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72
“이 정도 덩치가 아니라면 그 거친 파도를 뚫고 나갈 수가 없으니까.”
“짧은 시간에 용케 준비했어.”
“흘흘, 그러게 말이오. 노력 좀 했지.”
칼바람 군도는 사시사철 폭풍우가 치는 거친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나마 잠잠해지는 요즘 시기를 놓치면 적어도 몇 달은 손가락 빨면서 그냥 기다려야만 했다. 그 몇 달을 토마스 마이어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정말로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겨우 며칠 만에 출항 준비를 마친 것은 모두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지도를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속도가 중요하오. 어디서 이야기가 새버리면 벌레가 붙거든.”
그렇게 말한 토마스 마이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쓸어보더니 배에 훌쩍 올라갔다.
“카일! 빨리빨리 움직여라!”
토마스 마이어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젊은 시절 카랑카랑하던 모습이 다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뒤따라서 일행이 배에 오르니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선원들이 그들을 힐끗 바라봤다. 한동안 같은 배를 탈 것이니 궁금하겠지.
“···저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사나운 이빨의 말에 이레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뱃놈 중에서는 여자가 배에 타는 것을 불편해하는 녀석들이 많으니까.”
이레인은 자신이 엘프임을 숨기고 있었으나, 그 변신한 모습마저도 미인이었다. 대체로 젊은 선원은 그 외모를 보고 헤벌쭉 웃었고, 나이 든 선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다는 불가항력의 존재였다. 그것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신앙도 아닌 미신을 많이 믿고는 했다. 그중에 배에 여자가 타면 불길하다는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였다.
“신경 쓸 것 없어. 의미 없으니까.”
화악! 이레인은 정령을 불러와 자신의 주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불편하게 보고 있던 선원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 이후로는 불편한 시선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저 무력 시위는 아닌 것 같은데.”
“비슷한 거야. 바다 위에서 정령사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저들은 모두 아니까. 여자가 배에 타면 안 된다는 것보다 강력한 정령사가 배에 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거지.”
이레인은 코웃음을 치면서 정령을 돌려보냈다.
“나는 선실에 있겠어.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지.”
탓! 배를 고정하고 있던 줄이 풀리고 천천히 항구를 떠났다. 돛이 펼쳐지고 바람을 타고 빠르게 속도를 올렸다. 솨아악!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경험이 신기한 것인지 사나운 이빨이 배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떨어지니까 조심하시오.”
“내가 그런 바보인 줄 아는······.”
철썩! 배가 출렁거리는 것을 따라 몸이 비틀거리는 걸 경험한 사나운 이빨은 난간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아이반이 고개를 돌려보니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오?”
그 물음에도 델피노가 대답하지 않자 아이반은 혹시 악마의 기운이라도 느낀 것인가 싶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직 항구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우웨엑!”
아이반은 말없이 델피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으흠, 배를 타는 것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델피노가 아주 핼쑥해진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파도가 치는 바다는 강과 완전히 달랐다. 뱃멀미가 힘들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줄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신성력을 이용해 자신을 진정시키면 잠깐 괜찮아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신성력을 뽑아 쓸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델피노는 품에서 뱀 소환의 단검을 꺼냈다. 예전 사나운 이빨의 부족, 붉은 계곡 소용돌이 부족에서 보상으로 받아온 그것이었다. 스스슥! 델피노가 단검에 힘을 불어넣자 황금색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곧 뱀의 모습이 되었다. 황금색 뱀은 주변을 쉬쉬 둘러보다가 델피노에게 다가가 그를 콱 물고는 그대로 스며들었다. 원래 적을 마비시키는 독이었다. 그것을 아주 약하게 사용하여 스스로 감각을 둔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용도로 사용하다니, 좋아할 수가 없다.”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뱀 소환의 단검은 나름 뱀신 모르나의 권능이 깃들어있는 보물이었다. 그걸 적에게 사용하는 것보다 먼저 자신에게 쓰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복잡하겠지. 물론 가장 보호받아야 할 사제가 직접 단검을 들고 스스로 보호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동안 단검이 쓰이지 않은 것이 사실 다행스러운 일이다. 끔뻑끔뻑 델피노가 느릿하게 눈을 움직이며 말했다.
“느낌이 좀 많이 이상하군요.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 느낌입니다. 감각이 둔해져서 그런지 현실감도 적고요.”
원래 델피노는 구마사제로서 온갖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웬만한 독은 웃으며 씹어 먹을 정도로 내성을 쌓았다고 했지. 그러나 황금 뱀의 독은 실존하는 독이라기보다는 뱀신 모르나의 권능이 깃든 저주에 가까웠다.
“이제는 좀 괜찮소?”
“음, 계속 배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부작용도 없고요.”
저주는 나중에 본인이 가진 신성력으로 해제할 수가 있었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에 오히려 깔끔하게 사라질 테고. 뱀 소환의 단검이 가진 가치를 생각하면 영 미묘한 쓰임새였으나 어쨌든 지금은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마냥 신비롭고 신기하던 바다의 쓴맛을 맛본 델피노는 그 후로 거의 선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나운 이빨은 며칠쯤 갑판에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계속하니 지루한 모양이다. 곧이어 그 역시 선실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그 사이 아이반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선원들과 친해졌다. 태생이 아싸라 붙임성 있게 다가가는 것을 잘하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맛있는 술 한 병을 내밀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술 한 잔을 기울이면서 알아낸 것은 대부분 쓸모없는 것이었다. 어느 항구에서 마을 처녀를 어떻게 꼬셨다는 둥, 어느 곳의 미녀가 많다는 둥, 자신이 20미터나 되는 고래를 낚시로 낚았다는 둥 저질스러운 음담패설과 허풍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토마스 마이어와 카일, 그리고 선장에 대한 정보도 분명 있었다. 우웅- 마력을 펼쳐 방음 결계를 만들어낸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선원들은 묘하게 토마스 마이어를 신뢰하고 있었소. 이 배의 선장이 크게 나서지 않는 것도 그에 대한 존경의 의미라더군. 단순히 명성이나 인품에 이끌렸다고 하기에는 과할 정도였소.”
선원들은 칼리 호킨스의 보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저 칼바람 군도로 간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것이 더 놀라웠다. 보물이 아닌데도 그 지옥과 같은 섬으로 기꺼이 따라간다는 뜻이 아닌가.
“토마스 마이어는 아주 유명한 모험가였어. 평생 보물을 찾으러 다녔고, 그가 원했던 칼리 호킨스의 보물은 찾지 못했어도 놀랄만한 발견을 많이 했지.”
이레인의 말에 아이반이 되물었다.
“그것이 수십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요? 다른 이들이 기꺼이 위험을 함께할 만큼?”
“지금 상황만 본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아이반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인덕과 명성, 그것만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가산을 탕진하고 빈민가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배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말이 되오?”
그에게는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이반은 영 찝찝하기만 했다. 그때 하루의 절반을 선실에서 잠자는 것으로 버티고 있던 델피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마 그는 이교도일 것입니다.”
“뭐요?”
“성황청의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지역 사교의 숭배자라는 뜻이죠. 며칠간 여기 누워서 고민하다 보니 알겠더군요.”
그는 흘깃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는 사교의 간부나 지도자에 가까운 위치겠죠. 그러니 보이는 것 이상의 신뢰를 받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선원들과도 종교적으로 이어져 있을 겁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뜬금없이 폭탄 발언을 한 것 치고는 델피노의 표정의 평온했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아이반이 그것에 관해 묻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래 뱃사람들이 그런 믿음에 취약합니다. 흔한 일이죠.”
서부 연합 왕국은 아주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곳이었다. 심지어 흑마법사도 악마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멀쩡하게 활동할 수가 있는 곳이었으니. 성황청의 아홉 교단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일이었으나 그런 곳에서 근원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자잘한 신앙의 존재를 모두 지워버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겉으로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는 사교도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상징을 항상 품에 지니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박해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고, 소속감을 위한 일이기도 하죠. 그런 숨겨진 상징들이 선원들에게서 보이더군요.”
델피노는 원래 그런 쪽의 전문가였다. 악마를 쫓고 이단과 사교의 무리와 싸우는 구마사제. 그의 눈이 틀렸을 리가 없다.
“성황청이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유가 있을 텐데······.”
사실 성황청은 다른 종교에 아주 배타적인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황청 자체가 아홉 개의 교단이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고, 웬만한 종교는 그러려니 넘어가곤 했다. 당장 아이반의 일행만 보더라도 네 명이 모두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 성황청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최근에 생긴 신앙이거나 무언가 교리가 이상한 경우였다.
“아직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긴장을 풀지는 말아야겠죠.”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반은 그것을 느끼고 얼른 방음 결계를 흩어버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문을 열어주니 선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선장님께서 정령사님을 청하셨습니다.”
갑자기? 모두가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이레인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바람 군도 근처 해역에 도착을 했나 보지?”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알았어. 간다고 그래.”
병사가 돌아가자 이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준비해. 지금까지 바다는 애들 장난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선실 밖으로 나온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은 고요했다. 그러나 저 멀리 검은 구름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느낌이었다. 폭풍이 밀려온다. 땀을 뻘뻘 흘리며 타륜을 돌리고 있는 조타수 옆에 선장과 토마스 마이어가 서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하게 앞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이레인을 반겼다.
“오셨소? 쉬고 있는데 불러내 미안하구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이레인이 코웃음을 치며 힐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요즘 잠잠한 시즌이 아니었어? 영 위험해 보이는데?”
“저 정도면 얌전한 편이지. 부탁하오.”
그 이후로 선장이 뭐라 이야기를 읊었으나 배에서 쓰이는 전문 용어였기에 아이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레인은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한 번 뚫고 가보자고.”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거친 폭풍우가 몰아쳤다. 마치 경계를 넘은 것처럼 완전히 날씨가 바뀌었다. 부웅!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내려앉는다. 이전까지 경험했던 파도는 우습다는 듯이 배가 휘청이고 있었다. 쏴아아! 비가 내렸다. 조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인 것처럼 거세게 쏟아부었다. 그때 이레인의 몸에서 짙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정령이 주변을 둘러싸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몰아치던 파도가 잦아든다. 사나운 바람이 조용해진다. 폭풍우 속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던 배가 오히려 진정되었다. 정령들이 주변 환경을 바꾸고 있었다. 이게 경지에 오른 정령사가 배에서 환영받는 이유였다. 그렇게 한 시간을 뚫고 지나가니 폭풍우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 고요한 바다가 등장했다. 착! 정령의 힘을 이용해 젖은 몸을 순식간에 말린 이레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방금 같은 폭풍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올 거야.”
그 말에 아이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다가 원래 이렇소?”
“원래 변덕스러운 곳이긴 하지. 그중에서도 칼바람 군도 근처 해역은 아주 성질이 더럽기로 유명······.”
말을 하던 이레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토마스 마이어와 선장, 그 외 다른 모든 선원이 입을 다물고 바다를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뭐가 있나?’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다를 잘 모르는 그로서는 뭐가 이상한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안개가 문제야. 갑자기 해무가 밀려오고 있는데, 지나치게 짙어. 이건······.”
이레인이 설명을 채 마무리하지 못했다. 어느새 크게 짙어진 안개가 사방을 뒤덮어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파도 소리와는 명백히 다른 기묘한 소음. 마치 북소리와 같은 울림. 그것을 들은 선장이 날카롭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