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75
“그래, 하늘은 변화가 전혀 없군.”
“시간이 고정되었소. 당시의 모습이겠지. 수백 년 전, 이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오.”
던전 안은 완전히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세상이었다. 해가 떠오르지 않는 것 정도는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흘흘,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드디어 그 운명의 날에 찾아왔군.”
그 후로 몇 시간을 더 돌아다니며 주변 지리를 파악했다. 혹시 흐르는 물은 없는지, 먹을 수 있는 식량은 없는지, 야영을 할 만한 장소는 없는지. 그렇게 수색을 마친 후에 토마스 마이어가 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선원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그는 당장이라도 옛 해신의 심장을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욕심을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급할수록 천천히, 능숙하게 템포를 조절하는 모습이 과연 경험이 많은 탐험가다웠다. 그렇게 주변 수색을 마치고 배로 돌아가는 길, 아이반은 사나운 이빨에게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거친 숨소리와 구분이 되지 않는 리자드맨의 언어로 은밀하게.
“이상한 점은?”
“세 가지.”
“셋이나? 무엇이오?”
“저주받은 자들이 카일에게 반응하고 있다. 그에게 더 거칠게 덤벼들었다. 마치 흥분해서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칼리 호킨스의 피가 무슨 영향을 주고 있는 모양이군. 하긴 칼리 호킨스가 숨겨놓은 보물을 노리다 저주를 받았을 테니 그럴 수도 있지. 카일이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소. 두 번째는?”
“생각보다 카일에 대한 대접이 좋다. 그저 피가 필요해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나쁘지 않군. 마지막은?”
지금까지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반 역시 어느 정도 깨닫고 있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세 번째는 무엇일까? 사나운 이빨이 흘깃 토마스 마이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진한 약품의 냄새로 가려져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조금 전에 상대한 녀석들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저주받아서 몸이 변이한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썩은 생선 비린내.”
아이반은 무심코 토마스 마이어를 바라보려다가 그것을 참아내고 사나운 이빨에게 되물었다.
“확실하오? 그건······.”
“저 남자의 몸에 그 냄새가 배어있다. 단순히 몸에 묻은 것이 아니라 같은 냄새가 흘러나온다.”
토마스 마이어의 몸에서 같은 냄새가 흘러나온다고? 혹시 그도 깊은 바다의 폭군에게 저주를 받아 몸이 변이되고 있나? 그를 숭배하고 있으면서? 그래서 약품으로 진행을 막고 있는 건가? 혹시 모르지, 그가 광신도라서 해신의 저주조차 신이 주는 축복으로 여기고 있을 수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왜 저주를 받은 걸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던 아이반이 문득 힘이 빠져서 심드렁해졌다. ‘씨부럴 알 게 뭐야? 누구는 성흔이라면서 눈을 뺏어가기도 하던데.’ 성격이 아주 지랄 맞은 신들이 넘쳐났다. 산 제물을 즐기던 오래된 신이라니 심심했나 보지. 그들의 행동을 억지로 이해하려는 것이 잘못된 일인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토마스 마이어의 육신이 변이 중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어떤 변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동료들과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뭐? 토마스 마이어가 저주받았을지도 모른다고?”
곰방대로 연초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던 이레인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사나운 이빨이 맡은 냄새로는 그렇소.”
아이반의 말에 사나운 이빨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약품 냄새 너머에 분명 그러했다. 저주받아서 몸이 변해버린 해산물 인간들과 비슷한 냄새였다.”
해산물 인간이라고 표현을 하니 왠지 식욕이 딱 떨어져 버린 이레인은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마저 치우고 고민에 잠겼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내렸다는 저주는 단순히 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변질시키는 힘이야. 하지만 나는 그의 영혼이 인간을 벗어날 정도로 바뀌었다는 느낌은 못 받았어.”
이레인은 엘프였다. 정신체의 특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요정족. 겉으로 보이는 외형보다 대상의 본질을 살피는 것에 더욱 특화되어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가 깨닫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기 위해 외부로 뻗은 정신을 닫았다고는 해도 보통의 인간보다는 훨씬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데.
“당신 눈에는 뭔가 보이지 않아?”
이레인은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한 번 오딘이 뺏어갔다가 되찾은 그의 오른쪽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 쪽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 정도만 확인했소. 나는 그것이 그가 숨기고 있는 힘인 줄 알았는······.”
말을 하던 아이반의 몸이 뒤흔들렸다. 아니, 타고 있던 배와 공간까지 크게 출렁거렸다. 챙!
“뭔가 이상하다!”
사나운 이빨이 검을 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실은 똑같았고, 무엇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이 이상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둘러 선실을 벗어나 갑판으로 올라가며 아이반이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아이반은 차마 끝까지 말을 다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이상했다.
“출항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는데 배가 바다 한가운데라, 어찌 된 일이지?”
이레인은 힐끗 조타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필사적으로 배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번 경험한 일이었다. 스스슥! 알아서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던 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섬에 도착했다. 그 역시 익숙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눈에 마력을 집중하고 해변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이었다.
“···다시 돌아왔군.”
선장을 바라보자 크게 놀란 눈빛이었다. 다른 선원들 역시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모두가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것 같았다. 아이반은 난간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발에 닿는 모래의 감촉까지 똑같았다. 탁! 아이반의 뒤를 이어 떨어져 내린 사나운 이빨이 말했다.
“시간이 되감겼다!”
그 말을 날 듯이 사뿐하게 내려온 이레인이 부인했다.
“시간이 되감긴 것은 아니야. 그런 초월적인 일을 이렇게나 아무렇지 않게 할 수는 없지. 그냥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거야.”
이 던전은 수백 년 전, 어떤 한 시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세상을 위협하는 이물질이라고 판단해 밖으로 밀어내고 또다시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다. 푸드득! 아이반의 그림자에서부터 두 마리 까마귀가 나타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후긴과 무닌의 시야를 확인한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완전히 똑같군. 우리가 죽였던 녀석들의 시체도 없어.”
다른 사람들은 크게 당황해서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판단이 되지 않는 듯했지만 아이반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그는 이런 형태의 던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피와 땀을 흘리며 몸으로 부딪치는 대신 의자에 앉아서 손가락을 까딱하는 걸로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타임 어택, 정해진 시간 안에 공략을 끝마쳐야만 하는 던전. 아이반은 주변에 널려있는 배의 파편들을 가리켰다. 누군가 이곳에 도전했다가 침몰하고 좌초된 흔적.
“재수 없는 선배들의 모습이오. 우리가 만약 이 던전을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맞이하게 될 결과겠지.”
아이반은 토마스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다른 선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와중에도 토마스 마이어와 카일은 덤덤하게 그물 사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 동요하지 않는군. 이런 일이 익숙한 모양이오?”
아이반이 떠보듯 물었으나 토마스 마이어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넘겼다.
“흘흘, 나는 평생 보물을 찾아다닌 탐험가였어. 겨우 이런 것에 당황했으면 지금껏 살아있을 수 있었겠나?”
함께 행동하고는 있으나 영 믿을 수가 없는 자였다. 아이반은 화제를 돌렸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상륙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소?”
딸칵! 회중시계를 꺼낸 토마스 마이어가 대답했다.
“···대략 열두 시간.”
“그 안에 던전을 해결해야 한다니, 제법 빡빡하군.”
주변 탐색을 끝내고 한 번에 나아가면 공략이 가능할까? 몇 번이나 도전해야 성공할 수가 있지? 도전 횟수에 제한이 있나? 아이반이 고민을 하고 있으니 토마스 마이어가 말했다.
“조금 기다려보지. 그동안 말은 안했지만 이제 곧 이곳으로······.”
“당신들이 숨기고 있던 최정예 전투원들이 도착한다고?”
“알고 있었나? 눈치가 빠르군.”
“우리가 깽판을 치는 것을 막아내든, 우리 뒤통수를 치든 지금 당신들의 힘으로는 어려우니까. 그런데 가능하겠소?”
토마스 마이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뜻인가?”
“당신이 출발을 서두르면서 말했잖소. 이런 일은 빠르게 해치워야 벌레가 붙지 않는다고. 그건 혹시나 눈치를 챌 수 있는 누군가를 의식했기 때문일 텐데.”
던전의 영역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져 있는 이유, 아이반이 기억하고 있는 바다의 보주와 그 주인. 과연 여유를 부릴 시간이 있을까?
“해적들이 움직였소.”
서쪽 바다의 무법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했다.
후긴과 무닌. 아이반이 하늘로 날려 보낸 까마귀 정령들의 시야에 낯선 배들이 들어왔다. 파도를 가르고 섬의 다른 해변에 도착하는 선박들. 대놓고 졸리 로저를 걸어놓은 배는 없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에서 알 수 있었다. 모두가 해적이었다.
“많기도 많군. 모두가 한 패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이반은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토마스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벌레를 피한다더니, 아주 바글바글해. 어디 광고라도 한 모양이오?”
아이반은 그렇게 토마스 마이어에게 쏘아붙였지만 사실 정말로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해적들이 지나치게 빨리 움직였다. 이건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이 아니라 다른 단서가 있었다고 봐야했다. 원래부터 바다의 보주는 해적들 사이에서 유명한 전설이니까. 수백 년이 넘게 조용히 숨겨져 있다가 이번에 던전화가 된 것이 문제겠지.
“저들은 우리보다 늦게 이곳에 도착했으니 시간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거요. 그게 반복된다는 것도 알 리가 없고.”
아이반은 허리춤의 매달린 무기들을 다시 한번 단단히 동여맸다. 장검 하나, 투척용 단검 두 개, 역시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도끼.
“설마 해적들이 이곳에 관광하러 오지는 않았겠지. 저들이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지금, 먼저 공격해서 수를 줄여야만 하오.”
던전의 법칙에 묶여 배를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바다에서 싸운다면 크게 불리했지만 섬에서라면 밀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저들도 하나의 무리는 아니었으니 하나씩 끊어먹는다면 문제가 없겠지. 아이반이 바라보자 토마스 마이어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
일행은 반으로 나뉘었다. 일부는 배를 지키고, 일부는 공격하기 위해 움직였다.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은 배를 지키는 쪽, 아이반과 이레인은 해적들을 공격하는 쪽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델피노가 그리 말하면서 슬쩍 토마스 마이어와 카일을 바라보았다. 둘은 공격하는 쪽에 붙었다. 혹시 모를 유적 탐색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영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후긴과 무닌이 밝혀주는 시야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숲을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것과는 달랐다.
건장한 선원들조차 이마에 땀이 삐질 흘러나올 정도의 속도. ‘···하지만 토마스 마이어는 잘 따라오는군.’ 첫 만남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는 것이 우스울 만큼 잘 달리고 있었다. 노인의 기력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