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69
“자네, 많이 건방져졌군.”
“예전에도 그리 예의 바르진 않았소.”
“그래, 그 말투가 좀 재수 없긴 했지.”
팅! 마티아스가 빠르게 뒤돌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그의 등을 노리고 있던 아이반의 칼끝을 쳐내고 품으로 파고든 마티아스가 팔꿈치로 가슴을 내리찍었다. 쿵! 망치로 후려치는 듯한 공격. 아이반의 몸이 뒤로 멀찍이 물러나려다 말고 제자리에 멈췄다. 그의 몸에서 폭풍이 흘러나왔다. 휘이잉!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닥에 깊은 골이 생기고 허공이 찢어졌다. 매서운 폭풍이 마티아스를 덮쳤다. 쉬이익! 용의 목을 베듯 내려오는 아이반의 검을 보면서 마티아스가 두 손을 옆구리에 붙였다. 그리고 마력을 듬뿍 머금은 주먹을 휘둘렀다. 배고픈 늑대의 이빨처럼 날카롭게. 무파 썬더울프의 비기, 아랑인(餓狼刃). 스걱! 폭풍이 갈라진다. 바람을 멈추고 아이반에게 다가갔다. 굶주린 늑대의 이빨이 그를 씹어 삼켰다. 그때 아이반이 중얼거렸다.
“바기 울프스(Bagi ulfs:늑대의 적)”
그를 꿰뚫으려던 늑대의 이빨이 멈추고, 갈라졌던 폭풍이 한 점에 모인다. 아이반의 검을 타고 쏘아져 나갔다. 늑대의 입을 찢고 그 속에 박혀들었다. 마티아스의 주먹은 더 이상 늑대의 이빨이 아니었다. 먹이를 씹어 삼키지 못한 굶주린 늑대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쾅! 마티아스가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강한 충격이 그를 뒤흔들어 정신을 잃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 고요해진 공터에 아이반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동맥을 끊고 숨구멍을 잘랐으리라. 화르륵! 아이반의 상처가 불타올랐다. 예전보다 익숙해진 권능을 사용해 환상으로 만들었다.
“그쯤 봤으면 나오시오. 신경 쓰이니까.”
아이반이 대뜸 그렇게 외치자 분명 아무도 없었던 나무 위에서 이레인이 털썩 내려왔다.
“연초를 만든다더니.”
“그러려고 했지. 당신이 야밤에 성문 밖으로 나가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하늘하늘한 가운을 흩날리며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한 모금 크게 빨아들인 후 말을 이었다.
“당신은 특이점이야.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하잖아. 왜, 불편해?”
그 말에 아이반은 코웃음을 쳤다.
“괜찮소. 스토킹은 익숙하니까.”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음흉한 놈들과 비교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무슨 인연이야? 야밤에 여기까지 나와서 한바탕하다니.”
이레인이 쓰러진 마티아스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아이반은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반은 그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복수를 한다더니, 그러지도 못했소. 그런 멍청한 남자요.”
마티아스는 끝내 숨기고 있던 힘을 다 끌어내지 못했다. 굶주린 늑대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어야 할 주먹에 잡념이 가득하니 썩은 고기마저도 씹을 수가 없지. 그는 복수를 외쳤지만 끝내 자신의 고뇌를 이기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좋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진심으로 싸웠다면, 아이반을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치열한 싸움이 되었으리라.
“뭐? 뭔지 모르겠지만 목숨을 끊을 생각은 없나 봐? 하긴, 어린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법이지.”
이레인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엘프의 시선으로 보자면 인간은 나이를 얼마나 먹어도 어리게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고. 연초나 마저 만들어야··· 뭐해?”
스윽 아이반은 쪼그려 앉아서 기절한 마티아스의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대꾸했다.
“챙길 건 챙겨야지.”
툭! 사람 하나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와 바닥에 내려놓자 델피노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러 간다더니 행색이 엉망이로군요. 술자리 시비라도 있었습니까?”
그렇게 말을 내뱉으면서도 델피노는 어이가 없었다. 아이반이 어디서 술 마시다 시비에 걸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노르드 전사 특유의 건장한 체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아이반에게 대놓고 행패를 부릴 수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노르드인이 야만족이라고 무시당한다고는 해도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있는 깡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근육질 가득한 팔뚝과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들을 보면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던 겉으로는 누구나 행동을 조심하기 마련이었다.
“지나가던 소드마스터와 멱살잡이라도 한 것 같군요.”
“소드마스터는 아니고, 격투의 달인과 한판 하기는 했소.”
아이반이 쓰러져있는 마티아스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썬더울프 출신이거든.”
그 말에 델피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 아이반의 행적을 조사한 적이 있는 그는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델피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쪼그리고 앉았다.
“치료하겠습니다.”
아이반은 후환을 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일단 싸우게 되었다면 상대의 목숨을 끊었을 것인데, 이렇게 살려서 데려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부탁 좀 하겠소. 이대로 목숨을 끊기엔 아까운 사람이라.”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아이반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겪었다. 대부분은 쓰레기에 양아치, 사기꾼이었지만 그중에 아주 드물게 좋은 사람이 있었다. 마티아스는 그런 좋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인연이 이렇게 꼬이기는 했지만, 그의 목숨을 거두고 싶지는 않았다. 화아악! 델피노가 신성력을 내뿜어 마티아스의 상처를 치료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상이 깊었다. 그렇게 치료를 마친 후 델피노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철컥- 한쪽 구석의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은 아이반은 허리춤에 매달린 무기를 풀어 확인했다. 짧은 전투에도 장비가 많이 상했다. 도끼 하나는 박살이 났고, 검 역시 겉만 멀쩡할 뿐 안쪽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 값은 마티아스의 주머니에서 챙겼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근 장비 소모가 많아. 어쩌면 휴식이 길어질 수도 있겠어.”
우웅-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꺼내 손에 쥐었다. 피에르 로렝의 죽음 이후 녀석이 조용해졌다. 마력을 불어넣어도 반응도 없고. 시스템이 피의 검 브리카의 각성을 보상으로 내걸었으니 분명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각성이 아니라 봉인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반은 눈을 감고 브리카를 이마에 가져다 댔다. 무언가 브리카의 안에서 거대한 힘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피의 검 브리카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언제 끝나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은 이미 수명이 다했고, 피의 검 브리카는 각성 중이라 사용하지 못하니 장비 측면으로는 이전보다 약해진 셈이다. ‘엘프의 의뢰를 해결하고 나면 새로운 무기를 얻을 수가 있겠지만······.’ 엘프의 의뢰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새로운 무기를 얻으려면 의뢰를 수행해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쓸 만한 장비가 없으면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이반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티아스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상처가 얕지는 않았으나 원체 강인한 사람이라 금방 깨어난 것이다. 그는 끔뻑거리며 눈을 움직이다가 문득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저승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군. 왜 살려뒀나?”
그 말에 아이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아직 술을 덜 마셨소. 나는 술 마시다가 먼저 일어나서 가는 사람을 싫어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맥주 두어 잔 정도로 되겠냐고 너스레를 떨며 되물으니 마티아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는 많이 바뀌었군. 예전보다 여유가 생겼어.”
“그런 척하는 거요.”
아이반이 손을 내밀자 마티아스는 머뭇거리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군. 나는 몹쓸 사람인가 봐.”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군. 오랜만에 만난 술친구를 잃어버릴 뻔했으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이반이 말을 했지만, 마티아스는 여전히 괴로운 표정이었다. 자신이 먼저 일을 벌여놓고 이렇게 어설프게 마무리되는 것을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독한 술을 한 병 꺼내 던지자 마티아스는 그대로 받아들고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그렇게 단숨에 한 병을 비우고서 입을 열었다.
“순수한 녀석이었어. 강해지고 싶다며 눈을 반짝이던 녀석이었지. 그 녀석이 그렇게 잘못된 것은 내 탓이기도 해.”
녀석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아이반은 대꾸하지 않고 같이 술병을 기울였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의 목숨을 끊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후배의 복수를 하지도 못했으니 좋은 선배가 되지도 못했고, 명분이 없는 복수를 외치며 그대의 목을 노렸으니 좋은 친구가 되지도 못했네. 참으로 면목이 없어.”
무파 썬더울프에 스승과 제자는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율리아 밀러는 그의 제자와 같은 존재였다. 아직 심적인 갈등이 계속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를 신경 쓸 필요는 없소. 그럴 수도 있지.”
“술자리 실수라고 생각하기에는 고약한 짓이었네. 자네가 받아줬다고 해서 내 마음이 편해질 수는 없어.”
아이반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대로 떠나고자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연이 얄궂군.”
“그러게 말일세.”
마티아스는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껏 복잡하던 감정을 모두 흘려보내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 번 떼를 썼으면 그걸로 족하지. 그대가 내 목을 취하지 않았으니 다시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네.”
“어디로 갈 생각이오?”
“동쪽. 듣자 하니 그쪽이 요즘 시끄럽다고 하더군. 오크들과 한껏 드잡이를 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겠지.”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다. 눈을 깜빡거리더니 두어 번 더. 아이반이 자신의 품에서 쓱 주머니를 꺼내 내밀자 그는 잠깐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가지게. 술값은 내가 내야지.”
“흠, 흠!”
“그 안에 양피지가 하나 있을 거야. 내가 조사하던 것이었지만, 어쩌면 주인은 그대였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이제 동쪽으로 갈 예정이니 흥미가 있으면 한 번쯤 찾아보게. 심심치는 않을 거야.”
마티아스는 그리고 이내 떠났다. 머릿속의 잡념을 씻어줄 치열하고 위험한 전투를 향해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반은 머뭇거리다가 그가 떠나기 전 겨우 물었다.
“다음에 또 술 한잔할 수 있겠소?”
그 말에 마티아스는 흐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연이 닿는다면, 언젠가. 그때는 그저 즐겁게 술을 마시자고.”
그가 휘적이며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이레인이 나타나 옆에 섰다. 그녀는 깊게 연초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피식 웃었다.
“눈빛이 아련하군. 누가 보면 연인이라도 떠나보내는 줄 알겠어.”
“농담이 심하시군.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못되오.”
“양피지는 무슨 이야기야? 물어봐도 괜찮겠지?”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확인을 안 해서 모르오. 간다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아이반은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돌돌 말려있는 양피지를 꺼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펼쳤다.
“공용어는 아니군. 서부의 방식이기는 한데, 어디 말이지?”
아이반은 제법 많은 언어를 알고 있었지만,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건 아주 마이너한 수준의 문자라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해독을 좀 해야 할 것 같······.”
그때 이레인이 힐끔 양피지를 보더니, 말을 내뱉었다.
“나의 모든 보물을 이곳에 두고 왔다.”
“뭐?”
“해적들 사이에서 주로 쓰이는 암호문이야. 방식이 낡은 것을 보면 요즘 스타일은 아닌데, 한 삼백 년쯤은 되었겠어.”
“예전에 해적질도 하셨소?”
“보통은 때려잡는 쪽이었지.”
서부 연합 왕국은 서쪽으로 큰 바다와 접해있었다. 그 물길을 통해 다른 대륙과 이어지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고. 수많은 무역선이 왔다 갔다 하는 곳이니 그들을 노리는 해적 역시 많았다. 중간에 모습을 숨길 수 있는 자잘한 섬들이 많아서 토벌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고. 산적이나 마적도 지독한 놈들인 건 매한가지지만 해적은 그보다 한 수 더했다. 안 그래도 힘든 것이 뱃일인데 그걸 하면서 노략질까지 하는 녀석들이 오죽하겠나. 이레인은 아이반에게서 양피지를 받아 달빛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흐릿하게 지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