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71
그러면서 토마스 마이어는 천천히 지도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펴보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얘야, 내 방에서 상자를 가져와라.”
“예?”
“내가 항상 말하던 그거 있잖느냐? 어서!”
조금 전까지 흐릿하던 그의 목소리가 뚜렷해졌다. 세월을 거슬러 젊음을 되찾았는지 노인의 눈빛이 밝게 빛나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젊은 남자가 가져다주는 상자를 열고 이런저런 종이 쪼가리들을 뒤적거리던 토마스 마이어가 크게 탄성을 지르더니 의아한 듯이 물었다.
“이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거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칼리 호킨스와 비슷한 시기의 물건이오. 한 350년쯤 전에 만들어진 비밀 지도지. 아주 정교해. 호킨스 가문의 문장과 특유의 기법까지 똑같고.”
요즘 이렇게까지 수준 높은 것을 보기는 어렵다며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토마스 마이어가 말했다.
“이 지도가 진품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오. 그건 직접 이곳으로 가서 보물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태까지 본 것 중에서는 가장 그럴듯하군.”
그는 이것이 정말로 칼리 호킨스가 만든 지도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하나 있다며 껄껄 웃었다.
“듣자 하니 칼리 호킨스는 자신의 피로만 반응하도록 지도를 숨겼다고 하오.”
“하지만 이미 수백 년이나 지났다면서? 이미 죽은 사람의 피를 어떻게 구한단 말이야?”
그 말에 토마스 마이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은 죽어도 피는 자손을 통해 이어지지. 비록 원형과 같지는 않아도 말이오.”
토마스 마이어는 젊은 남자를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젊은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다. 살이 쩍 갈라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뚝뚝- 그 피가 양피지를 적셨다. 핏물이 낡은 양피지에 스며들었다. 그걸 바라보면서 토마스 마이어가 크게 웃었다.
“드디어, 드디어···!”
양피지를 적신 핏물이 선을 그리고 있었다.
토마스 마이어는 피로 새롭게 새겨진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칼바람 군도로군. 그쪽이 아니면 말이 안 되지.”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레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칼바람 군도? 그 지옥의 섬들?”
“막대한 재산이오. 그 모든 것을 수백 년 동안 숨기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이레인과 토마스 마이어가 지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델피노는 젊은 남자의 손을 치료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예. 사제님.”
“그냥 델피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델피노 사제님. 저는 카일이라고 합니다.”
“카일 마이어?”
“예? 아, 음, 예. 그렇죠.”
손바닥의 베인 상처는 델피노의 신성력에 의해 순식간에 아물었다. 피를 닦아내고 나니 언제 상처가 있었냐는 듯 멀쩡해졌다. 그리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사나운 이빨이 낮은 숨소리를 흘렸다. 리자드맨의 언어는 그들을 제외하고는 이게 언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비밀 대화를 하기에 적합했다.
“이상하다.”
“무엇이?”
“감추는 것이 많아 보여.”
“모두 드러내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소.”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아이반 역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도가 진품이라는 것 정도는 놀랍지 않았다. 신이 관심을 가지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게다가 지도가 진품이라고 해도 그곳에 실제로 보물이 있는지, 그게 쓸 만한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였고. 문제는 그런 것보다 토마스 마이어라는 사람 자체에서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과연 이자는 믿을 수가 있는 사람인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 치고는 바닥에 찍힌 자국이 없소. 아주 건장한 몸이라고는 못해도 근육의 움직임을 보면 지팡이를 짚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툭툭. 차를 마시던 아이반은 그저 습관인 것처럼 다리를 떨었다. 그리고 뒤꿈치로 바닥을 때리며 퍼트린 마력을 통해 지하실이 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집의 규모에 비하면 지하실이 너무 크군. 뭐 알아낸 것 있소?”
그 말에 코를 씰룩거리던 사나운 이빨이 말했다.
“약 냄새가 난다. 그게 아주 지독해서 다른 냄새를 다 덮고 있어.”
“약 냄새?”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사이 토마스 마이어와 이레인의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있었다. 이 지도가 진짜라면 어떻게 가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칼바람 군도라면 그쪽으로 가고자 하는 배가 없을 텐데.”
“쉽지는 않겠지만······.”
잠깐 고민하던 토마스 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나를 데려가준다면 한 번 힘을 써보지. 평생을 원했던 일이오.”
“괜찮겠어?”
“나, 토마스 마이어요. 아직 영향력이 모두 죽지는 않았소.”
그는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오라며 일행을 내보냈다. 지금부터 새로 배와 선원을 구하려면 몹시 바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아이반이 이레인에게 슬쩍 물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믿을 수 있겠소?”
이레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인 후에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럴 리가. 수십 년이 흘렀어.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습은 이미 많이 사라졌더라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는 이쪽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야. 보물 지도가 있다고 다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의 도움이 필요해.”
원래라면 이런 일은 몇 년에 걸쳐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걸 외부 인력으로 보충하려면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만 했다.
“그건 그렇고 이대로라면 칼바람 군도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진짜 괜찮겠어?”
그 말에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니 당신은 알고 있는 모양이지?”
이레인의 물음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아주 지독한 곳이라 들었소.”
칼바람 군도. 이름도 살벌한 그곳은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는 곳이라고 했다. 암초가 가득해 수많은 배들이 근처에서 침몰했다고도 했고. 위험한 항로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칼바람 군도는 위험하기로 손가락에 꼽히는 곳이었다. ‘거기에 보물? 그런 게 있었나?’ 아이반은 옛 기억을 뒤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뭐가 있었지? 그냥 보상도 짜면서 더럽게 귀찮은 곳이었······.’ 문득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어긋나 있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보물, 칼바람 군도, 해적, 바다. 아이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긴, 씨부럴. 그 망할 신들이 내가 노는 꼴을 볼 리가 없지.’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동료들이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반이 가끔 혼자서 저러다가 답을 찾아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반이 미래 예지와 비슷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알게 된 것이라도 있습니까? 델피노다 반짝이는 눈으로 묻자 아이반이 답했다.
“바다에 빠졌을 때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소.”
일행은 몹시 불안해졌다.
“그, 배가 침몰이라도 하는 겁니까?”
델피노가 그렇게 묻자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
“그러면 바다에 빠졌을 때 살아남는 법을······.”
“내 말은 전투가 극심할 것이라는 뜻이었소. 그러다 보면 물속에서 싸워야할지도 모르니까.”
아이반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지금쯤 칼바람 군도는 이미 평범한 곳이 아닐 터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초기였으니 최악은 아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전의 일들과 모두 이어져 있었다. 악마의 소환, 차원방벽의 약화, 그로인한 흔들림.
“거기에는 아마 던전이 있을 거요. 어느 정도나 되는 크기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차원방벽이 흔들리면 던전이 만들어지기 쉬웠다. 던전 역시 일종의 다른 차원이었으니까. 악명이 붙을만한 역사적인 근원, 사람들의 사념, 핵이 될 만한 칼리 호킨스의 보물.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칼바람 군도는 저주받은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독한 장소요. 그런 곳이 던전이 되었으면 얼마나 위험하겠소?”
하지만 그 말에 동료들은 오히려 안심한 표정이었다. 배가 가라앉는 것이 두렵지, 적은 무섭지 않다는 뜻이다. 하긴 언제 그들이 전투를 피한 적이 있었나.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던 자들이었다.
“모두 단단히 준비를 하시오. 항상 그랬듯이.”
솨아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 짭짤한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바다 냄새가 가득 밀려왔다. 일행이 지금 있는 곳은 서부 연합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도시, 가스핀이었다. 수많은 무역선이 오가고, 다양한 문화가 섞여서 공존하는 곳. 털이 수북한 수인족과 인간, 리자드맨이 섞여 있고, 놀랍게도 오크와 고블린도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 동쪽에서는 그린 스킨과 아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서쪽은 아직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피의 동맹에 가입하지 않은 오크와 고블린도 제법 많았다. 아이반이 그런 사람들을 보는 사이 사나운 이빨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시야 끝까지 보이는 모든 것이 물이었다. 그런 장면이 상당히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게 바다!”
“그래, 바다요. 더럽게 짜고 많은 물.”
“내가 바다에 왔다!”
사나운 이빨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약속한 시각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항구 한쪽 구석, 그곳에 일행이 타고 나갈 배가 있었다. 토마스 마이어가 그 앞에서 일행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오. 어떻소?”
그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이전에 인상이 흐릿하던 늙은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눈빛에서는 힘이 가득 느껴졌다.
“좋아. 생각보다 커다란 배를 준비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