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8
“대가가 부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이반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보물창고에서 하나 챙길 수가 있다면 그건 받아들이는 것이 맞았다. 인간 세상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가득하니까. 세계수가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한 엘프들에게 뒤통수를 맞는 일은 없을 거다. 신성의 조각을 받았던 것처럼 보수는 후하겠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또 다른 일을 얘기하기엔 지금 너무나 피곤하니까.”
아이반이 그렇게 말하자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품에서 작은 브로치를 꺼내 내밀었다. 황금을 실처럼 가늘게 뽑아 뿌리가 무성한 나무의 모습으로 가공한 것이었다.
“그것을 가슴에 달고 숲에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우리와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한 물건이군.”
“다른 종족에게 흔히 주는 징표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 그대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그저 출입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맙게 받겠소.”
황금 브로치를 품에 챙긴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을 맞은 나뭇잎이 반짝이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숲이 숲답게 느껴졌다. 필레인 그레이우드와 요정군단은 전투가 끝나고 하루쯤 이곳에 남아 전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그들은 목숨을 잃은 동족을 이렇게 어둠에 물든 땅에 두기를 원치 않았다. 세계수와 정령들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그들이 평안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럼 조만간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들의 앞길에 축복을.”
척! 필레인 그레이우드의 인사와 함께 뒤에 선 요정군단이 손을 들어 자신들의 가슴 위에 올렸다. 잠깐이나마 같이 싸운 동료에게 바치는 엘프들의 군례였다. 요정군단은 다시 이어진 요정의 숲과의 통로를 이용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걸음을 걷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고 저 너머로 가버린 것이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 자리를 피해 있던 이레인이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반이 물었다.
“그래도 인사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는 않소?”
“이제는 익숙한 일이야. 새삼스럽게 무슨.”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그녀의 눈은 흘깃 그들이 떠난 자리로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요정군단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던 아이반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요정군단이 왜 저리 강할까 고민했는데 이유를 알았소.”
“뭐?”
“군 생활을 일, 이백 년씩 하면 속에 분노가 가득해서 무엇이든 때려 부수고 싶을 테니 강할 수밖에 없지.”
군 생활을 백 년을 했는데 이제 겨우 상병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그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다니, 악마가 눈앞에 튀어나와도 두려울 리가 없지. 이레인은 그를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못 들은 척 화제를 돌렸다.
“성황청의 군대가 거의 도착했어. 조금 있으면 모습이 보일 거야.”
“늦군. 하지만 반가워.”
흑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가능성은 작지만 혹시나 녀석들이 숨겨둔 것이 없는지 수색을 해야 했고, 잔당들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까 지켜보기도 해야 했다. 게다가 잠깐이나마 악마가 소환되었던 곳이었다. 진한 악마의 기운에 물들어 오염이 된 땅이니 신성력으로 정화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이런 곳을 그냥 내버려 두면 스며든 마기에 영향을 받은 마물들이 번창하거나 언데드들이 생성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이곳을 맡기고 떠날 수가 있으니 성황청의 지원 병력이 온다는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물론 그들이 오는 것을 알았기에 요정군단이 빠르게 떠난 것이기도 하지만. 아이반은 뒤를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이들도 쉴 수가 있겠어.”
주변에 있는 나무를 잘라서 급하게 만든 서른여덟 개의 관. 그 주인은 얼마 전에 피에르 로렝과 함께 습격을 당한, 그리고 이번에 목숨을 잃은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이었다. 온전히 시신을 찾은 자들은 소수였고, 신체 일부분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언데드로 이용당하던 성기사들은 정화되며 몸이 재가 되어서 유품으로 대체하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서른여덟 개의 관이었다. 겨우 서른여덟 개. 관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진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살아남은 쿤다라 교단의 성직자들은 그 관을 둘러싸고 밤낮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들의 영혼이 쿤다라의 횃불을 따라 무사히 그의 곁으로 가기를 빌었다.
“으흠······”
가까이 다가온 성황청의 군대는 바닥에 놓여있는 관들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숲에 가득 새겨진 전투의 흔적을 보며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는지 그들 역시 짐작하고 있었기에 무어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서른여덟 개의 관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성황청으로 이송되었다. 목숨을 잃은 그들의 명예가 더욱 화려하게 빛나도록 가는 길에 꽃가루를 뿌리고 뿔피리를 불었다. 수천의 언데드를 파괴했고, 강력한 리치와 흑마법사들을 처리했으며, 악마를 퇴치했다. 그 업적이 더욱 빛나도록 개선행진을 했다.
“앞에 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업적으로 따지면 가장 칭송받아야 할 분이잖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이 손을 내저었다.
“나에게 그런 명예는 필요 없소. 따지면 우리보다 요정군단이 더 활약했지.”
사나운 이빨과 이레인은 인간의 명예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델피노 역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아이반이 홀로 앞에 나서서 개선한 장군인 양 꽃가루를 맞겠나. 게다가 아이반은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악마의 음모가 실행 중이었고, 세상은 점점 더 어둠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걸 아주 잘 알았다.
“망자들이나 잘 챙겨주시오. 그들은 마지막까지 신실했소.”
스스로 횃불이 되겠다고 외치던 피에르 로렝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그들은 존중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 끝, 개선 행렬의 가장 마지막에서 조용히 움직이며 그들을 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아이반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게 누구야! 아이반 아니야!”
서부 연합 왕국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교단 관계자가 아니라면 얼굴만 보고 이름을 알지는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반이 고개를 돌리니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무파 썬더울프의 수련자이자 수년 전 아이반에게 천둥걸음을 알려준 은인. 격투가 마티아스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봐! 여기야, 여기!”
눈을 감은 영웅들을 쿤다라 교단의 신전으로 보내고 아이반은 근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델피노는 성황청에 보고할 것이 있었고, 사나운 이빨은 얼른 몸을 씻기를 원했다. 이레인은 연초가 떨어져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모처럼 혼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옛 인연, 격투가 마티아스가 함께했기 때문이다. 격투가 마티아스는 머리칼이 군데군데 허옇게 변한 중년의 남성이었다. 팽팽한 피부와 몸에 낭비 없이 가득 찬 근육을 보면 전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긴 했지만. 꿀꺽, 꿀꺽!
“크으! 시원하네.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여기 맥주 맛이 좋아. 드워프도 여기서 주문한다는 소문이 있다니까.”
호쾌하게 맥주를 들이켠 마티아스가 입을 쓱 닦고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여전히 튼튼해 보여. 어때,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어?”
“뭐, 똑같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칼질하고, 그렇게 벌어서 먹고살고.”
최근 들어서 스케일이 많이 커진 것 같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힘쓰고 보상을 챙기며 살고 있었다.
“성황청의 군대가 악마와 싸워 이겼다던데, 그 행렬에 같이 있는 것을 보니 당신도 한 손 거든 모양이지? 여전히 사건사고가 많은가 봐.”
“칼이 필요한 일인데 위험하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흐, 그렇지. 그게 노르드 전사의 기개였지.”
마티아스가 그렇게 감탄을 터트리자 아이반은 쓴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을 맥주를 마시는 척 숨겼다. 노르드 전사의 기개는 개뿔. 자신에게 언제 그런 것이 있었다고. 남들은 그를 보고 영웅의 길을 걷는다고 말하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선량한 사람. 그래서 냉정하게 끊어내지도, 모든 것을 품어내지도 못하는 사람. 쓴웃음은 숨겼으나 씁쓸한 눈빛마저 숨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마티아스가 아이반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렐에서 헤어진 이후로 3년쯤 된 것 같은데, 많은 일이 있었나 봐. 눈빛이 그때보다 깊어졌어.”
“하루하루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지. 칼날이 목을 스치고 지나가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기 마련이오.”
“흐, 내가 대현자를 모시고 있었군.”
“당신이 알려준 천둥걸음 덕분이지.”
그 말에 마티아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가르쳤다기보다는 자네가 배워간 거지. 자기 멋대로 훔쳐 가 놓고서는.”
“배울 수 있으면 배워보라고 말했잖소?”
“흐흐, 그래. 그랬지. 그때는 어떻게 알았겠나? 그저 설명을 한 번 듣는 것만으로 기술을 훔쳐 갈 수 있는 사내가 있다는 것을. 어이가 없는 일이지.”
마티아스는 한참을 껄껄 웃다가 문득 표정을 굳히고 말을 꺼냈다.
“이야기는 들었어. 율리아의 목을 베었다고?”
율리아 밀러. 무파 썬더울프의 수행자. 잠깐이나마 같은 의뢰를 수행했고, 그중에 그를 배신했던 사람. 아이반은 그녀를 떠올리고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그녀의 목을 베었지.”
그 말에 마티아스는 입을 다물고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이반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제법 친밀한 사이였나 보오?”
마티아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끼던 후배였지. 녀석이 어릴 때는 내가 직접 기초를 잡아주기도 했고. 어릴 때는 참 밝고 귀여운 아이였지. 그대가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왜, 복수라도 하고 싶으시오?”
그 질문에 마티아스는 시선을 피했다.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복수? 내가 왜? 무파에 대한 탄압이라면 함께 싸우겠지만 개인의 복수를 할 의리는 없어. 그것도 본인이 욕심에 눈이 멀어 헛짓을 하다가 당했다면 더욱. 내가 무슨 명분으로 복수를 외치겠나?”
무파 썬더울프의 수행자들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먼저 배운 사람과 나중에 배운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서로를 선배, 후배라 칭할 뿐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었다. 오로지 심신의 단련과 육체적 고행을 통한 구도만을 목표로 할 뿐 세를 이루는 것은 그들의 길과 맞지 않았다. 마티아스의 말은 무파 썬더울프의 정신에 합당했다. 그래서 아이반이 오히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리를 찾지 못했기에 구도자고, 끝을 보지 못했기에 수행자요.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당연한 일 아니겠소?”
“···괜찮겠나? 이건 그저 내가 떼를 쓰는 것에 불과해.”
“예전 안도렐에서 당신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 그때의 빚을 갚는 셈 치겠소.”
그 말에 마티아스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는 항상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살다 보니 그게 참 쉽지 않더군.”
그는 단단해진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룻밤만, 그대와 악연을 맺겠네.”
아이반과 마티아스는 성벽을 나서 멀찍이 떨어진 공터로 움직였다.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한적한 곳까지 도착해서야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섰다.
“···많이 강해졌군. 기세가 달라졌어.”
마티아스의 말에 아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못했다면 목숨을 잃었을 거요.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싸움만 찾아오더군.”
“흐, 그렇지. 그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숙명이지. 이겨내지 못할 때까지 반복해서 싸우다가 결국 쓰러지는 것이 운명 아니겠나.”
“나는 그런 끝은 싫소.”
“나도 그래.”
치지직! 쾅! 푸른 번개가 동시에 번쩍이고 어느새 서로가 가까이 붙어있었다. 아이반이 꺼낸 도끼가 마티아스의 주먹에 터져나가고, 마티아스의 발차기가 아이반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물러났으나, 마티아스는 그 속도 그대로 그를 따라잡았다. 천둥걸음의 숙련도는 마티아스가 높았다. 똑같은 기술로 그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화르륵! 아이반의 몸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뜨거운 열기가 갑자기 덮쳐들자 마티아스가 움찔 거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으로 아이반은 검을 꺼내 휘둘렀다. 깡! 아이반이 휘두른 검이 마티아스의 갑옷을 타고 튕겨 나간다. 몸을 기울여 검을 흘려보낸 것이다. 격투가는 무기를 들지 않는 대신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방어구는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이 아니라 스스로 보호하는 방법. 중무장한 기사만큼이나 공격을 적중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우웅- 단순히 공격을 흘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력을 역으로 불어넣어 흔들어놓았다. 아이반의 손이 순간적으로 저릿해질 정도로. 그렇게 아이반이 멈칫한 사이, 마티아스가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에 다리를 굳건히 딛고, 허리를 비틀어 화살같이 가볍게. 쾅! 아이반의 몸이 뒤로 밀려 나간다. 팔찌의 형태로 숨겨져 있던 황금 방패를 사용해 마티아스의 주먹을 막았으나 차마 흘리지 못하고 그대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때 마티아스가 빠르게 달라붙어 한 번 더 주먹을 휘둘렀다. 뇌격권, 마치 번개가 때리는 듯 빠르고 강맹하게. 치지직! 쾅! 아이반이 멀찍이 날아가 나무를 부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마티아스가 차갑게 말했다.
“자네, 못 본 사이에 잔재주가 많이 늘었어.”
그 말과 함께 쓰러져있던 아이반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마티아스의 뒤에 멀쩡히 서서 칼을 들고 있었다.
“복수를 하고자 했으면 힘을 다하시오. 어설프게 아끼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