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59
“윽!”
뒤늦게 아이반을 따라온 델피노가 신음을 흘렸다. 온 사방에 지독한 원념이 가득했다. 그것이 악마의 힘을 통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찬란한 빛의 주, 아룬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찬란한 주여, 위대한 빛이여. 지금 이 땅에 당신의 권능을 내리시옵소서. 어둠에 물든 안타까운 자들에게 따듯한 자비를 베푸소서.”
화아아- 델피노의 등 뒤로 빛이 떠올랐다. 그의 기도를 받은 빛의 신 아룬이 응답하여 찬란한 빛을 지하 성채에 내려주었다.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빛이 퍼지자 피눈물을 흘리며 다가오던 병사들이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마의 힘과 원념으로 이루어진 몸이 정화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 신이 또다시 우리를 버리려 하다니! 쿵! 분노한 망국의 왕자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시커먼 오라가 흘러나와 병사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빛으로 정화되던 병사들이 다시 원념을 불태웠다.
그들의 눈에서 이전보다 더욱 진한 피눈물이 쏟아졌다.
“아시콘의 영광을!”
“우리의 땅을 되찾아라!”
끝까지 망국의 왕자를 모시던 기사들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그에 호응하며 달려들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에 겁먹지 않고 앞을 막아섰다.
“나,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의 전사!”
그의 세로 동공이 더욱더 날카롭게 변했다. 전투의 흥분이 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이름다운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오래된 검은 나의 몸을 더럽힐 수가 없다!”
쾅! 사나운 이빨이 홀로 수십의 병사를 막아내는 동안 이레인이 활을 빼 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시위를 당겼다. 끼익! 그녀의 주변에 흐르던 공기가 압축된다.
그녀가 쥐고 있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화살이 수십이나 허공에 만들어졌다. 피우웅! 이레인이 마침내 시위를 놓자 그녀의 화살이 순식간에 병사들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뒤따르던 바람의 화살까지 모두가. 병사들의 몸을 파고든 바람의 화살이 순식간에 팽창한다.
압축되어있던 공기가 제 모습을 되찾고, 그만큼 주변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강렬한 폭발음이 피눈물 지하 성채를 뒤흔들어 놓았다.
콰광! 후드드! 땅이 흔들리고 지하가 요동쳤다. 성벽에 금이 가고 천장의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걸 신호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아이반이 달려들었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을 통해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 창을 휘두른다. 망국의 왕자가 그걸 받아치고 반격을 하려고 할 때 아이반이 슬쩍 옆으로 돌아가 불꽃을 내뿜었다.
화르륵! 망국의 왕자는 뜨거운 화염이 자신을 덮칠 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돌렸다. 잠시 잠깐의 틈. 아이반의 환영이 그의 눈을 가리고 반응을 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이 뿜어낸 불꽃은 녀석의 몸을 태우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 시커먼 오라가 흘러나와 막아냈다. – 나의 왕국을 그렇게 불태웠느냐! 퉁! 아이반은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은신, 기습, 환영마법을 순식간에 조합하여 적의 감각을 속이고 사각으로 움직였다. 두 마리 늑대 정령이 그것을 도와주었다.
망국의 왕자를 공격해 아이반이 몸을 숨길 수 있게 만들었다. 컹, 컹! 한껏 자세를 낮춘 늑대 정령들이 망국의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결코 강하지 않았으나 두려움을 몰랐다. 게리(Geri)와 프레키(Freki), 둘 모두 탐욕스러움을 뜻하는 이름. 오딘이 다루는 늑대를 원형으로 같은 이름을 받은 녀석들이었다.
노르드 신화에서 말과 이름은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였다. 신화 속의 존재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었기에 점점 그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전사자의 시체를 뜯던 늑대의 힘이 그들에게 깃들었다. 그 이빨로 망국의 왕자를 깨물어 그가 이미 한참이나 전에 죽어버린 전사자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 하찮은 미물마저 나를 막아서느냐! 쾅! 망국의 왕자가 늑대들을 떨쳐 날렸다. 그 창으로 게리와 프레키의 머리를 꿰뚫어 녀석들을 없애버렸다.
늑대 정령들이 역소환되는 충격이 아이반을 때렸고, 그렇게 생긴 미세한 흔들림을 통해 망국의 왕자가 아이반의 위치를 알아차렸다. – 쥐새끼 같은 놈! 도망치지만 말고 그 목을 내놓아라! 게임 더럽게 하네. 마치 그와 같은 극찬을 듣고 아이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진심으로 흡족한 기분이었다.
“당신은 이미 육신이 썩어 사라져 내놓을 목도 없으면서 나대지 마시오.”
쉬이익! 아이반이 마력을 가득 실어서 강하게 도끼를 날렸다. 망국의 왕자가 그것을 쳐내며 반걸음쯤 뒤로 물러난 순간, 아이반이 주문을 외웠다.
“발드르 갈가(Valdr galga)”
노르드의 언어로 말하길, 교수대의 지배자. 휘리릭! 망국의 왕자가 밟은 룬문자에서부터 마력의 밧줄이 솟아나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려 목매달기 시작했다. 점점 숨을 조이는 밧줄을 붙잡고 망국의 왕자가 이를 악물었다.
– 이, 익! 반, 역자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나라가 불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수대에 매달려 생을 잃었던가.
명예로운 죽음으로 백성들을 살리길 원했던 부왕은 온갖 수치를 받으며 목이 매달렸고, 장군이 그랬으며, 동생들이 그러했다. 그 증오스러운 것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사실에 망국의 왕자가 분노를 토해내었다.
– 모조리 씹어 삼키겠다! 투두둑! 마력으로 만들어진 교수대가 무너져 내린다. 망국의 왕자가 뿜어내는 사악한 마력이 주변을 부수고도 모자라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아이반은 흘깃 위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선 아직도 흑마법사들이 의식을 진행 중이었다.
검붉은 화염이 타오르며 악마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걸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망국의 왕자가 가까이 다가와 창을 휘둘렀다.
– 다시는 너희에게 왕좌를 넘겨주지 않겠다! 휘익! 창이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풍압에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둔중한 충격에 머리가 멍해진다.
잠시간의 방심. 망국의 왕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원래라면 막았겠지. 하지만 눈을 잃어버리고 생긴 사각을 파고들었기에 아이반의 반응이 늦었다.
이어지는 공격이 다가온다. 날카로운 창이 목을 꿰뚫으려 했다.
그 순간 아이반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토르.’ 쿠르릉! 쾅! 지하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늘에 있을 천둥과 벼락이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윽! 망국의 왕자가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창을 쥐고 있는 그의 발이 시커멓게 변하고 뜨거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반의 몸에서 흘러나온 천둥신의 권능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치지직!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른 천둥의 힘을 느끼면서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렸다.
“길게는 버틸 수가 없소. 그러니 짧게 끝냅시다.”
그 말에 천둥의 신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자신을 부른 전사가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지켜보았다.
피와 죽음, 치열한 전투. 전장의 냄새를 맡은 천둥신이 아주 약하게 망치를 휘둘렀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전사가 버틸 수 있을 만큼.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을 타고 흐르는 번개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막대한 힘으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번쩍! 쾅! 그야말로 천둥걸음. 번개와 같은 속도와 위력으로 다가간 아이반이 망국의 왕자를 걷어찼다.
왕자의 몸에서 음산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막아섰지만, 감히 천둥신의 망치를 견딜 수는 없었다. 한참이나 튕겨 나간 망국의 왕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일어났다.
그대로 아이반을 공격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사나운 이빨에게 막혔다.
“나는 너의 피를 보지 못했다!”
주변에는 한 줌 핏물과 흙먼지로 돌아간 병사들의 흔적만 가득했다. 그 많은 병사를 모두 처리하고 망국의 왕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인간보다 훨씬 큰 체구로 휘두르는 두꺼운 검은 거의 둔기에 가까운 충격량이었다. 망국의 왕자가 단번에 뚫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사이, 아이반은 두 다리를 단단히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땅을 밀어내듯 앞으로 움직이며 허리를 비틀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그의 단단한 팔을 타고 창을 쥐고 있는 손까지 전달되었다. 창을 힘껏 던지면서 아이반이 크게 소리쳤다.
“토오르으으으!”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창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어느새 흑마법사들이 둘러싸고 있던 검붉은 악마의 불길을 꿰뚫고 그곳에 박혀들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온다. 곧 천상의 힘이 지하에 닿았다.
콰과광! 강렬한 충격파와 함께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악마의 불꽃을 둘러싸고 있던 악마추종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지하 성채의 일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삐- 마력으로 보호했음에도 귀가 먹먹해졌다. 순간적으로 청력을 상실해 더없이 조용해진 곳에서 아이반은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반은 문득 몸이 무거워졌음을 느꼈다. 강렬한 존재감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의 인도자.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부하이자 신화와 역사에 이름을 새긴 대악마. 검붉은 악마의 불꽃이 녀석의 눈동자가 되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시선에 들어온 이 한심하고 짜증나는 필멸자를 바라보았다.
[너 는 막 을 수 없 다 하 찮 은 필 멸 자 야] 녀석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영혼이 뒤흔들렸다. 아직은 결코 넘을 수가 없는 막대한 존재감에 아이반이 짓눌리려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토르.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호전적이며 가장 강하다는 천둥의 신. 그가 아이반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악마의 존재감에 짓눌리던 전사가 쓰러지지 않도록 일으켜 세웠다.
천둥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무심한 눈으로 지켜만 보았다.
“···이반! 아이반! 정신 차리십시오!”
문득 들려오는 델피노의 외침에 아이반이 눈을 끔뻑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뭔가를 본 것 같았는데?’ 얼떨떨한 표정으로 델피노를 바라보니 그가 신성력을 퍼부어 그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제 귀는 좀 들립니까?”
커다란 소리에 고막이 터져버린 것을 델피노가 신성력으로 회복시킨 모양이다. 사나운 이빨 역시 괴로운 표정인 걸 보니 그도 청력을 잃었다가 되찾은 모양이었다. 멀쩡한 것은 이레인 정도였다. 그녀는 바람의 정령으로 아예 진공상태를 만들어 소리를 차단했었다.
“으흠······.”
속이 울렁거리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다 낫지도 않았는데 신의 힘을 빌린 것은 좀 무리였나?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강해지고 엘프에게 약속했던 보상을 받으면 멀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은? 다른 적들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이레인이 대답했다.
“모두 처리했어. 같이 갈 뻔도 했지만.”
그녀의 눈에서 푸른 마력광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정령들이 무너져 내리는 흙과 바윗덩이를 막고 옆으로 치우고 있었다.
“다행히 깔려죽지는 않았네. 운이 좋은 걸까?”
“평범한 지하가 아니라 이미 던전화가 된 곳이니까 더는 무너지지 않을 거요. 현실이 아닌 이계니 던전핵을 제거하면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겠지. 그 전에 고생한 보람은 있어야지 않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델피노가 짝하고 손뼉을 쳤다.
“파밍이로군요!”
일행이 피눈물 지하 성채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잔뜩 지친 모습의 성기사가 보였다.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가 문득 느껴지는 기척에 화들짝 놀라 검을 들어 올렸다.
“누구냐!”
성기사는 그리 소리를 지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에 어느 버려진 성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기를 내리시오.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소. 아예 처음 보는 얼굴도 아닌데.”
아이반은 손을 내저으면서 흘깃 성기사의 상태를 살폈다. 피곤한 얼굴, 더럽혀진 갑옷, 잔뜩 올라가 있는 경계심. 신앙심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고된 단련을 거듭하는 성기사가 이런 모습이라니. 일행이 지하에서 고생하는 동안 바깥에서도 상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하긴, 피눈물 지하 성채에서 정작 흑마법사들은 별거 없었지. 밖에서 이들이 주력을 막고 있었나 보군.’ 아이반이 슬쩍 눈짓하자 델피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전 이들이 보인 태도를 보면 이러는 편이 옳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델피노가 빛의 신 아룬의 신성력을 내뿜어 성기사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성기사는 순간 움찔했으나 신성력을 확인하고는 한결 긴장감이 풀어진 듯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었으나 신성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악마숭배자와 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성기사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간밤에 흑마법사들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악마숭배자를 쫓는다더니,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군요.”
“우리도 지하 요새에서 흑마법사들을 보았죠. 그들을 처리하고 막 빠져나온 참입니다.”
그러면서 델피노는 슬쩍 뒤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단심문관께서도 함께 계십니까? 안쪽에서 꽤 놀라운 것을 발견했는데.”
“놀라운 것이라면···?”
“그건 아무래도 피에르 사제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성기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짧게 피리를 불어 신호를 날리더니 일행에게 말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바깥 상황을 살필 수가 있었다. 피와 시체가 가득했다. 대부분은 몬스터였고, 때로 언데드와 흑마법사의 시체, 가끔은 성기사와 사제의 것도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렇게나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왜?’ 악마숭배자에게는 극상성이라 할 수 있는 성기사와 사제가 이렇게나 많았다. 보통은 불리한 것을 깨닫고 적당히 싸우다 빠졌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만큼 이번 의식이 중요했다는 걸까? 아니면 저게?’ 아이반은 흘깃 델피노가 쥐고 있는 상자를 보았다. 그 속에는 피눈물 지하 성채의 핵이었던 붉은 잔이 들어있었다. 한때 성물이었다는 붉은 잔은 이미 악마의 마력에 물들어 타락한 상태였다. 그것을 델피노가 신성력을 쏟아부어서 임시로나마 봉인을 해둔 것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대로 홀릴 만큼 지독한 마력을 줄줄 뿜어내고 있었다. 범상치가 않았다. 탁! 임시로 만들어진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피에르 로렝이 앉아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그의 표정에도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래, 나를 찾아오셨다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델피노가 쥐고 있는 상자에 눈길이 박혔다. 뛰어난 구마사제인 델피노가 거의 완벽하게 기운을 차단하고 있는데도 한 번에 알아보는 것을 보면 그 역시 평범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건 무엇이오?”
“지하 요새에서 찾은 물건입니다. 던전핵이 되었다가, 악마숭배자들이 하는 의식의 핵이 되기도 했죠. 겨우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델피노가 상자를 내밀자 피에르 로렝이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그리고 문득 화염처럼 뜨거운 신성력을 내뿜어 막사를 감싸 안았다. 과연 이단심문관이었다. 신성력의 질과 양이 상당했다. 덜컥! 델피노가 임시로 만들어놓았던 봉인이 풀리고 지독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시커먼 기운이 밖으로 나가려다 화염 같은 신성력에 막혀 타올랐다. 상자 안에는 낡고 상처 가득한 황금색 잔이 하나 들어있었다. 한때는 신성하게 불타올랐을 것이 그 빛을 잃은 채로 오히려 어둠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붉은 잔, 잃어버린 성물이 어째서 이렇게······.”
무심코 붉은 잔을 들어 올리려던 피에르 로렝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습하고 사악한 악마의 마력이 그의 손을 물들이려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강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파고들려 하다니, 악마의 기운이 참으로 지독했다. 결국 다시 붉은 잔을 내려놓은 피에르 로렝이 상자를 덮고 신성력으로 억눌렀다. 붉은 잔이 뿜어내는 마력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봉인하고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것이 저기에 있었소? 망국의 지하 요새에?”
“그렇습니다. 모습은 비록 그렇게 변했지만 말이죠.”
그 옛날 붉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기적을 행할 때 사용했다는 성물이었다. 알베르홈이 쿤다라 교단의 사제였으니 붉은 잔 역시 따지고 보면 쿤다라 교단의 성물인 셈이다. 그런 것이 수백 년이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망국의 요새에서 이런 꼴로 발견이 된다니 피에르 로렝 입장에서는 몹시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붉은 잔을 봉인한 상자를 쓰다듬다가 감정을 털어버리고 물었다.
“이것을 나에게 가져온 이유가 있을 터, 붉은 잔을 쿤다라 교단에 돌려줄 생각이오?”
그 질문에 델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