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0
“그렇습니다.”
붉은 잔은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악마의 힘을 몰아내고 다시 정화해야만 했다. 그건 임시로 봉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라 대신전에서도 몇 년은 걸렸다.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때 자신들의 성물이었던 붉은 잔이 다른 이의 손에서, 그것도 타락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쿤다라 교단이 아니었다. 그건 신앙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니까. 그냥 이것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다른 보상을 챙기는 것이 여러모로 이득이다. 빛의 신 아룬의 사제인 델피노가 상대라면 쿤다라 교단이 대충 입을 닦고 끝낼 리도 없고. 피에르 로렝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아이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정확히 아이반과 눈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물을 금전으로 거래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이것으로 그 대가를 치르겠소.”
팟! 피에르 로렝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 단번에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살이 쩍 갈라지고 붉고 뜨거운 피가 주르륵 바닥으로 흘렀다. 팔에 상처를 내서 무례를 사과라도 하겠다는 뜻일까? 어차피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멀쩡해질 텐데 팔을 자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무슨 의미야. 아이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생기고 피가 흐르는 것 정도는 이들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평범한 퍼포먼스라면 실망스러울 것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주르륵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떨어지던 핏방울이 허공에 멈추고, 바닥을 물들였던 피가 일렁거리면서 위로 솟아올랐다. 어느새 붉고 뜨거운 피는 모습을 바꿔서 붉고 뜨거운 검이 되어있었다. 탁! 피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검을 한 손으로 쥐고서 피에르 로렝이 말했다.
“브리카, 우리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검이오.”
그러자 델피노가 감탄을 터트리며 외쳤다.
“피의 검 브리카! 그럼 당신은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나의 먼 선조시오. 그분의 피를 이었지.”
피에르 로렝은 검을 바닥에 꽂으면서 말했다.
“이것을 그대에게 주겠소, 아스가르드의 전사. 붉은 잔을 되찾는 값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의 눈빛을 받은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왜소하게 변신하고 마법사로 분장해도 상대는 그것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으드득! 아이반이 어깨를 폈다. 굽은 허리를 세우고 근육이 차오른다. 작고 왜소하던 덩치의 마법사에서 강인한 전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검을 잡았다. 피의 검 브리카는 따뜻하지 않았다. 뜨거웠다. 피보다는 불꽃을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손등이 따끔해서 돌려보니 유려한 문장이 새겨졌다가 이내 스며들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일종의 주인 인증이 끝난 셈이다. 그 모습을 보던 피에르 로렝의 눈동자에 드물게도 서운한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브리카가 그대를 환영하는군. 우리 가문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모양이오.”
아이반은 브리카를 빤히 바라보다 자신의 핏속으로 숨겼다. 이 검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는 잡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좋은 검이오. 잘 쓰겠소.”
피에르 로렝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을 하나 내어주겠소. 쉬려면 거기서 쉬시오.”
며칠쯤 그곳에서 머물면서 일을 마무리 지은 일행은 쿤다라 교단과 헤어져 이레인의 거처로 향했다. 지하 요새로 가기 전 마을에 맡겨둔 말과 마차는 다행히 도끼를 쓰지 않고도 멀쩡히 돌려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걷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레인의 거처에 도착한 모두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상당히 힘든 일정이었다. 솔직히 아주 피곤했다.
“그래도 의뢰는 나쁘지 않게 해결했군.”
“인정하지. 당신 실력이 꽤 괜찮았어.”
치익! 이레인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의자에 앉았다. 짜증스러운 기색이 있던 그녀의 표정이 스르륵 풀렸다.
“의뢰 대가가 뭐라고 했지? 잃어버린 눈을 회복하는 것? 그러면 다시 요정의 숲으로 가야겠네. 그 눈을 치료하려면 세계수의 힘이 필요하니까.”
“아마도. 이제야 이 답답한 안대를 벗어버릴 수 있겠어.”
톡톡 아이반이 자신의 안대를 두드렸다. 꺼슬꺼슬한 감촉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실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목욕을 하러 들어가는 사나운 이빨을 보면서 아이반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일단 며칠만 신세를 지겠소. 그 후 헤어집시다.”
“알아서 해. 방은 많으니까.”
그러나 일행은 편히 쉬지 못했다. 다음 날 누군가 문을 거세게 두드리며 찾아왔기 때문이다. 쿵쿵쿵! 아침에 제일 먼저 씻으러 가려는 것을 방해받은 사나운 이빨이 불만스러운 듯 꼬리로 바닥을 치면서 문을 열었다. 탁탁탁!
“무슨 일인가!”
씩씩 불쾌한 숨을 몰아쉬던 사나운 이빨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야? 여기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초를 태우던 이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 내 집에는 무슨 일이지?”
그 말대로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기사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무장을 갖춘 것이 썩 유쾌한 이유는 아닌 듯 보였다. 흘깃 안쪽을 보며 일행의 모습을 확인한 성기사가 아주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빛의 신 아룬의 사제 델피노, 그리고 그 일행. 맞소?”
“맞습니다만······.”
“잠깐 조사를 해야겠소. 급한 상황이니 부디 실례를 용서하시오.”
“조사? 도대체 무슨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무슨 일이기에?”
델피노가 불쾌한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성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성기사 스물일곱, 사제 아홉, 이단심문관 하나. 모두가 죽거나 실종되었소.”
뒤에서 듣고 있던 아이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소리요?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 아이반이 크게 소리치자 성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이상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런 곳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오. 솔직히 말하자면 내부적으로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소.” 그러면서 성기사들은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재촉했다. 성기사와 사제가 한 번에 수십 명이나 죽어버렸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뭐, 알겠소.” 아이반과 일행은 순순히 성기사들과 동행하여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그들 역시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이반과 일행은 순식간에 무장을 갖추고 집을 나섰다. 성기사들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참고인이지 용의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달라질 수도 있겠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 불의 신 쿤다라의 신전으로 향했다. 신도들의 눈을 피해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니 심각한 표정의 성기사와 사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버려진 지하 요새에서 악마숭배자들과 만났다고 했죠. 뭔가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까?” “의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악마의 힘을 불러와 세상을 뒤흔드는 사악한 의식이었죠.” “정확히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육망성을 그리고 악마의 일부를 소환하여, 제물을 바치고 차원방벽을 약화하는······.” 구마사제인 델피노의 증언은 상당히 심층적이었고 사실적이었다. 상대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군더더기를 빼내고 핵심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그때의 일에 대해 알려주고 나서야 물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면 이제 무슨 상황인지 저희도 알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웃으며 헤어졌던 사람들이 죽었다니 무척이나 심란하군요.” 그 말에 조사를 맡은 사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대들과 헤어지고 사흘 뒤, 악마숭배자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긴급 통신 구슬을 통해 급박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현장을 확인했는데,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있더군요.” “그러면 그들은···?” “일부는 사망을 확인했고, 나머지는 모두 실종상태입니다.” 실종자 생환의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종상태라는 것은 그저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악마숭배자들에게 인간의 시체는 무척이나 훌륭한 재료였다. 심지어 성직자의 것이라면 더욱더 그렇겠지. “우리는 그들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합당한 복수를 해야겠지요. 영원한 불꽃이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조사를 맡았던 사제가 다소 격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진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나절 동안 이어진 조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 늙은 성직자가 눈을 감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이런저런 황금색 수실로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특별히 권위적인 표정이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지도 않았지만 감돌고 있는 분위기에서 높으신 분이라는 느낌이 확 풍겼다. 델피노가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성호를 그으며 인사했다. “로메른 추기경님!” 로메른 추기경은 쿤다라 교단의 서부 연합왕국 지역 대교구 대주교였다. 말하자면 서부 연합왕국에서 가장 높은 쿤다라 교단 성직자. 우연히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거물이었다. 말하자면 웬만한 나라의 공작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로메른 추기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메른일세. 별것 없는 늙은이지.” 허허 웃는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수십 명이나 되는 성직자가 죽거나 실종된 상황이니 즐거울 수가 없었다. “실종되기 전 피에르 사제에게 짧게 보고를 들었네. 악마숭배자와 싸우는 데 그대들의 도움이 컸다고.” “도움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저 저희도 그들을 쫓는 와중에 겹쳤던 게지요.” “그래, 그랬구먼.” 로메른 추기경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운 목숨이 사라졌네. 다들 세상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몸을 불태우던 사람들이야.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게.”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부할 수가 없었다. 추기경이 직접 나와 부탁하니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일행이 떠나고 홀로 남은 로메른 추기경은 강단을 바라보았다. 불의 신 쿤다라의 상징과 같은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늙은 성직자는 그 횃불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이 어두운 땅에 당신의 등불을 내려주소서.” 쿤다라 신전에서 나온 일행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또다시 적을 추적할 준비를 하였다. 한 번의 시도를 막아냈지만, 녀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상은 추가로 받아야겠소. 수지가 맞지 않아.” “요정의 숲에서 알아서 챙겨줄 거야. 우리는 그렇게 보상이 짠 종족이 아니라고.” “글쎄,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일행은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고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 상대는 수십 명이 넘는 성직자들을 습격해서 처리했다. 절대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의식이 마무리되고 이쪽이 마지막이라고 했던가? 그러면 사방에 퍼져있던 악마숭배자들의 힘이 이쪽으로 뭉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아이반이 심각하게 말을 꺼내자 델피노가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교단에서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악마숭배자들과 싸울 병력을 모으고 있어요.”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 역시 말을 얹었다. “지금 저희 교단의 성전기사단 둘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구마사제와 전투수녀단 역시 활동 중이고, 지역 영주들과 왕실에 기사단과 병사들까지 요청했습니다. 녀석들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레인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새의 발목에 묶여있던 종이를 확인하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 녀석들이 꽤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녀는 이전과 달리 엘프의 외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부 연합왕국 곳곳의 숲과 요정의 숲의 연결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가끔은 자연적으로도 그럴 수가 있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게, 여러 숲에서 동시에 그럴 리가 없어. 숲의 흐름을 거부하는 힘, 그러니까 악마의 힘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소리지.” 아이반 역시 동의했다. “흩어져있던 놈들과 뭉친 녀석들을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될 거요. 어쩌면 대악마라도 소환했을지 모르지.” “대악마를 소환한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녀석들의 의식을 막지 못한다면 사실이 되겠지. 틀림없소.” 쿤다라 교단의 사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화시대 이후로 대악마가 물질계에 직접 소환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면 신화시대에는 있었다는 소리군.” 아이반은 그러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눈, 안대를 톡톡 가리켰다. “악마가 날뛰고 숲이 불탄다, 나는 그런 미래를 보았소.” 갑작스러운 고백이었으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노르드의 신화는 모두가 미래에 대한 예언과 그것에 대비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모두 신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 차마 반발할 수가 없었다. “일단 현장을 확인해보고, 그 근처에서 수색을 시작해야겠소. 이미 도착해있는 추적대와 합류하는 것이 우선이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서둘러 출발했다. 덜그덕, 덜그덕! 말과 마차가 빠르게 달렸다. 말을 탈 수 있는 이들은 말을 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마차를 탔다. 쿤다라 교단에서 제공한 마차는 예전 그 싸구려 개조 짐마차와는 달랐지만, 워낙 빠르게 달리다 보니 충격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똑같았다. 사나운 이빨은 사흘 동안 왜 자신의 종족은 말을 탈 수가 없는 신체 구조인가 한탄했다. 강인한 전사인 그에게도 꽤 고역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서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거기엔 아직도 전투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 부서진 나무, 파헤쳐진 바닥, 흩뿌려진 피의 흔적. 겨우 수습한 시체는 모두 치워진 상태였다. 대부분 습격한 녀석들이 시체까지 가져가서 남은 것은 신체의 일부밖에 없었지만. 현장만으로 격렬했던 전투를 짐작한 이레인이 눈을 찌푸렸다. “지독하네.” “그렇습니다. 어찌 이런 일을···!” 분노를 토해내는 성기사를 바라보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압도적으로 이길 수도 있었는데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지.” 스읍, 후- 곰방대에 연초를 채워 넣은 이레인이 한 모금 뻐끔 빨아들이고는 물었다. “어때, 아이반. 당신은 알아볼 수 있겠어?”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 말을 하던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다가 무겁게 말했다. “···정령이 전혀 없군.” 물질계에서 실체화된 정령을 보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다. 자연적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신체의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정령은 세상 만물 모든 것에 깃든 힘이자 세상 만물 그 자체의 화신이었다. 이렇게 정령의 흔적이 전혀 없는 장소란 일반적이지 않았다. 연기를 내뱉으면서 이레인이 설명했다. “보통은 알아볼 수 없겠지만 정령사라면 알아야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건 인위적으로 지워진 거야. 자연에 반하는 아주 강대한 힘이 지나가서 정령들이 사라진 거지.” 그녀는 아주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습격자라면 전투가 이렇게 치열할 리가 없어. 가지고 놀았다는 말밖에는 안되지. 이래서는 단서를 찾는 것이 별 의미가 없겠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던 아이반이 문득 표정을 굳히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피의 검 브리카가 솟아올라 손에 잡혔다. “뭐지? 적인가!”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외쳤으나 아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하지만 좀 느낌이 이상해서.” 우웅- 피의 검 브리카가 떨리고 있었다. 특별히 마력을 주입한 것도 아닌데 검이 울리는 것이다. 예전 주인의 죽음을 듣고 애통해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울부짖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백 년간 피로 전승되던 검이었다. 어쩌면 미약한 영성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반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도대체 왜 브리카가 울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신성력이 반응하고 있소.” 원래 피의 검 브리카는 성검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로렝에게 듣기로는 선조가 알 수 없는 경로로 얻게 된 보물이라고 했고. 그러나 한때 피의 성자 알베르홈이 사용하였고, 그 이후 수백 년간 지속해서 불의 신 쿤다라의 신성력을 받아들인 브리카에는 그 힘이 묻어있었다. 그 신성력이 지금 반응하고 있었다. 불의 신 쿤다라가 자신의 신도를 학살한 악마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화르륵! 브리카에 묻어있던 신성력이 남김없이 타올랐다. 그리고 피의 검과 감응해 어느 곳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아이반의 눈에 낯선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유적지, 산, 지하, 오래된 보물, 원한의 땅. 주르륵! 아이반의 잃어버린 눈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가죽으로 된 안대를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진 핏물이 그대로 검은 까마귀로 변해 날아올랐다. “신이 단서를 쥐여주는군.”
아이반은 자신이 본 단편적인 장면을 통해 목적지를 정했다. 요정의 숲과 연결이 끊어진 장소를 중심으로, 정령의 흔적이 사라진 길을 따라 추적했다. 후긴과 무닌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를 이끌었다.
“이쪽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동행하는 성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역시 추적술에 대해서는 꽤 익숙하다고 여겼는데 바닥에는 전혀 실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맞을 거요. 정령의 흔적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발자국이나 그런 건 다른 쪽으로 이어져 있는데······.”
“그쪽은 다른 이들이 이미 추적하고 있잖소?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게 함정으로 보이는군. 진짜는 이쪽이오. 적어도 적의 핵심 전력은 확실하지.”
실체화조차 하지 못하는 미약한 정령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정령사가 아니면 어려웠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지만 아이반과 이레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으니까. 정령의 기운이 지워진 길을 따라가던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정령들이 도망갈 정도로 지독한 녀석이야. 만약 녀석과 싸우게 된다면 지금의 전력으로는 과연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마흔 명에 가까운 성직자 부대가 그대로 전멸했다. 그들이 그저 평범한 사제가 아니라 악마숭배자들과의 전투에 익숙한 성기사와 전투사제, 이단심문관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실로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 적이 나뉘었지만 그게 그리 좋은 소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추적하고 있는 아군 역시 나뉘었으니까.
“다른 쪽이 수가 더 많지만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위험해. 녀석은 물질계에 강림한 악마나 다름없어. 무슨 힘을 숨기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문제지.”
“물질계에 강림한 악마라니, 그 정도입니까?”
“거의 본체에 가까운 악마의 화신이야. 저 녀석들이 대악마를 소환하려 한다기에 믿지 못했는데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동안 대륙 각지에서 이어진 사악한 의식으로 차원방벽이 흔들린 상태였다. 거기에 본체에 가까운 악마의 화신이 움직이고 질 좋은 제물까지 얻었으니 신화시대에나 활동하던 대악마를 소환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타락한 성물에, 그와 연관이 있는 자의 피라니. 너무나 위험하군.’ 아이반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녀석들이 죽음의 인도자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악마와 관련되면 구마사제인 델피노의 의견이 가장 정확했다. 아이반이 그에게 묻자 긴 침묵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려울 것 같군요.”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짚어보던 델피노가 점점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죽음의 인도자는 너무 강력해요. 아무리 밑 작업을 하고 제물을 준비해도 물질계에 온전히 소환할 수 없는 거물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선주종족, 말하자면 드래곤이나 거인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이제 몇 남지 않은 선주종족이 움직였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움직였다면 제물이고 뭐고 필요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 델피노는 다른 악마를 소환하기에는 충분한 힘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죽음의 인도자가 아니더라도 위험한 악마들은 많습니다. 만약 그들이 소환되어 힘을 키운다면 결국에는 악마의 땅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죠.”
그렇게 된다면 성직자 수십의 목숨이 사라진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대륙의 존망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행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추적에 집중했다. 잔뜩 경계심을 올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연락을 받은 성황청의 각 교단들과 서부 연합왕국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걸렸다. 대군이 움직이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그게 가능한지, 앞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다.
“북쪽 숲으로 이어지는군.”
“근처에 요새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출발하시죠.”
잠잘 시간도 쪼개가며 추적하고 있었다. 다들 강인한 사람들이었지만 최상의 상태일 수는 없었다. 단순히 추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일도 대비를 해야만 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쉬는 것 역시 추적의 일부였다.
“그러면 그쪽에서 쉬었다가 가겠소. 다시 숲으로 들어가면 마음 편히 쉴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까.”
일행이 근처에 도착하자 요새가 바쁘게 움직였다. 낯선 이들이 갑자기 다가오니 혹시 무슨 공격이 아닐까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멈추시오! 당신들의 정체를 밝히시오!”
요새의 성벽 위에서 누군가 소리치자 아이반은 힐끔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런 일에는 그가 나서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성기사는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우리는 쿤다라 교단의 성전기사단입니다! 악마숭배자를 추격하는 도중 잠시 머물 곳을 찾아왔습니다!”
쿤다라 교단, 성전기사단, 악마숭배자.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요새가 바쁘게 움직이더니 창칼을 든 기사와 병사 몇몇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성전기사단이라고? 악마숭배자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소립니까?”
“최근 그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우리는 악마의 주구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새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서부 연합왕국에서도 악마숭배자를 추적하느라 떠들썩했으니까. 그래서 기사는 의심을 거두었다. 성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확실히 쿤다라 교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황청의 권위는 대륙 전역에 퍼져있었다. 종교적인 권위는 실질적인 권력과는 또 다른 것이라 아무리 귀족이라고 해도 교단의 성기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악한 종자들이 이쪽에 있습니까? 성벽 너머에는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숲밖에 없는데.”
“그것을 노리고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겠죠. 우리는 흔적을 따라왔을 뿐입니다. 하룻밤만 머물 수 있겠습니까?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숲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기사는 거부하지 못했다. 악마숭배자와 엮인 일에 괜히 비협조적으로 나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으니까. 혹시 앙심을 품은 교단에서 악마숭배자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고 몰아붙이면 아주 곤란했다.
“크흠, 알겠습니다. 그럼 누추한 곳이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죠.”
기사가 직접 모셔오자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잔뜩 긴장해서 자세를 바로 했다. 높으신 분들에게 찍히면 괴로운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반은 지나가면서 성벽 위에 있는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겨우 열다섯이나 먹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앳된 얼굴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열다섯이면 충분히 성인으로 인정을 받으니까. 목숨의 값이 가벼운 세계였다. 더욱 어릴 때부터 밥값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다. 안내를 하던 기사가 힐끗 아이반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반은 따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기에 그 역시 쿤다라 교단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서지는 않아도 다들 아이반을 리더로 대하고 있었으니까 뭐라도 높은 사람이라고 여겼겠지.
“혹시 뭔가 불편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악마를 때려잡으러 왔다는 성전기사단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기사가 불안한 기색을 감추며 묻자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저 어린 병사들이 눈에 보여서.”
“아, 그러시군요. 얼마 전에 신병들이 왔습니다. 이제 적응하는 단계니, 부족하게 보이실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