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1
기사의 눈동자에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그것을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성전기사단이 가면 병사들을 죽어라 굴려야겠다는 생각이겠지.’ 아이반은 불쌍한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얼른 덧붙였다.
“부족하다니, 그렇지 않소. 군기가 들어 잔뜩 날이 서 있소. 모두가 훌륭한 기사가 있는 덕분이겠지.”
그 말에 기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자신을 칭찬하는 말인데 불편할 리가 있나.
“하하, 아닙니다. 안쪽으로 드시죠. 부족하지만 환영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소. 다들 악마와 싸울 생각에 날카로워져서 만찬을 즐길 여유가 없으니. 악마의 목을 베고 돌아오는 길에 대접을 받겠소.”
“역시 쿤다라 교단의 성전기사단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반은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나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요새의 지휘관은 방을 내주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자그마한 요새라 남은 방이 없어서 원래 머물던 이를 밀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대신 연병장 한쪽을 빌려서 천막을 쳤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물건들을 꺼내는 것을 본 기사와 병사들이 역시 높으신 분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억지로 모른척했다. 지금에 와서 그냥 용병입니다, 하고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최근 숲이 묘하게 시끄럽다고 합니다. 숲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와 자잘한 습격이 계속 이어진다는군요.”
“그게 특별한 거요?”
“글쎄요. 성전기사단이 왔으니 그냥 하는 말이겠죠. 뭐라도 악마의 기운을 느꼈다면서 대답하려고. 하지만 그중에서 꽤 건질만 한 것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들 이상하게 악몽을 자주 꾼다는군요.”
델피노가 심각하게 말했으나 다른 이들은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병들이 새로 들어왔다지 않소? 악몽을 꾸는 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이반도 입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악몽을 많이 꿨었다. 눈을 뜨고 나면 현실이 악몽보다 더하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해졌고. ‘김 상병, 이 개자식!’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추억에 감탄사를 터트린 아이반이 표정을 굳혔다. 델피노가 한층 심각해진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병만이 아니라 베테랑 병사들까지 그렇다는군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악몽은 가장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악마의 징표입니다. 세 명 중 한 명꼴로 매일 악몽을 꾸고 있다면 의심해볼 만하죠.”
“그러면 거의 근처에 도착했다?”
“그렇습니다. 저 숲속에 녀석들의 은신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군. 내일부터 힘든 싸움이 되겠어.”
그리고 그날 밤, 모두가 잠든 깊은 시간. 불침번들만 눈을 뜨고 서 있는데 하늘 위로 음습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도, 기사들도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악마의 기운에 민감한 성직자들과 일행들은 단번에 잠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사악한 힘이 주변에 가득 퍼지고 음습하고 축축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기저기를 밝히고 있던 횃불들이 동시에 빛을 잃었다. 위에에엥- 끼이이악- 고요하던 요새에 갑자기 거친 바람이 불고 귀곡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들이 소리쳤다.
“불을 밝혀라! 횃불들을 다시 켜!”
델피노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빛의 신 아룬을 불렀다. “찬란하신 빛의 주여, 당신의 자비를 이곳에 내려주소서!”델피노의 머리 위에 새하얀 빛의 구슬이 떠올랐다.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원래는 그랬어야 했다. 치이익! 빛의 구슬이 뿜어내는 빛이 멀리 뻗지 못했다. 안개같이 어두운 기운에 막혀서 주위만 겨우 밝혔다. 신성력을 막아설 정도로 진한 악마의 기운. 아이반은 본능적으로 도끼를 집어 던졌다. 휘리릭!
도끼가 일순간 어둠을 찢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괴물 하나가 그것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쿵! 시뻘건 눈을 한 거대박쥐. 아이반은 녀석의 몸을 발로 누르면서 도끼를 회수했다. 그리고 사납게 물었다.
“네 녀석은 누구냐?”
거대박쥐, 전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의 입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흘흘흘, 아스가르드의 전사. 네가 언제까지 우리의 일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나?”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영원히.”
“건방진 놈. 어디 날뛰어 보아라. 그래 봐야 하찮은 인간······.”
파각! 아이반은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물음에 대답은 하지 않고 헛소리만 늘어놓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박쥐 괴물은 녀석의 사역마에 불과했다. 계속 붙잡고 있어 봐야 시간 낭비겠지. 착! 어느새 완전 무장한 상태로 대열을 갖춘 성기사들이 일제히 신성력을 피워 올렸다. 그들이 한 몸처럼 내뿜은 신성력이 서로 증폭되며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단순히 자신들이 내뿜는 신성력 때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력이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모두 축복을!”
치이익! 델피노가 생명의 구슬을 손에 쥐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삿된 것을 쫓고 주변을 정화하는 신성결계를 펼쳤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의 몸속을 파고들던 악마의 기운이 신성결계에 막혀 타들어 갔다.
“으으윽!”
악마의 기운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정화되어 사라지는 그 짧은 시간에도 최대한 저항해 병사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쓰러졌다.
“우어어어!”
결계 밖에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미처 악마의 기운을 몰아내지 못했더니 눈이 뒤집어져서 마구잡이로 주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성기사들은 차마 그들을 베지 못하고 땅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신성력을 내뿜어 그들의 몸에서 악마의 기운을 몰아냈다. 악마의 기운에 취해 날뛰던 병사들은 빠르게 제압되었으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믿고 있던 동료에게 갑자기 습격을 당했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들은 상처를 입은 이들마저 치료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직 적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는데 신성력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소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은 일격. 지금은 요새를 지키는 병력이 많다는 것이 전혀 장점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수가 아무리 많아도 악마의 기운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날뛰는 아군을 진정시키는 데 더욱 많은 힘이 들어갔다.
“영리해. 그리고 치밀하고. 무엇이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의 힘을 깎아내고 있어. 요새로 들어온 것은 아무래도 실수인지도 모르겠어.”
스읍, 후- 이레인은 연초를 태우면서 중얼거렸다.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도 이런 수작을 벌이다니 상당히 신중한 성격인 모양이야.”
요정의 숲에서 재배된 찻잎을 섞은 연초의 연기는 사이한 기운을 정화하는 효능이 있어서 그녀의 주위로는 악마의 기운이 다가오지 못했다. 우웅- 그녀의 주변으로 정령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자연의 화신인 정령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어떤 면에서 신성력과 비슷해 악마의 힘을 막아내는 것이 조금 더 수월했다. – 꺄하하하! 정령들이 마치 아이처럼 웃는 소리가 정신파의 형태로 사방으로 번졌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악마의 기운에 홀려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요새의 소란을 진정시키는 와중에 아이반은 문득 요새 바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악마라면 그저 이렇게 마무리하지는 않을 터였다.
요새를 한 번 뒤집어놓았으면 그 틈을 이용해 공격해야지. 그래야 지금의 혼란이 더욱더 치명적이니까. 타다닥! 아이반은 단번에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마기에 취해서 덤벼드는 병사를 후려쳐 기절시키고는 후긴과 무닌, 두 마리 까마귀를 소환해 바깥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리쳤다.
“몬스터! 숲에서부터 몬스터들이 오고 있소!”
요새 내부의 혼란은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처참했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았고, 악마의 기운에 당해서 정신을 잃은 이들 역시 많았다.
현재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전체의 삼 분의 일 정도. 성직자들 역시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사망자와 부상자 이상의 타격을 받은 셈이다. 희미한 달빛 아래 숲속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몬스터들이움직이면서 화들짝 놀란 동물들이 급히 몸을 피하는 모습이다.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와 아이반의 옆에 선 사나운 이빨이 숲을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적어도 천, 어쩌면 그 두 배가 넘는다.”
요새를 향해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숫자.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소. 하룻밤 쉬고자 이곳으로 왔는데 그만큼의 여유도 없이 싸움이 시작되는군.”
그러면서 그는 요새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은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그는 왜 갑자기 병사들이 미쳐서 날뛰는지도 잘 모르니까.
“지금 남은 병력으로 몬스터의 습격을 막을 수 있겠소?”
아이반이 묻자 요새 지휘관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말했다.
“···어렵습니다. 몬스터가 이천이라니, 그 정도면 평소의 요새 병력으로도 막기가 어려울 텐데 지금은 멀쩡히 움직이는 병사도 몇 없습니다.”
성벽을 지키고 있을 병사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단순히 싸우는 것도 힘든데 쓰러진 병사들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일단 성벽이 뚫리고 나면 대학살을 막기는 어렵겠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떨어뜨리려고 칼을 휘둘렀다.
쿵! 쿵! 칼날뿔 거대멧돼지가 성문을 들이박았다. 나무로 된 성문이 흔들거리고 조금씩 부서져 나간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의 사마귀가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성벽 위로 올라온다. 겁에 질린 병사가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거대 사마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파각! 도끼를 던져 사마귀를 처리한 아이반이 주변을 살펴보다 말했다.
“녀석들이 더 이상 성벽을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어야겠군. 어떻게든지.”
스윽 아이반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들고 옆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이빨, 미친 짓을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소?”
그 말에 사나운 이빨이 껄껄 웃었다.
“예전에 그대가 말했다. 살라면 살고, 뒈지라면 뒈지라고. 자,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몰려오는 놈들을 모두 때려잡고 살아 돌아오는 것. 가능하겠소?”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검을 강하게 쥐었다.
“가능하냐고 묻지 말고, 가능하게 만들라고 명령하라. 검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따라오시오. 내 등은 당신에게 맡기겠소.”
숲을 벗어나 까맣게 몰려오는 몬스터의 무리. 악마의 기운에 잠식되어 눈이 뒤집어진, 그래서 흉포함만이 남은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확인한 아이반이 성벽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 힘을 그대로 실어 창을 집어던졌다.
쉬이익! 폭풍의 힘을 그대로 머금은 창이 날아갔다. 칼날뿔 거대멧돼지의 육신을 찢고 어둠골 거대사마귀의 머리를 부순 후 핏빛 갈기늑대의 몸을 육편으로 만들고 바닥에 박혔다.
손을 앞으로 뻗는 것으로 공간을 뛰어넘어 창을 회수한 아이반이 옛 노르드의 언어를 읊조렸다.
“게이롤니르(Geir?lnir).”
창을 든 돌격자. 아이반이 내뱉은 말은 그대로 주문이 되어 그의 몸에 깃들었다. 그가 창을 들고 돌격하는 한 그의 모든 행동에 축복이 머물러 강화될 것이다.
치지직! 쾅!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파란 번개를 뿜으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천둥걸음과 폭풍의 창, 그야말로 인세에 나타난 자연의 분노였다.
카아악! 거친 소리를 내뱉으며 몬스터가 달라붙었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사마귀가 날카로운 앞다리를 휘두른다.
웬만한 검보다 길고 날카로웠지만 아이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등을 걱정하지 않았다.
캉! 성벽에서 뛰어내린 사나운 이빨이 어느새 아이반의 등 뒤에 붙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덩치만큼 커다란 칼을 휘둘러 어둠골 거대사마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러고도 꿈틀거리는 녀석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가 발로 차서 뽑았다.
튼튼한 꼬리를 휘둘러 늑대의 머리를 부수고 검으로는 멧돼지의 심장을 찔렀다. 몬스터들의 핏물로 몸을 적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동안 아이반은 화염발톱곰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이반의 창이 시뻘건 불꽃을 휘감고 있는 녀석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핏물이 뿜어져 나오다 그대로 얼음이 되어 깨져나갔다.
“얼어붙어라!”
아이반의 창에서부터 냉기가 쏟아진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이 산 채로 얼어붙어 얼음조각상이 되었다. 그것을 사나운 이빨이 조각내면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