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4
쉬이익! 쾅! 족히 십 미터는 될법한 녀석의 촉수가 바닥을 때리자 흙이 사방으로 튀고 바위가 깨져나갔다. 나무가 부러지고 땅이 흔들렸다.
피우웅- 이레인이 훌쩍 뒤로 물러나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 화살을 날렸다. 그녀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고 온전히 녀석의 촉수를 꿰뚫었다.
압축된 바람이 녀석의 촉수를 터트렸다. 팡! 갈기갈기 찢겨 흩어지는 녀석의 촉수들. 그러나 이레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렇게 조각난 촉수들이 여전히 꿈틀거리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시 재생되려는 기미마저 보였다. 화르륵! 아이반이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뜨거운 화염이 뿜어져 나와 조각난 촉수들을 불태웠다.
그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로키의 불꽃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잿더미로 만들었다. 과연 잿더미에서도 재생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델피노와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뿜어냈다. 사악한 마물이 몸을 뒤틀고 반항했으나 이내 요정군단의 칼날에 토막이 났다.
불의 정령을 다루는 엘프의 손에 그 조각마저 타올랐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땅 위로 솟아난 것은 녀석의 일부였고, 본체는 여전히 땅속에 있었다.
새로운 촉수가 바닥을 뚫고 나타났다. 스걱! 촉수 하나를 잘라버리면서 사나운 이빨이 외쳤다.
“녀석을 밖으로 끄집어 내야 한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반대로 생각했다.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어렵다면 더 깊이 묻어주자. 그가 무릎을 굽혀 바닥에 손을 댔다. 그러자 커다란 흙 거인이 나타났다.
필레인과 계약한 땅의 정령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쿵! 땅이 내려앉았다.
땅속에 숨어있는 마물을 더욱 깊은 곳으로 밀어 넣고 주변의 땅이 압축되어 녀석을 짓눌렀다. 울컥! 바닥에서 초록색 체액이 뿜어졌다.
녀석이 강한 압력을 못 이기고 몸이 터져버린 것이다. 촉수와 달리 녀석의 본체는 재생할 수가 없는지 그대로 죽어버린 듯했다.
까다로운 녀석이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해서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그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녀석은 숨어있던 것이 아니었소. 갑자기 나타난 거지.”
아이반이 말하자 필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녀석은 방금 전에 소환된 것입니다.”
아주 은밀하고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일행 대다수가 눈치도 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이 숲이 완전히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마계의 마물을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푸드득! 아이반의 그림자에서 두 마리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를 뚫고 올라가 하늘에서 저 멀리 녀석들이 숨은 오래된 유적지를 바라보았다.
“아직 거리가 꽤 있는데 벌써 이 모양이군. 이 넓은 곳이 모두 녀석의 영역이라니.”
단단히 준비가 된 마법사는, 그것도 자신의 영역이라면 평소의 열 배는 더 강해졌다.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 계속해서 공격이 이어지겠지. 아이반은 힐끔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역시 모두 제 컨디션은 아닌데······.’ 처음 추적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룻밤 쉬려고 했던 요새에서도 결국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몬스터들과 싸워야만 했고. 그런 상태로 바로 숲에 들어왔으니 상태가 좋을 수가 없었다. 원체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고 정신력이 강하다 보니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지친 것은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번쯤 쉬어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적의 영역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체력을 아끼시오.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잖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불의 주, 쿤다라의 횃불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아직은 멀쩡하다는 뜻이었고, 최악의 상황에도 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아이반이 원했던 대답과는 좀 달랐지만 그들의 의지가 단단하니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래도 요정군단이 쌩쌩하니 괜찮겠지.’ 그동안 척후를 맡은 엘프들을 통해 앞쪽의 소식이 들어왔다. 세계수로 연결된 엘프의 의사전달은 무척이나 빨라서 척후병이 보는 것을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점점 마력이 진해지고 있습니다. 악마의 마력이 숲을 뒤흔들고 공간을 왜곡하고 있군요.”
“피해갈 수는 있겠소?”
“어렵습니다. 안쪽은 결계가 있어서 어디로 가든 같을 것입니······.”
말을 전해주던 엘프가 입을 다물었다. 일순간 요정군단의 움직임이 변했다. 서로 이어져 있는 그들은 따로 명령을 전달할 필요 없이 동시에 반응할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사나운 이빨이 묻자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대답했다.
“우리는 전투 중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정신이 이어져 있는 엘프는 나, 너, 우리가 모두 우리로 표현되는 독특한 언어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언뜻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곧 결계 안쪽의 척후가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적은 무엇이오?”
아이반이 달리면서 묻자 어느 엘프 하나가 대답했다.
“소악마! 언데드!”
소악마라면 레서 데몬.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엄연히 마계에서 사는 악마종을 의미했다. 악마는 하나같이 음습하고 잔인해서 아무렇지 않게 사람의 약점을 후벼 파고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가했다.
힘이 약해서 소악마로 분류되었을 뿐 그 사악함은 똑같았으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타다닥! 제일 먼저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결계로 뛰어들었다.
그 후로 몇몇 엘프들 역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다음부터는 엘프들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감정의 폭이 크지 않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엘프들에게는 드문 일. 아이반은 결계 안쪽으로 뛰어들려다 말고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공간 왜곡이 생각보다 큽니다. 지금 뒤따라간다고 해도 같은 장소에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거리가 벌어졌다. 그건 엘프들을 서로 연결하던 세계수 네트워크의 연결 역시 끊어졌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두두두! 그때 결계가 갑자기 확장되었다. 아이반은 무심코 뒤로 몸을 빼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혼자 빠져나가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 곁에 있는 동료를 확인하시오! 절대 떨어져서는 안······.”
아이반이 외치는 소리가 커다란 소음에 잡아먹혔다.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움직인다. 있었던 길이 사라지고 없었던 길이 생겨났다. 어느새 결계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일행들을 사방으로 찢어놓고 있었다. 아이반이 얼른 주변을 바라보았으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겨우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망할 놈들.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는다 이거지.”
아이반은 이를 갈았다. – 키키키키킥! 사방에서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어있던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공격이 시작되었다.
딱딱딱!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음이 울렸다. 인간의 뼈, 혹은 다른 종족과 몬스터의 뼈로 만들어진 언데드, 스켈레톤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 곁에는 완전히 살이 썩지 않은 좀비들이 있었다. 목이 없는 기사 듀라한이 있었으며, 이런저런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짜깁기되어 덩치를 키운 시체 골렘이 있었다.
– 샤아아악! 기묘한 소리를 내지르며 악령이 허공을 날아다닌다. 원혼이 내뿜는 한기에 주변 기온이 내려갔다.
죽음의 기운에 풀이 얼어붙고 꽃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쾅! 아이반은 창을 휘둘러 가까이 다가온 좀비 하나를 후려쳐 날렸다.
썩은 살점이 터져나가고 역겨운 냄새가 퍼졌다. 폭풍을 불러 그것마저 저 멀리 날려버렸다.
휘이잉! 그의 몸을 휘감아 도는 칼날 같은 바람이 시체를 토막 내고 뼈를 가루로 만들었다. 시선을 따라 피어난 불꽃이 악령을 불태웠다.
그때 또다시 소악마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키키키킥! 어딘가 장난스러운, 그러면서 사람을 열받게 만드는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따라 악마의 마력이 요동쳤다. 그리고 갑자기 숲에 깔린 어둠이 움직이며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쉬이익! 아이반이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그의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환상?’ 칼날이 스치고 지나갔음에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칼날은 실체가 없는 환상이었다. 아이반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봤음에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오른쪽이라니. 한 번 눈을 잃어봐서 그런지 이쪽으로 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니, 원래 그런 공격인가?’ 그저 시야를 가리거나 허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공격이었다.
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약점을 공격당했다고 인식하게 했다. 만약 아이반이 오른쪽 눈이 아니라 왼쪽 발목이 위험하다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쪽을 노리는 환상이 보였겠지. 당하는 사람이 무조건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음습하게 정신을 파고들어 빈틈을 찌르는 것이 실로 악마적인 수법이었다. 이런 정신 공격에 상당히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반조차 움찔하게 했으니 소악마라고 해도 악마는 악마였다.
과연 마계의 종자, 방심할 수는 없었다.
“빛이여!”
델피노가 크게 소리치자 어둠이 훌쩍 물러났다. 그의 머리 위에서 터져 나온 신성한 빛이 언데드를 정화하고 사악한 마력을 지웠다.
– 키에엑! 소악마가 불쾌하게 소리쳤다. 신성한 빛의 장막을 꿰뚫고 수작을 부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가지고 있는 능력은 악마다웠으나, 절대적인 힘의 크기가 작은 소악마의 한계였다. 화아악!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불을 피워 올렸다.
악마를 처단하고 사악한 것들을 불태우는 신성한 횃불이 나타나자 소악마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질렀다. – 카라큭, 샤악! 녀석들이 무어라 말을 내뱉었으나 그저 귀를 찌르는 소음으로만 들렸다.
웬만한 언어는 대강 다 알아듣는 아이반이지만 소악마가 하는 말까지 알지는 못했다. 피우웅- 이레인이 화살을 쏘았다.
어둠 속에 숨어 소리만 질러대는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단번에 몸을 꿰뚫었다. 정령의 힘으로 소악마의 몸을 짓눌러 터트렸다.
녀석들은 피와 살점을 남기지 않았다. 그대로 시커먼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물질계에 등장한 악마라는 것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본체는 마계에 내버려 두고 일부만 분신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끝난 건가?”
너무나 쉽게 사라진 모습에 사나운 이빨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그 마법의 단어를 들은 아이반이 문득 주변을 경계했으나 다시 소악마의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정말로 마계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시시한데.”
사나운 이빨은 언데드 몇을 베어버리기도 전에 상황이 종료되자 아쉬운 듯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그걸 바라보면서 델피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악한 자들과 싸우는데 최적화되어 있으니까요.”
구마사제와 성전기사단이 함께하고 있었다. 자잘한 언데드나 소악마 정도는 쉽게 처리하는 게 당연했다.
“녀석들이 습격한 것이 우리만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지. 이쪽이 별것 없다고 다른 쪽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어.”
이레인이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리면서 말했다.
“우리 모두를 압도할 만큼 적들이 강했다면 이렇게 잘게 찢어놓을 리가 없지.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뜻이야. 우리 쪽을 덮친 공격이 약한 만큼 다른 쪽은 더 치열하겠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숲속에 여기저기 떨어져서 싸우고 있을 그녀의 동족들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이레인은 다른 엘프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거리를 벌리고 있었으나 그건 스스로 숲을 떠나 고행을 선택한 수호자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동족을 위하는 마음이 강했다.
“요정군단과 떨어져 버렸군. 썩 좋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