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2
“이곳에 내가 있다!”
쿵! 사나운 이빨이 거칠게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거렸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마력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악마의 기운에 홀려서 광기가 가득하던 몬스터들이 움찔 뒤로 물러날 정도로 박력이 넘쳤다. 쉬이익! 성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정령의 힘을 잔뜩 담은 화살들이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을 꿰뚫고 터져나갔다. 땅이 뒤집어지고 불꽃이 타올랐다.
날카로운 바람이 몬스터들의 질긴 가죽을 파고들었다. 아이반이 힐끔 성벽을 보았다.
이레인이 가장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아내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었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몬스터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반과 사나운 이빨이 성벽 밖에서 날뛰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피해 움직인 몬스터들이 어느새 성벽을 넘기 직전이었다.
“신성한 불꽃으로 정화하라!”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열심히 성벽을 뛰어다니며 몰려오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다.
성문 역시 반쯤 부서져서 몬스터가 들어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때 아이반은 우연히 낮에 보았던, 얼굴이 앳된 병사를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성벽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기묘한 자세로 누워 하늘을 보는 중이었다.
“······.”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무척이나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신을 불렀다.
“토르, 이 전장을 당신에게 바치겠소.”
담담함 속에 격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사의 마음을 읽은 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와 전투, 적의 죽음을 원하는 투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르릉, 쿵! 어두운 하늘에 비구름이 모여들고 천둥이 울려 퍼졌다. 번개가 번쩍이고 하늘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반이 하늘로 손을 뻗었다. 천둥신이 응답하여 자신의 망치를 건네주었다.
쾅!
위로 뻗은 손에 천둥신의 망치가 잡혔다. 수십, 수백의 번개가 압축된 듯한 힘이 느껴지는 파괴의 상징이 나타났다.
자연의 분노. 그렇게 표현해도 좋을 막대한 힘을 손에 든 아이반은 이를 꽉 깨물었다. 으드득! 무겁다.
너무나 무겁다. 그야말로 산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필멸자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감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수없이 많은 거인의 골통을 깨부순, 말 그대로 하나의 신화를 대표할만한 무기였다.
필멸자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망치의 손잡이를 쥐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 쥐고 있으면 자신의 몸까지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그 고통 속에서 아이반이 움직였다. 그의 팔뚝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힘줄이 솟았다.
천둥신에게는 가볍고 가벼운, 그러나 필멸자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무거운 망치를 내려찍었다. 하늘을 들어 올리듯, 바다를 밀어내듯. 하나의 신화를 대표하는 파괴의 상징이 이곳에 등장했다.
세계의 적을 부수던 힘이 나타났다. 묠니르(Mjollnir), 뜻은 박살 내는 것. 쾅! 아이반 주변 땅이 내려앉는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이 막대한 힘에 짓눌려 터져나갔다. 그리고 망치의 소리를 따라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모든 곳에서 천둥신의 존재가 느껴진다.
그의 무거운 시선이 영혼조차 붙잡았다. 수백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고 다른 녀석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천둥신의 분노를 보고 악마의 마력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렸다. 감히 대항할 수가 없다.
어찌 신에게 덤벼들겠나. 이성이 없고 본능이 강한 몬스터들이었기에 더욱더 공포에 질렸다. – 키에에엑! 아직도 살아남은 몬스터들이 많았으나 이제 그들은 투지를 잃었다.
악마의 마력이 그들에게 속삭이는 것마저 무시하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다다닥! 공포에 질린 몬스터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지 못한 녀석들은 벽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만큼 초월자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위대한 천상의 신이 이곳을 훑고 지나갔음을, 잠시나마 그 위엄을 보였음을 알았다.
그것이 하나의 인간이 홀로 이루어낸 업적이라는 것에 그저 감탄만 토해냈다. 특히나 성직자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비록 모시는 신은 달랐을지언정 조금 전의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게 신의 힘이었다.
위대하고 위대한, 그래서 언제나 경이로운 초월자의 권능. 그들은 새삼스럽게 차오르는 신앙심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바닥까지 내려가던 신성력이 새롭게 솟아나 사방으로 퍼졌다.
상처 입은 병사들이 치료되고 지쳐있던 몸에 활력이 솟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싸워 이겼음을, 악몽과도 같은 밤을 보내고 다시 아침을 맞이했음을. 전투가 끝났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흩어지고 저 멀리 어렴풋이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무리했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벌겋게 익어버린 오른손을 치료받고 있는 아이반에게 이레인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살아남은 기사와 병사들은 간밤에 자신들이 보았던 기적에 대해 떠드느라 시끄러웠지만, 그녀는 이성적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아이반에게 쓸데없는 희생이었음을 지적했다.
“요새를 지키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어. 약간의 희생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이길 수 있었지.”
“그랬겠지.”
“알면서 왜 그랬어? 당신이 그 모양이 되면 오히려 힘들어지는데. 병사 몇 명이 죽고 사는 것보다 당신의 힘을 아끼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어.”
묠니르를 쥐고 있었던 오른쪽 팔은 조금만 더했다면 완전히 타버렸을 거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신성의 그릇 역시 조금 전의 일로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여러모로 이득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아이반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소. 사실 병사를 위해 희생하겠다, 그런 생각은 별로 없었지. 그냥 짜증이 나서 한 번 질러보았소. 다 때려죽이고 뒤집어엎고 싶었을 뿐이오.”
그 말에 이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네. 때로 그럴 수도 있지.”
스읍, 후- 연초를 내뱉으면서 하는 말이 뭔가 묘했지만 아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팔이 거의 다 회복되었다. 델피노가 아낌없이 마력을 쏟아부은 덕분이다. 생명의 구슬은 이런 육체적인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아주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 그걸 활용하니 익어버린 팔이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오늘 숲으로 출발하는 것은 어렵겠군요. 치료해야 할 부상자가 많습니다. 하룻밤 휴식을 해서 컨디션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 역시 엉망이 되었고요.”
델피노의 말을 들은 아이반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적의 힘은 막강했다. 이렇게 지친 상태로 숲으로 들어가 봐야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어렵군.”
적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효율적인 전략이었다. 마기를 풀어 몬스터들을 밀어 넣는 것으로 아군의 전력을 대폭 깎아먹고 발을 묶었으니까. 결국 저들의 목적이 안정적으로 의식을 진행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완벽하게 적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아이반이 고민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기사 하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병사들을 치료할 사제 일부를 이곳에 남기고 나머지는 숲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적과 싸워 비참하게 죽어간 동료들을 잊지 않았다. 그 시체마저 능욕하고 있을 적들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성기사들의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있었다. 아이반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들이 아이반을 존중하여 그의 의견을 많이 따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부하가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지금 악마숭배자들을 가장 증오하고 있는 것은 쿤다라 교단이었고, 추격에 가장 열의를 보이는 것도 이들이었다. 아이반으로서는 이들을 막아설 명분이 없었다.
“적은 아주 강력하오. 수십이나 되는 사제와 성기사가 제대로 반항하지도 못하고 당할 만큼. 우리는 그보다 수도 적고 지쳐있으니 이대로 숲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길이 될 것이오.”
아이반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성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우리가 머물러 있으면 결국 더 큰 위험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우리의 형제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되찾을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있든, 죽어있든.”
델피노 역시 고민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이 맞습니다. 의식을 막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대악마에 가까운 악마의 소환, 데몬 게이트의 개방, 차원방벽의 붕괴. 어느 쪽이든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추가 병력은 언제쯤 도착하오? 마음은 알겠으나 숲에서 고립된다면 적들에게 신선한 제물을 늘려주는 것밖에 되지 않소.”
그 말에 요새 지휘관은 이틀이 걸린다고 답했다. 새롭게 군대가 꾸려져서 이곳에 배치되려면, 숲으로 들어갈 실력자들이 모이려면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 역시 이틀을 말했다. 적이 갈라졌을 때 수가 많은 쪽을 추적하기 시작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이 되돌아오는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이틀, 너무 길어. 그 정도면 우리가 세 번은 전멸하고도 남을 시간이오. 의지와 능력은 별개로 생각해야지.”
아이반의 부정적인 태도에 성기사들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우리들만이라도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당신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죠. 여기까지 힘을 보태준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들을 보면서 아이반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대로 보내야만 하나. 이들만 사지로 떠나보내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때 오래간만에 그의 머릿속을 때리는 알림이 들렸다. 그리고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 그의 선택을 재촉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숲으로 들어가라. 그리하여 악마의 화신을 때려잡고 악마가 소환되는 것을 막아라.
팔짱을 낀 채로 찬찬히 살펴보던 아이반은 문득 보상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피의 검 브리카의 각성, 그것이 대가로 나타나 있었다.
우웅-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몸속에서 꺼내 쥐었다. 이 녀석이 각성을 한다니,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이잉- 브리카를 이마에 가져다 대니 떨림이 느껴졌다. 어깨에 기대놓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 그 떨림에 공명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왜 떨리는 걸까. 자신이 당장이라도 숲으로 향하는 것을 원하는 것일까. 그때 천상에서 아래를 지켜보고 있던 외눈의 마신이 허리를 숙였다. 방랑자의 신이 길을 알려주려 손을 내밀었다.
하찮고 하찮은 자야, 어리석은 나의 전사야. 너는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의 힘을 빌릴 생각은 하지 않는구나. 그런 환청이 들렸다. 그리고 아이반은 어느새 자신이 높고 높은 곳, 영광스럽고 위대한 장소에 있음을 깨달았다. 창대로 된 대들보에 황금 방패로 된 천장이 스쳐 지나간다.
순은으로 된 지붕 밑에 지고한 자리가 있었다. 흘리드스캴프(Hliðskjalf), 오딘의 옥좌. 그 지고한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세상 만물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오딘은 그중에서도 어느 곳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성벽, 부서진 성문. 이리저리 널린 피와 시체, 전투의 흔적. 그런 요새 너머에 펼쳐진 숲속. 그 안에 잠든 오래된 유적.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 위대한 초월자의 시야로 그곳을 내려다보았다. 신의 감각으로 굽어살폈다.
오래된 유적의 가장 깊은 곳,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악마의 화신이 되기를 자처한,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거죽을 벗고 시체로 살아가는 사악하고 사악한 자가 보였다. 필멸자로서는 대단한, 불멸자에게는 하찮은 경지에 도달한 악마의 화신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위대한 신의 시선을 느끼고 결계를 펼쳤다. 오딘은 손을 뻗어 그것을 걷어내려 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오딘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진짜 오딘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찮은 전사야, 이제 지상으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