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5
공간이 왜곡되고 일행이 찢어질 때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 모였다. 그래서 원래부터 그와 함께하던 델피노, 사나운 이빨, 이레인은 곁에 있었으나 요정군단과는 완전히 떨어지고 말았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도 다섯만 남아있었고.
“빨리 움직여서 다른 이들과 합류해야만 합니다.”
델피노가 그리 말했으나 이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워. 우리는 이미 상대의 영역에 들어왔다고. 녀석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모이도록 만들 리가 없지.”
아이반은 흘깃 숲을 바라보았다. 언뜻 고요하게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공간은 계속해서 뒤틀리고 있고 숲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방향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소. 중앙. 핵이 있는 곳만은 뒤틀 수가 없으니까.”
이곳에서 동료를 찾겠다고 돌아다녀 봐야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결계의 중심으로 가서 만나기를 빌어야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이대로 멈춰 있다가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으려면. 사실 위험한 것은 요정군단보다 자신들이었다. 안 그래도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잔뜩 지쳐있는 상태였다.
요정군단을 걱정하느니 자신들의 목숨을 챙기는 편이 옳았다.
“출발하지. 결계의 중심은 저쪽이오.”
아이반은 마법사와 레인저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길잡이 역할을 했다. 이리저리 꼬인 공간을 뚫고 결계의 중심, 오래된 유적지로 향했다.
가끔 언데드가 덤벼오기는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길이 순탄했다. ‘이쪽을 이렇게나 비워두다니, 다른 쪽 상황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헤어진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 요정군단이 크게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들을 막는 것에 온 힘을 쓰고 있다면 이쪽은 별것 아니라고 무시를 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함정이 있는 걸까? 불쾌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 침묵 속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착!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아이반이 문득 손을 들어 올리자 모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자세를 한껏 낮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어디가 문제인지 두리번거리는 델피노의 어깨를 두드린 사나운 이빨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잔뜩 지쳐서 거친 호흡을 내뱉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흡, 흐억! 하······.”
옆구리에는 큰 상처가 나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런 상태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리저리 부서지고 더럽혀진 갑옷을 입은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 그를 확인한 일행이 순간 움찔했다.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은 당장이라도 뛰어가려고 했으나 델피노가 그들을 붙잡았다.
그는 오히려 침착해진 눈동자로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다른 이들은?”
“없소.”
“시체나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소.”
그 말에 델피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군요.”
적이 아군을 미끼로 삼아 함정을 만드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평생을 악마 숭배자들과 싸워온 델피노는 그런 일에 익숙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지도 못할 사악하고 사악한 일들을 경험했다. 이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경계하며 가까이 다가가지 않자 숨을 헐떡이고 있던 성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일행은 모두 표정이 굳었다.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납치된 피에르 로렝과 함께 있던 성기사였기 때문이다.
“도, 도와···!”
잔뜩 쉰 목소리로 그가 외쳤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아이반이 창을 집어던졌다. 쉬이익! 푹!
“으억!”
아이반이 집어던진 창이 성기사의 가슴을 관통하고 나무에 꽂혔다. 그가 크게 신음하며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것을 본 아이반이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지랄 맞은 연기는 그만하지. 기분만 더러우니.”
그 말에 죽은 듯이 고개를 박고 있던 성기사의 목이 우드득 움직였다. 창백한 그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가 웃고 있었다.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나? 야만인이라 그런지 동료도 못 알아보는군, 노르드 전사.”
비웃는 듯한 그의 말에 아이반이 차갑게 받아쳤다.
“시체로 장난질을 치다니,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뭐?”
“전에 내 창에 스친 옆구리는 다 나았나?”
성기사의 거죽을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입을 다물자 델피노의 표정 역시 무섭게 굳었다. 아이반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만 왕국에서 놓쳤던 흑마법사가 분명했다.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해야만 하는 그자. 화르륵! 급속도로 생기를 잃고 썩어가는 성기사의 몸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성기사의 육신이 흉해지기 전에 아이반이 그 몸을 태워 없애주었다. 꽈아악! 델피노는 품에 지니고 있던 낡은 목걸이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아이반에게 물었다.
“알아냈습니까?”
아이반은 절대 쓸데없이 적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단번에 처리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면 그건 분명 이유가 있었다.
“그렇소.”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군요. 어딥니까?”
“저쪽. 녀석이 유적을 지키고 있소.”
아이반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자 델피노가 소매를 걷었다. 품에 지니고 있는 강한 신성력으로도 차마 지우지 못한 팔뚝의 상처들이 훤히 드러났다.
“그건······.”
아이반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을 꺼냈으나 델피노가 막았다.
“괜찮습니다. 생명의 구슬도 있으니.”
그의 눈은 차가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차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내하겠소.”
아이반이 앞으로 나서자 눈치를 보던 사나운 이빨이 옆을 맡았다. 분노를 삼킨 쿤다라 교단의 성기사들이 함께했다.
이레인이 나무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차라락! 델피노가 단검을 꺼내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자신의 피를 바치고 신성한 빛의 권능을 불러왔다. 화아악! 사라지던 해가 다시 떠올랐다.
밤이 다시 낮이 되었다. 그렇게 밝아진 시야로 오래된 성이 보였다. 그곳을 노려보며 델피노가 말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제가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화르륵! 신성한 빛이 사방을 밝히고 성스러운 불꽃이 타올랐다. 부정한 것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비교적 이쪽은 견제가 약한 탓에 녀석들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옛 유적지로 빠르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기까지. 오래된 성에 가까워질수록 악마의 마력이 진해졌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흑마법사의 시선이 선명해졌다.
탁! 누군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쥐고 있는 네크로맨서. 한 번 오딘이 앗아갔던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며 주변의 마력을 읽었다.
그 날카롭고 섬세한 감각으로 네크로맨서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본체로군. 하긴, 더는 몸을 숨길 곳도 없겠지.”
악마의 마력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려면 세밀한 마력 조종이 필수. 시체를 뒤집어쓴 상태로는 불가능하리라.
“로만 왕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악연이 이어지는구나! 그대들은 결코 이 벽을 넘지 못하고 나의 권속이 될 것이다!”
흑마법사가 음울한 목소리로 그리 소리쳤지만, 솔직히 아이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녀석은 본인이 무슨 마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었지만 따지고 보면 겨우 문지기였다.
그런 주제에 입으로는 평생의 대적 같은 대사를 내뱉으니 우습기만 했다. 휘리릭! 쾅! 아이반이 집어던진 도끼가 녀석에게 날아갔다.
번개가 번쩍이고 커다란 소음이 퍼졌지만 녀석은 전혀 타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녀석의 주위에서 솟아오른 검붉은 기운이 방어막을 만들었다.
아이반은 그것이 낡은 성벽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다 무너져서 폐허가 된 성벽으로 보였지만 그곳에 마법진을 잔뜩 새겨 넣었다.
저 녀석이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이레인이 날카로운 눈으로 곳곳을 살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벽이 보이는 것보다 제법 두꺼운걸. 틈을 찾기는 어렵고 힘으로 넘어야겠어.”
그 말에 사나운 이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군.”
쉬이익! 쾅! 사나운 이빨이 검을 휘두르자 그의 검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가 성벽을 때렸다. 역시 성벽에서 솟아난 방어막이 그것을 막아내어 큰 타격은 없었으나 사나운 이빨은 오히려 즐거운 듯이 소리쳤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는가!”
그가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성벽에 새겨진 방어막이 출렁거렸다. 분명 조금씩 깎이고 있었다. 물론 흑마법사가 그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며 음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들을 죽음으로 데려오라!”
탓! 성벽에서 몇몇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날아와 검을 내리찍었다. 방어막을 후려치던 사나운 이빨은 방향을 돌려 맞받아쳤다.
쾅! 아래에서 올려 쳐야만 하는 사나운 이빨에게는 불리한 자세였으나 그는 약간 무릎을 굽히는 것으로 견뎌냈다. 그러나 위에서 체중을 실어 내리찍던 상대는 오히려 자신의 팔이 부러지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명백한 우세.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던 아군의 표정이 굳었다.
적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러진 팔이 회복되는 것을 보아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한때는 악마와 싸우고 신성한 힘을 다루었던 성직자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료의 시체와 상대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악마숭배자와 맞서 싸우는 구마사제와 성전기사단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코 익숙해지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화르륵!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 신성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들의 분노가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이 되어 크게 솟았다.
천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쿤다라가 저 안타까운 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데려오길 원했다. 앞에 드리운 어둠이 클수록 횃불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
아이반 역시 이를 꽉 깨물었다. ‘토르, 토르. 빌어먹을 위대한 토르! 적들을 모조리 지져버릴 번개를, 녀석들의 골통을 깨버릴 망치를!’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새하얀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가만히 서 있던 그가 마치 공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나아가 적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자들 앞에 나타났다. 푸슉! 아이반의 창이 언데드 성기사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천둥신의 번개가 타고 들어가 그의 몸을 억지로 움직이고 있던 사이한 기운을 모조리 태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