정의 숲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거지.
“그걸 이쪽만 눈치챈 것은 아닐 텐데. 다른 쪽 반응은 어떻소?”
예를 들어 나라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성황청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귀족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왕국에서는 기사단을 풀었어. 성황청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고. 귀족들은 뭐, 이참에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봐 머리나 굴릴 테지.”
“그렇게 경계를 하는 중인데 과연 놈들이 움직이겠소?”
그 말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델피노가 끼어들었다.
“움직일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녀석들은 그 어떤 위험이 있어도 움직일 겁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시작했다면 끝을 보겠죠.”
“어째서 그렇소?”
“어디 한 곳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대륙 전역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다? 이건 본인들의 의지가 아니라 악마들의 지시가 분명합니다. 악마들은 인간의 위험을 신경 쓰지 않죠. 악마가 명령했다면 악마 숭배자들은 어떻게든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의지는 악마에 종속되어 있으니까요.”
악마 숭배자들이 본인을 어떻게 여기든 악마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써먹기 편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악마 숭배자들의 피해가 크다고 하던 일을 멈출 정도로 친절했다면 애초에 악마라고 불리지도 않았으리라.
“웬만해선 그들은 계획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악마 숭배자들에 대해서라면 델피노가 가장 전문가였다. 십수 년을 최전선에서 그들과 맞서 싸워온 구마사제의 의견을 믿지 않고 누굴 믿겠나.
“지금쯤 녀석들은 제물 준비가 한창이겠어. 먼저 녀석들을 찾으면 성공이고, 아니면 실패하는 거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이레인이 건조하게 말했다.
“잠깐이겠지만 동료가 되었네. 실력이 쓸 만하기를 바랄게.”
눈빛이 참으로 매섭군. 뒤통수에 화살이 박히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나 짐이 되지 마시오.”
노르드인, 아룬의 사제, 리자드맨 전사와 엘프 레인저라는 기묘한 조합의 파티는 사실 온갖 종족이 섞여 있다는 서부 연합 왕국에서도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모습을 감춰야만 했다. 스윽 이레인이 자신이 귀에 매달린 귀걸이를 쓰다듬자 그녀의 모습이 변했다. 길고 뾰족한 귀는 인간처럼 짧고 둥글게, 백금발 머리카락은 검은색으로, 짙은 녹색 눈동자는 갈색으로 바뀌었다. 이목구비와 피부가 미묘하게 달라져서 엘프의 화려한 미모조차 가려졌다. 지금도 제법 미녀에 속하는 외모였으나 이전과 비교하면 평범함의 범주로 들어온 셈이다. 아이반 역시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지팡이처럼 꾸미고 바닥을 두어 번 내리찍자 커다랗고 건장하던 덩치가 줄어들었다. 팽팽하던 근육이 빠지고 다소 왜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까지 하나 뒤집어쓰니 그가 아이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단한 변신술입니다. 예전보다 더욱 완벽한걸요?”
델피노가 감탄을 터트렸지만 아이반의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이것이 모두 강제로 깨닫게 된 마법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한편 아이반과 이레인이 변신하는 모습을 본 사나운 이빨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는 훌륭한 리자드맨 전사였다. 그건 마법이나 주술 같은 능력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솔직히 그는 평생 자신의 모습을 다른 것으로 감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사나운 이빨이 당황스러워하고 있으니 델피노가 그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서부 연합 왕국에서 리자드맨은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으니까요. 굳이 모습을 감추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델피노마저도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을 조금 만지니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그래서 그의 위로는 사나운 이빨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그만 출발하겠소.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니까.”
과연 모습을 바꾼 효과가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날아드는 시선이 크게 줄었다.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곧 지나갔다. 아주 튀는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녀석들이 로만 왕국에서는 약을 풀었지. 이쪽에서도 그렇게 하겠소?”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몇몇 영주까지 가담했던 그때와 똑같을지는 모르겠군요. 대량으로 약을 팔기 시작하면 무조건 조사가 들어옵니다. 그때처럼 영주가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면 꼬리만 잡힐 뿐이죠.”
아이반과 델피노가 속닥거리고 있으니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아. 일단 따라오기나 하라고.”
아이반과 일행은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말을 구했으나 평소보다 몇 배나 가격이 비쌌다. 대륙 동쪽에서 그린스킨과 크게 전쟁이 벌어진 것이 서부 연합 왕국까지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결국 그들은 혈통 좋은 말은 구경하지도 못하고, 적당한 짐말만 둘을 얻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나운 이빨은 신체 구조상 말을 타기가 어려워서 어차피 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싸구려 짐마차와 비포장도로의 조합으로 승차감은 여전히 최악이었으나, 속을 짚으로 채운 방석을 몇 개쯤 깔고 나니 그나마 괜찮았다. 마부석에는 아이반이 앉았다. 정말 마부처럼 부드럽지는 못해도 말을 모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저기서 오른쪽. 그러고 한동안 직진만 하면 돼.”
옆에 앉아서 길을 알려주던 이레인이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익!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바로 옆에서 그 냄새를 맡은 아이반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아, 내가 실례했나?”
이레인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 때문이 아니오. 그냥 평범한 담배 냄새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오.”
단순한 담배라기엔 그 속에 섞인 약초 향이 진했다. 아이반의 예민한 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걸 알았어? 코가 좋은데?”
“눈을 하나 잃었더니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지더이다.”
톡톡 아이반이 자신의 안대를 두드리자 이레인이 피식 웃었다.
“별로 부럽지는 않네.”
스읍, 후-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섞여 있지. 그래야 마음이 안정되거든.”
그녀의 표정이 순간 아련하게 변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면 요정의 숲을 떠난 지 제법 오래된 모양이오.”
이레인이 힐끗 아이반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신의 아버지가, 어쩌면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숲을 떠났지. 인간의 기준으로는 오래되었고, 엘프의 기준으로도 짧지는 않은 세월이 흘렀어.”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숲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동족을 만난 적도 없었다. 억지로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어내어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세계수와 연결되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엘프에게 세계수와의 연결은 신체의 일부이며, 정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걸 자신의 의지로 끊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숲을 벗어나 밖으로 향한 엘프들은 모두가 그런 각오를 하고 나온 고행자였다. 그들은 서로의 의지가 약해질까 두려워 우연이라도 마주치기를 거부했다.
“그 정도면 요정의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소?”
아이반의 질문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임무가 끝나지 않았어. 언젠가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을 때, 돌아가서 쉬어야지. 아직은 아니야. 앞으로 백 년은 넘게 거뜬하지.”
스읍, 후- 다시 한번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이전과 달리 아이반은 그 연기가 그리 가볍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왔네. 다들 준비해.”
이레인이 안내한 곳은 어느 낡은 고성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져서 간신히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오래되고 오래된 곳. 아무리 버려진 성이라지만 저런 것이 이런 외딴곳에 있다니.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헤치고 움직인 후에야 완전히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규모가 작지 않았다.
“여긴 어디요?”
아이반이 묻자 이레인이 곰방대를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서부 연합 왕국이 지금의 모습으로 합쳐지기 전에 존재하던 자잘한 나라들이 다 어떻게 되었겠어? 그 흔적이지.”
오래전 멸망한 나라의 왕성이란 뜻. 그 말을 듣고 다시 살펴보니 확실히 한 나라의 왕성다운 웅장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닳고 깨지고 무너졌지만 군데군데 새겨진 조각이나 전체적인 규모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이 더욱 황폐하게 느껴졌다. 한때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던 번성한 곳이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앙상한 나무와 마른 풀만 가득했다. 어째서인지 이곳의 바람은 조금 더 싸늘한 듯하다.
“아무리 망국의 왕성이라지만 꼴이 너무 초라한데.”
아이반이 중얼거리니 델피노가 말을 받았다.
“대륙의 서쪽에서는 지난 천 년 동안 크고 작은 것을 다 포함하면 백 개도 넘는 나라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졌습니다. 이곳 역시 그중 하나겠죠.”
그런 혼란을 거쳐 지금과 같은 서부 연합 왕국이 탄생한 것은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와중에 사라진 도시가 어디 하나둘이겠나.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른하던 기색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에 그놈들이 있단 말이오?”
“며칠 전에 수상한 자들이 이쪽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들었지. 지금까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어.”
“이왕이면 한 번에 잡았으면 좋겠군.”
우웅- 아이반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어디선가 까마귀 두 마리가 나타났다. 얼마 전 요정의 숲에서 함께하게 된 녀석들이다. 그는 꺼림칙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하면서도 녀석들을 원본의 이름을 따서 후긴과 무닌이라 불렀다.
“고디 흐라픈블로트스(Goði hrafnblots).”
노르드의 언어로 ‘큰까마귀를 부리는 사제’라는 뜻.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후긴과 무닌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풍경이 그대로 아이반에게도 보였다. 남의 시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꽤 어색했지만 아이반은 빠르게 적응했다. 그는 헤임달이 내려준 권능을 통해 잠깐씩이나마 초월자의 시선마저 경험했던 몸이었다. 여기저기 무너져서 구멍이 숭숭 뚫린 성이 보였다. 하늘에서 살펴보니 그냥 보는 것보다 더욱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한동안 후긴과 무닌의 시야로 안쪽을 살펴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아직 후긴과 무닌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안에 있다면 틀림없이 눈치를 채겠지.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별로 건진 것이 없군. 직접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소.”
일행은 자연스럽게 대열을 갖춰 움직였다. 전방에는 든든한 리자드맨 전사인 사나운 이빨이, 그다음은 전천후로 대응이 가능한 아이반이, 가장 중요한 사제인 델피노가 서고 마지막은 후방에서 견제가 가능한 이레인이 활을 빼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반은 힐끔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아직 신뢰가 없는데 그녀를 후방에 둔다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과민한 반응이야.’ 그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직 모두 털어내지 못한 버릇이 그에게 남아있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은 무뎌질 필요가 있었다. 일행은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덩치 큰 사나운 이빨마저도 발걸음 소리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았다. 리자드맨 사회에서 훌륭한 전사는 곧 훌륭한 사냥꾼과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 그가 섣불리 기척을 흘릴 리가 없었다. 착! 앞서 움직이던 사나운 이빨이 꼬리를 세웠다. 무언가 그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반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니 사나운 이빨이 바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본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열다섯, 아니 열여섯인가?’ 주변을 넓게 움직이며 조금씩 단서를 모아 규모를 짐작한 아이반이 일행에게 수신호로 알렸다. – 적, 열여섯, 안쪽, 여섯. 열여섯 명이 들어와서 열 명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흔적은 없었으니 안쪽에 여섯 명이 있으리라. 레인저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복잡한 수신호라면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했겠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수신호로는 이정도가 최선이었다. 물론 사나운 이빨은 그런 아이반의 수신호조차 제대로 이해한 눈치가 아니었다. 대신 그 나름으로 설명을 더하려 했다. 휙, 휙! 사나운 이빨은 안쪽을 가리키고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뜻이지?’ 아이반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사나운 이빨은 뭔가 더 설명하려다 말고 안쪽을 가리켰다. 이건 다들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빨리 들어가자는 의미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흔적이 끊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래 방치되어 흙으로 덮인 돌바닥은 다행히도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녀석들이 지하로 내려갔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여줬다. 한때는 분명 나무로 된 문이 달려있었겠지만, 지금은 썩어 사라졌다. 지하로 가는 계단만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근처에 다가가자 일행의 표정이 모두 굳었다. 드디어 사나운 이빨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비릿한 철의 냄새. 피와 죽음의 향기. 아이반의 신호를 받은 델피노가 빛의 구슬을 안쪽으로 던져 넣어 어둠을 밝히고, 일행이 단번에 지하로 뛰어 내려갔다. 착! 스릉! 무기를 꺼내 들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지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녀석들의 흔적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벽과 바닥을 통째로 색칠할 정도의 핏자국. 시커멓게 말라붙은 그 흔적. 무언가 그려졌던 마법진은 불타서 이리저리 뭉개지고 지워졌다. 그 주위로 재가 흩뿌려져 있었다. 델피노가 만들어낸 빛의 구슬이 그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줬다.
“···망할 놈들.”
아이반은 역겨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먼저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을 파악했다. 흑마법의 흔적, 사악한 마력의 잔향. 여기서 무언가 의식이 이루어졌음이 분명했다. 말라붙은 피는 흥건했지만, 뼛조각 몇 개를 제외하고는 시체가 없었다.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모습. 제물로 바쳐진 흔적이다.
“열여섯이 들어와서 열이 다시 빠져나갔지. 이곳에 여섯이 남았군.”
아이반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여섯 중 하나가 아직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곱.”
이레인이 그의 말을 정정했다.
“하나는 임산부였어. 출산이 머지않았던 것 같은데, 안타깝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