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74
“당신은 칼리 호킨스가 남긴 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게 깊은 바다의 폭군과 관련이 있나?”
토마스 마이어는 한참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우리 어버이의 심장이오.”
대륙의 서쪽 바다를 지배하던 옛 신, 깊은 바다의 폭군. 혼돈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아간 오래된 초월자인 그는 악마가 아니었다. 그러나 악명이 워낙 높았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것을 틀어쥐고 자신의 영역으로 삼으니 필멸자들은 쉽게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랜 세월 대륙의 서쪽 바다를 지배했다. 그 힘으로 필멸자들의 두려움 섞인 신앙을 받으며 군림했다. 그러다 마침내 일어선 영웅들과 그들을 후원하던 초월자들에게 퇴치되었다고 했다. 깊은 바다의 폭군은 이제 더는 대륙 서쪽 바다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한때 두렵고 위대했던 이름은 세월이 지날수록 흩어졌다. 지금은 어린아이를 재울 때 흘러나오는 옛이야기, 뱃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오래된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름이었다. 서부 연합 왕국을 구성하는 가장 오래된 왕국의 건국 신화보다도 오래된 시절의 일. 설마 그를 섬기는 자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어버이의 심장이라니! 깊은 바다의 폭군, 그의 심장을 말하는 겁니까?”
델피노가 깜짝 놀라서 물어보자 토마스 마이어는 그를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
“그렇다네, 성황청의 사제. 이제는 누구도 경배하지 않는 위대한 분의 심장이지.”
그는 짙은 회한과 분노를 담아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그분의 심장을 찾아다녔지. 때로는 거의 손에 넣을 뻔했어. 망할 칼리 호킨스가 그것을 훔쳐서 자신만이 아는 곳에 숨겨두지만 않았다면.”
그 말에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카일에게 꽂혔다. 해적 칼리 호킨스의 후손이라던 그는 토마스 마이어의 뒤쪽에서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당신은 카일이 자기 아들이나 손자라고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
토마스 마이어가 껄껄 웃었다.
“그래, 그렇지. 나에게는 자식도 손자도 없으니까.”
그는 칼리 호킨스의 후손을 찾아다녔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겨우 찾은 것이 카일이라고. “언젠가 칼리 호킨스의 보물을 찾으려면 그와 가까운 피가 필요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저 아이를 보호했을 뿐이야.”
토마스 마이어의 눈에서는 광기와 닮은 빛이 번뜩였다. 그건 한이었고, 집착이었으며, 희망이었다.
“칼리 호킨스가 모았다는 다른 보물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러나 어버이의 심장만큼은 우리가 가져야겠다.”
“깊은 바다의 폭군을 부활시키려는 것입니까? 그 사악한 신을?”
델피노의 물음에 토마스 마이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말조심하게, 사제. 기록은 언제나 승자의 것이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일 것이라 믿지 말라고.”
그렇게 쏘아붙인 토마스 마이어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레인에게 말했다. “이제 궁금증은 해결되셨소? 우리는 끝까지 어버이의 심장을 추적할 것이오. 그 일로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소.”
한때나마 동료였던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옛 추억은 점점 흐려졌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은 대답을 보류하고 선실로 돌아오자마자 델피노가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이 답했다.
“굽힐 수밖에 없소. 이 배는 저들의 배고, 바다는 그들의 영역이니까. 단순히 강함이라면 우리가 더 강하겠지만 그것만 가지고 적대할 수는 없소.”
“하지만 정말로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남긴 심장이 있다면, 그것으로 그를 부활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건 웬만한 대악마가 소환된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아이반은 그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가 왜 이런 비밀을 쉽게 털어놓았겠소? 계속 숨기고 있어도 될 텐데.”
“그건······.”
델피노가 말꼬리를 흐렸다.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토마스 마이어의 말은 협박이었다. 만약 당신들이 심장을 들고 가버린다면 끝까지 따라가서 빼앗고 말 거라는 뜻.
“그저 말로만 하는 협박은 아니겠지. 적어도 귀찮게 만들 정도의 힘은 있을 거요.”
그런 것보다 아이반은 다른 쪽이 더 신경 쓰였다. 솔직히 깊은 바다의 폭군이니, 그 심장이니 하는 것은 잘 모르겠는데 그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보주, 옛 신의 신성과 바다에 대한 지배력이 담긴 보물. 그 말을 듣자마자 이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다의 보주? 그거 해적들 사이에서나 유명한 헛소리 아니었어?”
지니고만 있어도 거친 바다가 평온해지고, 반대로 잔잔한 바다에서 폭풍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전설 속의 물건. 평범한 인간이 그것을 삼키면 바다의 신이 될 수 있다는 신비로운 구슬. 아이반이 알기로 칼바람 군도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은 바다의 보주였다. 그것이 사실 악신의 심장이라는 것은 처음 들었다. 하긴, 언제는 아이반이 그런 자잘한 설정을 잘 알고 있었나. 대충 넘기고 레벨이나 올리기 바빴지. ‘근데 그건 사교 집단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쿵! 크게 배가 흔들리는 것과 함께 공간을 넘어가는 묘한 느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행은 모두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사나운 이빨이 낮게 말했다.
“던전으로 들어왔다. 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던전의 영역이 이렇게나 넓다고요? 섬을 삼키고 주변 바다까지 스며들었다니···!”
델피노가 크게 놀라 소리치고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던전 확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군. 이럴 리가 없는데······.”
그리고 아이반이 몹시 낭패한 표정을 짓자 일행이 모두 경계심을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입장할 때 점프를 뛰지 않았소.”
“···예?”
일행이 황당한 눈빛을 보내는 것을 무시하고 아이반은 선실을 뛰쳐나갔다. 갑판 위로 올라가니 선원들이 모두 당황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뒤따라 올라오던 델피노가 소리쳤다.
“하늘이···!”
분명 해가 다 떨어지지 않았을 시간인데 하늘이 어두웠다.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고 거친 바람이 불었다. 배가 휘청거리고 밀려난다.
“어디로 가는 거야! 키를 돌려!”
“안됩니다! 배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바람이 강하다고는 해도 배를 조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그게 저도 잘······.”
이리저리 고함이 들리고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그 사이 아이반은 빤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했다.
“어제 보았던 별자리와 전혀 다르군. 역시 던전으로 들어와서 그런 건가.”
아이반이 읊조리는 소리를 들은 이레인이 하늘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최근의 별자리가 아니야. 적어도 300년은 지난··· 아, 그러네. 칼리 호킨스가 활동하던 시기의 별자리겠어.”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칼리 호킨스가 활동하던 시대의 밤하늘. 그건 던전의 시점이 그때라는 뜻이었다.
“선장! 지금 항로는?”
이레인이 그렇게 외치며 다가오자 선장이 움찔했다. 아무래도 자신들의 비밀이 들키고 나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잘 모르겠소. 갑자기 다른 해역으로 넘어온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이레인은 토마스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지도를 살펴라. 칼리 호킨스의 항로와 배의 움직임이 일치해?”
토마스 마이어는 얼른 보물 지도를 펼쳐 들고 하늘과 나침반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건 그 옛날 칼리 호킨스의 항로와 같소.”
그리고 그는 애써 배를 컨트롤하려는 것을 멈췄다. 이대로 던전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침반을 바라보며 방향만 잡았다. 그리고 칼리 호킨스의 항로와 다르지 않은지만 확인했다.
“섬이 보입니다!”
견시가 소리쳤다. 갑자기 배가 엉뚱한 곳에 떨어진 것처럼 섬 역시 갑자기 나타났다. 원래 던전은 이렇게나 갑작스러웠다. 스르륵! 탁! 잔잔한 바다를 헤치고 해안가에 배가 닿았다. 이레인을 힐끔 살핀 토마스 마이어가 선장에게 말했다.
“이곳에 상륙해서 섬을 수색한다. 분명 이곳에 보물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그대로 말단 선원에게까지 전해졌다. 배를 지키고 있을 최소한의 인원만 남고 섬에 상륙하기로 했다. 휙! 아이반은 난간을 박차고 훌쩍 뛰어내렸다. 하얀 모래가 그를 반겼다. 밤하늘과 별빛이 반짝이는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언뜻 로맨틱하게 보이는 조합이었으나 아이반은 싸늘하게만 느껴졌다. 이곳이 평범한 해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해변에는 부서진 나무판자들이 널려있었다. 모두가 배의 일부였다. 좌초되고 침몰한 배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쉽게 보였다.
“마치 배들의 무덤 같군요. 시체 하나 보이지 않는데 처참합니다.”
델피노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 그 느낌이 정확했다. 선두에서 움직이던 아이반은 주변에 널브러진 배의 잔해들을 창으로 툭툭 건드렸다. 잔뜩 썩어있던 잔해들이 형태를 무너뜨리며 흩어졌다. 그렇게 모래사장을 벗어나 수풀이 무성한 곳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반은 느껴지는 어둡고 음습한 살기에 자세를 낮췄다. 킁킁! 코를 벌렁거리던 사나운 이빨이 낮게 말했다.
“비린내가 난다. 상한 생선같이 아주 역겨운 냄새다.”
아이반은 한 손으로 허리춤에 걸린 도끼를 쥐었다. 그렇게 만지작거리다가 대뜸 어디론가 집어던졌다. 쉬이익! 쿵!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도끼가 파고든 인간의 시체. 아이반은 가까이 다가가 창으로 뒤집었다. 툭! 스르르륵!
“···이미 인간의 모습은 아니군.”
피는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에 가까웠다. 피부의 일부가 각질화가 되고 일부는 촉수처럼 변해 꿈틀거렸다. 도끼가 머리를 파고들어 숨을 끊어놓았음에도 이리저리 움직이는 촉수를 보니 아주 불쾌해졌다. 인간과 두족류를 아무렇게나 붙여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자연적인 것은 아니었고 명백히 저주에 의한 변이였다. 뒤늦게 변이된 인간의 시체를 본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뻐했다.
“그분의 저주다! 그분의 심장을 탐하는 자에게 내려진 저주의 흔적이다!”
선원들은 신앙의 증거를 확인하고 소리쳤다. 자신들이 잘못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이 그렇게 소리치는 선원들을 빤히 바라보자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모두가 거칠고 강인한 바닷사람이었으나 전투를 앞둔 아이반의 사나운 기세를 견딜 수 있는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
완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날카롭게 말했다.
“닥치고 무기나 드시오. 녀석들이 오고 있으니.”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스파크를 뿜어져 나왔다. 오른쪽 눈은 황금색으로 변해 어둠을 꿰뚫어 보았다. 낙지, 개불, 해삼, 개복치, 대게. 온갖 바다 생물을 닮은 변이된 인간들이 보였다. 눈빛에 이성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살의만 남아있었다.
“젠장, 한동안 해산물은 못 먹겠군.”
낮게 욕설을 내뱉은 아이반이 손을 뻗었다. 그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창들이 허공에 떠올라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이반은 그중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비틀었다가 앞으로 쏘아 보냈다. 쉬이익! 쾅!
창이 날아간다. 앞을 가로막는 적을 모조리 꿰뚫고 사라진다. 인간의 것이라기엔 이미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린 체액이 바닥을 적셨다. 스걱! 검을 휘둘렀다. 생선 대가리와 비슷해진 머리가 허공에 날아올랐다가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를 잃은 몸이 몇 걸음을 더 움직이다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렸다. 화르륵!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몸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끈적하고 축축해 보이던 살점이 숯이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변이된 인간들을 처리하면서 아이반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잘 싸우는군.’ 다른 동료들이 날뛰고 있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생각보다 선원들의 활약이 좋았다. 변이된 인간들은 행동이 느릿하기는 했어도 기기묘묘한 방식으로 덤벼들었기에 마냥 만만하다고 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는데 어째 잘 싸우고 있었다. 평소에는 상선이었다가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깃발 바꿔 달고 해적으로 변하는 것이 일상적인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뱃사람으로 일을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또 아주 좋다고 하기에는 묘했다. 평범한 뱃사람치고는 잘 싸웠지만 깊은 바다의 폭군을 섬기는 사교 집단이라기엔 대단치 않은 느낌. 이미 사교 집단임이 들켰으니 숨기고 있던 힘이 있다면 써도 괜찮을 텐데. 하긴 항해를 하며 그동안 몇 번이나 그들을 살폈었다. 그런 힘이 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파악했을 거다. 사교 집단임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대단치 않은 힘을 가진 자들로 채웠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진짜는 이들이 아니란 뜻. 아마 정예라고 할 만한 자들이 뒤에서 몰래 따라오고 있겠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을 내뻗었다. 멀리 날아갔던 창들이 차례로 돌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차르륵!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가 더 손을 쓸 필요는 없었다. 전장은 이미 정리되고 있었으니. 대신 아이반은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는가?”
갑작스럽게 들려온 토마스 마이어의 목소리. 아이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별의 움직임. 그러나 아무래도 이곳은 낮이 없는 곳인 것 같소.”
그 말에 토마스 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회중시계를 꺼내 살피면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