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3
“으헉!”
아이반이 문득 고개를 숙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간 초월적인 일을 파악하기란 어려웠다.
“아이반! 왜 그러십니까?”
아이반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 역시 몹시 혼란스러웠다. ‘방금 그건 뭐였지? 마치 내가 신이 된 것 같은······.’ 아이반은 온몸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스스로 오딘이 되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좋지 않다. 괜찮나?”
사나운 이빨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자 아이반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괜찮소. 아직까지는.”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표정을 숨긴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오딘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았을 때 확인했던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그는 여전히 떨고 있는 피의 검 브리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단심문관, 피에르 로렝이 살아 있소.”
위대한 초월자의 시선이 어둠으로 물든 땅을 훑었다. 그 사악하고 사악한 장소에서 그의 미약한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피의 검 브리카가 옛 주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떨고 있었다. 불의 신 쿤다라가 자신의 신도를 바라보며 분노를 터트렸다.
“녀석들이 의식을 준비하고 있소. 질 좋은 제물을 구해서 단숨에 해치우려는 모양이지.”
악마의 기운에 잠식되어 타락한 성물, 붉은 잔과 그것을 사용했던 피의 성자 알베르홈의 후손. 악마에게는 무척이나 탐스러운 제물이었다. 수백, 수천의 제물을 대신할 만하겠지. 의아한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아이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소.”
그러자 조금 전까지 자기들끼리라도 들어가겠다고 소리치던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오히려 그를 말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한 일입니다. 저희는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신들은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위험을 좋아하지는 않소.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무턱대고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금도 반대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으니 판단도 달라져야지. 원군이 있소.”
그 말에 다른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성황청의 지원 병력, 서부 연합 왕국의 군대가 도착하려면 앞으로 며칠이나 있어야 했다. 그들 말고 당장 도움받을 병력이 있단 말인가.
“적들이 있는 숲속을 뚫고 들어가려면 보통 전력으로는 안 됩니다. 그만한 원군이 있다고요?”
“있소. 악마가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은 인간의 왕국과 성황청만이 아니니까.”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이레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이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남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만큼 나약하지는 않으니까.”
아이반의 일행이 이곳에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엘프의 의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엘프는 숲을 떠나서 행동하기 어려우니 그것을 보충한다는 의미로. 그러나 자칫하면 요정의 숲이 흔들거릴 수도 있는 위기인데 숲을 떠나 인간 세상을 돌아다니는 몇몇 고행자와 이종족에게 모두 맡기고 설마 그들이 그저 구경만 하고 있겠나. 상황이 심각해지면 언제든지 나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게 지금이었다.
“벌써 근처에 도착했어. 나의 형제자매들이.”
이레인이 반가운 듯, 슬픈 듯 아주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이나 심란해 보였다. 세계수라는 것은 엘프들의 집단의식이 모여서 만들어진 네트워크였다. 숲을 떠난다고 해도 일정 수 이상이 모이면 일시적이나마 작은 규모의 세계수가 탄생하는 셈이다. 엘프의 군대, 요정군단이 가까이 다가오니 그녀 역시 자극을 받고 있었다. 조그마한 세계수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아쉽네.”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백 년 이상을 떠나 있던 세계수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억지로 무시하며 정신을 닫았다. 아직 그녀는 인간 세상에 남아 할 일이 많았다. 고행자의 임무가 모두 끝나지 않은 이상 아직은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행자는 고독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었다. 척! 척! 마치 하나와 같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원래 엘프의 몸놀림은 극도로 부드러워서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듯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정령계의 금속을 두드려 만든 황금색 갑옷을 입고, 오래된 신목(神木)의 나뭇잎을 실처럼 뽑아 만든 초록색 망토를 두른 엘프의 군대. 수백 년 만에 요정의 숲을 떠나 물질계에 나타난 요정군단의 모습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병사들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이 소리치며 군기를 바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라! 인간의 군대를 한심하게 여기도록 할 셈이냐!”
하지만 병사들은 물론 그렇게 소리치는 기사들마저도 눈빛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만큼 요정군단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외형을 지닌 엘프들이 군대를 이뤄 진격하는 모습이라니. 몇몇 병사들은 자신들이 신화나 전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볼을 꼬집어보고는 했다.
“뭐, 왜? 눈깔 안 돌려?”
병사 일부는 힐끔거리며 이레인과 요정군단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같은 엘프였으나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초를 뻐끔뻐끔 피워대며 과감한 패션을 하는 그녀는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엘프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옛이야기 속의 엘프들은 모두가 고귀하고 신비로운 요정이었으니까. 스읍, 후- 병사들에게 짜증스럽게 소리친 이레인은 곰방대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짙은 연기에 복잡한 감정을 모두 실어 토해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이반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무척이나 엘프다운 것이었다. 전혀 다른 방향이긴 했지만. 착! 가까이 다가온 요정군단은 정말 하나같은 움직임으로 멈춰 섰다. 그리고 선두에 서 있던 엘프 하나가 앞으로 나서 인사를 했다.
“고행자여, 그대에게 영광을.”
그는 먼저 이레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스로 숲을 떠나서 임무를 수행 중인 고행자는 엘프라면 누구나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숲을 떠난 수호자가 무사히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낯선 땅, 위험한 임무, 세계수와 떨어졌다는 극심한 스트레스. 아주 영광스러운 임무였으나 그만큼 괴롭고 힘들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자처하였으니 존경을 표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을. 오랜만이네.”
“그렇습니다, 이레인. 그동안 많이 달라지셨군요.”
“숲 밖은 생각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더라고. 어쩌다 보니.”
“당신이 다시 우리가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에 이레인이 피식 웃었다.
“그래. 임무가 끝나면, 언젠가는.”
그리고 그녀는 멀찍이 뒤로 물러났다. 계속해서 세계수가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괴로운 일이라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그런 이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프가 고개를 돌렸다. 언뜻 스치던 안타까움은 빠르게 사라졌다. 자신을 필레인 그레이우드, 이곳에 파견된 요정군단의 지휘관이라고 소개한 엘프가 물었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아이반. 현재 상황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적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타락한 성물과 고위 성직자가 악마의 화신 손에 있소. 의식은 곧 시작되고 숲은 녀석들의 영역이 되었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악마가 차원문을 찢고 이 땅에 나타날 거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으나 필레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 사건이 아니라면 요정군단이 움직일 리가 없었다. 모두 상정 이내의 일이었다. 그는 흘깃 숲을 바라보다 말했다.
“영맥이 흔들리고 숲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지력을 끌어와 데몬 게이트를 만들 생각이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요정군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숲에 들어가고자 했다. 인간의 군대나 성황청의 성직자 따위는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힘으로 모두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도 함께하겠소.”
아이반이 그렇게 말하자 필레인이 되물었다.
“불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는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감정적인 영역은 극히 미약한 것이 엘프였으니까. 그저 진심으로 물어보는 것이었다. 쓸모없는 일인데 왜 따라오려 하냐고. 아이반은 그의 물음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필레인 그레이우드, 그 이름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오래된 옛 요정의 혈통을 잇고 있는 엘프의 영웅이었다. 세계수가 불타고 요정의 숲이 무너지는 위기 속에서 더욱 활약할 남자. 말하자면 네임드, 그것도 아이반이 쓰러뜨렸던 발크룬이나 스라칸 같은 녀석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앞으로 열두 명의 대주술사 중 하나가 될 자연의 구도자 테잔 쯤은 되어야 급이 비슷하겠지. 아직은 좀 이른 시기니 필레인 그레이우드 역시 고대 요정의 신기를 얻은 상태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남자는 전혀 아니었다.
“내가 그것을 원하오.”
한때나마 같이 움직였던 동료를 구하기 위해, 피의 검 브리카가 그곳으로 이끌어서, 그게 경험치를 많이 얻으니까. 그런 자잘한 이유를 읊는 대신 아이반은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필레인은 그의 의지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이반은 특이점이었다. 확정된 미래를 조금이나마 바꾸기 위해서 웬만하면 그의 요청을 들어주라는 세계수의 전언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그러면서 필레인은 품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그대는 우리의 요청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아직 사건이 마무리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그대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아이반이 상자를 받아 딸칵 열자 주변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성직자들은 아이반이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순수한 의미의 성물이었고, 신의 권능이었으니까. 날카로운 본능으로 꼬리를 빳빳이 세운 사나운 이빨이 떠듬떠듬 물었다.
“그, 그게 무엇인가?”
아이반은 상자 속의 구슬을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신성의 조각. 순수하게 세탁된 초월자의 파편.”
다른 신격과 달리 세계수는 그 존재가 엘프의 집합의식과 신앙이 힘을 얻어 탄생한 존재였다. 따라서 그 신성의 파편 역시 모든 엘프에게 잘게 나뉘어 있었고. 그러니 신성의 조각을 모으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적은 양이나마 초월자의 일부인데 이렇게 넘겨주다니. 아이반이 기대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보상이었다. 기껏해야 세계수의 열매나 희석된 엘릭서나 기대했는데 신성의 조각이라, 세계수의 기대가 꽤 큰 모양이다. 다가오는 파멸을 조금이나마 뒤틀 수가 있는 특이점의 존재. 그러니 과감하게 투자하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그대의 동료들은 따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니 알아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필레인이 그렇게 말했으나 아이반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예상보다 귀한 선물이었기에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신성의 조각이면 효과는 확실하겠지만 그냥 이대로 삼켜도 괜찮을까?’ 초월자의 일부를 흡수하는 셈이었다. 깨끗이 세탁되어 있다지만 혹시나 일부의 사념이라도 남아있다면 오히려 몸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환상 속에서 자신을 오딘이라고 여겼던 경험이 그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러나 결국 아이반은 신성의 조각을 들어 올렸다.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더 큰 위험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세계수였다. 엘프가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들의 종족신. 인간의 몸을 빼앗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의심을 지운 아이반이 그대로 신성의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이것보다 명쾌한 방법도 없었다. 힘을 흡수한다. 먹는 것은 그것에 가장 최적화된 행동이었고, 이것 자체가 하나의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다. 꿀꺽. 새하얀 신성의 조각은 마치 유리처럼 보였지만 목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시원한 액체가 되어 넘어갔다. 그리고 이내 온몸에 퍼져서 뜨거운 불길이 되었다. 으드득! 아이반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마치 몸속에서 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무리 정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초월자의 일부, 신성의 조각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 강력한 힘이, 초월자의 존재가 아이반을 치료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졌던 신성의 그릇을 말끔하게 고쳤다. 오히려 이전보다 넓어진 신성의 그릇에 상쾌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치지직! 휘이잉! 화르륵! 아이반의 몸에서 다양한 신의 권능이 피어올랐다. 신성의 조각은 잘게 흩어져 신의 권능을 강화했다. 찌릿! 뇌를 찌르는 고통과 함께 눈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잃어버린 눈이 욱신거리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 입고 파괴되어서가 아니라, 회복되고 재생되어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스르륵 아이반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세상이 훤히 보였다.
숲은 겉으로는 고요했다. 그러나 그 속에 섞여 있는 음습한 마력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잔뜩 퍼져있었다.
“숲이 비실비실하네.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심각해.”
이레인이 낮게 중얼거렸다.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기 위해 스스로 정신을 닫은 그녀가 느낄 만큼 숲의 상태가 이상했다. 당연히 요정군단은 그것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던 모양이군요. 그동안 이렇게 될 때까지 눈치를 채지 못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요정군단의 지휘관,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내보이는 감정은 없었지만, 그의 태도에서 숲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불쾌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엘프가 숲을 불편해하다니, 그건 지금의 숲이 정상적인 상태를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답답하다. 이거 내가 알고 있는 숲이 아니야.”
사나운 이빨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그가 가진 전사의 본능이 계속해서 위험을 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마를 불러오기 쉽게 땅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마계와 비슷한 곳이 되겠죠. 안쪽은 더 심각할 겁니다.”
델피노, 그리고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그렇게 경고하며 기도를 올렸다. 신성력이 퍼지고 모두의 신경을 건드리던 악마의 마력이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아이반은 자신의 창을 휘둘렀다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휙! 가볍게 허공을 찌르고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한 걸음을 앞으로 나아갔다가 멈춰선다. 바로 눈앞에 있는 가상의 적을 노려보다가 다시 저 멀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반응이 조금 늦네.’ 눈을 잃었던 것이 아주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사이에도 아이반은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고, 그 때문에 묘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아무래도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그 약점을 가리기 위해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변했다. 공격해야 할 시점에서도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방어하고 거리를 벌렸다.
이제 다시 눈을 되찾았으니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걸 다시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하니 움찔거리며 조금씩 반응이 늦었다.
하루를 쉬면 사흘을 정진해야 한다더니 딱 그러했다. ‘가볍게나마 한 번쯤 싸우고 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이반은 연습보다는 실전으로 성장하는 타입이었다.
위험하지 않은 적을 상대로 적당히 몸을 풀면서 적응하면 다시 감을 찾을 것 같은데 좀처럼 기회가 없었다. 이곳은 원래 몬스터가 많은 곳이었고, 악마의 마력으로 더욱더 흉포하게 변한 상태였지만, 그렇게 이성이 마비된 녀석들조차 지금은 덤벼들지 않았다.
요정군단이 내뿜는 기세가 그만큼 강렬했다. 황금빛 갑옷과 초록색 망토. 정말로 신화나 전설 속에 들어온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엘프의 군대는 마계와 가까워지고 있는 숲속을 거침없이 뚫고 지나갔다.
이 정도면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악마의 화신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이반은 달랐다. 초월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야 한없이 하찮게 느껴졌지만 적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준비를 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아이반은 잘 알았다. 심지어 상대가 악마와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뭔가 온다.’ 근거는 없었지만 아이반은 그렇게 느꼈다.
신성의 조각을 흡수한 뒤로 더욱더 날카로워진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적이 움직인다.
곧 습격이 올 것이다. 우웅- 아이반의 마력이 움직였다.
단숨에 솟아오른 마력이 다시 찾은 오른쪽 눈에 모여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하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여주었다. 미약한 마력의 흐름, 그를 둘러싼 인과의 움직임. 아이반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외쳤다.
“전투 준비!”
팍! 땅이 뒤집히며 무언가 솟아올랐다. 꿈틀거리는 촉수, 셀 수없이 많은 이빨, 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산성의 점액. 그야말로 마계의 괴물이 갑자기 나타나 일행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