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79
그게 세월이 흘러 토르와 오딘으로 바뀌었다지. 어쩌면 티르가 노르드 신화의 주신 자리에서 밀려난 것은 그만큼 음습하거나 치밀하지 못해서일지도 몰랐다. 날뛰는 펜리르를 붙잡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오른쪽 팔을 내놓는 모습을 보라.
그 이유나 과정이야 어쨌든 희생을 자처한 셈이었다. 배신과 협잡, 음모와 폭력이 미덕으로 통하는 아스가르드에서 쉽게 보기 힘든 미담이었다.
그래, 분명 티르가 최고신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토르와 오딘이 뒤통수를 쳤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토르, 오딘! 이 더러운 자식들!’ 아이반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에 항의하듯 스파크가 튀기고 바람이 불었다.
치지직! 휘이잉! 누군가의 억울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옆에서 배를 부여잡고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땅을 치며 웃던 로키가 아이반에게 선물을 내려주었다.
화르륵! 갑자기 아이반의 오른쪽 손등에서 불길이 치솟았다가 사라졌다.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무슨 나침반 같은 형상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건 또 뭔 장난이야?’ 남의 몸에 낙서라니, 뭔 짓이지? 아이반이 그렇게 삐딱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손등에 새겨진 화살표 무늬가 스르륵 움직였다.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정말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양이다.
“이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한 번 이걸 따라서 움직······.”
말을 하던 아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이레인이 어딘가 복잡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앞에는 화살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 토마스 마이어의 시체가 있었다. 아이반이 해신의 화신과 싸우는 동안 그들도 상당히 격렬하게 맞붙은 모양이었다.
“뭐, 왜?”
이레인이 아이반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어느새 평소와 똑같이 되돌아와 있었다. 심드렁한 표정, 몽환적이고 나른한 눈동자, 무심한 듯한 얼굴. 치익! 그녀는 입에 곰방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시고 연기를 내뱉었다. 복잡한 감정과 옛 추억은 그렇게 연기처럼 흘려보낸 듯했다.
“···이 화살표를 따라가는 건 어떨까 싶었소.”
“뭐야, 그거. 언제 생겼어?”
“장난기 많은 신의 선물이라는군.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또 무시하기는 그래서.”
“신의 선물이라면 뭔가 있겠지. 한번 움직여보자고. 어느 쪽이야?”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남긴 심장, 그러니까 바다의 보주는 아이반과 델피노가 힘을 합쳐 봉인해버렸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이대로 돌아가면 소득이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힘을 쓴 보람이 있으려면 적어도 금화와 보석 정도는 얻어야만 했다. 보물을 찾으라고 길잡이로 데려왔던 자들이 광기에 눈이 뒤집어져서 다 죽여 버렸으니 로키의 화살표를 따라갈 수밖에. 원래 노르드 신화에서 로키는 이리저리 보물을 잘 찾는 신이었다.
아예 헛걸음하지는 않으리라.
“서두릅시다. 여기까지 왔으면 챙길 것은 챙겨야지.”
아이반은 힐끗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같은 시간을 반복하며 고정되어있던 하늘이 깨지고 서서히 태양이 떠올랐다.
섬을 뒤덮고 있던 던전이 무너지고 있다는 뜻. 던전핵이었던 해신의 심장을 챙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키의 화살이 가리키는 곳은 섬 중심에 숨겨진 동굴이었다.
원래는 수많은 변이체가 지키고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모두 쓰러져있었다. 던전을 유지하던 마력이 끊겼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니 나무 상자 서너 개 분량의 보물이 나타났다.
은제 식기와 화려하게 장식된 무기, 은화 한 무더기와 금화 한 주머니.
“뭔가 애매한데? 대박이라면 대박이지만 칼리 호킨스가 숨겼다는 보물치고는 너무 소박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레인이 김이 팍 새어버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물찾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해놓고 꽤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이정도면 나쁘지 않지. 보석이 썩 훌륭한 물건이니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을 거요. 거마비 정도는 벌었군.”
보물을 인벤토리에 쓸어 담던 아이반은 문득 왼쪽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로키의 화살표가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뭐가 더 있다고?’ 눈에 보이는 보물은 이게 전부였다. 혹시 숨겨진 방이라도 있나 싶어서 화살표를 따라 주변을 둘러봤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낡은 허리띠를 가리키고 있었다.
“으음······.”
주변에 수많은 보물이 있었는데 겨우 이런 낡은 허리띠라고? 로키가 가리킬만한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한 모양이었다. 해적 중에 누가 여기에 자기 허리띠를 두고 간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게 대체 뭐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허리띠를 주워 올렸지만 딱히 대단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게 정말 보물이긴 한 걸까? 그때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지혜의 눈이 멋대로 움직이며 허리띠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아이반은 이 허리띠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메긴기요르드(Megingjorð), 뜻은 힘의 허리띠. 착용자의 힘을 무조건 두 배로 올려주는 마법의 허리띠. 아이반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토르의 허리띠가 여기서 왜 나와?’
치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천둥신이 민망한 듯 껄껄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해적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해신의 화신이 바다를 들어 올렸던 섬의 동쪽에 있던 해적은 완전히 전멸이었다. 배도 완전히 부서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고. 그러나 반대쪽은 비교적 피해가 덜했다. 멀쩡하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다. 일행은 어찌어찌 운 좋게 살아남은 해적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배를 타고 대륙 서부 최대의 항구도시 가스핀으로 향했다. 반항하는 해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얼마나 인상적인지 깡이 남다른 해적들마저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바다가 솟아오르고 땅이 갈라지는 신화적인 전투였다. 그 치열한 싸움의 승자가 앞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적들이 두려움에 질리는 게 당연했다.
“으흠······.”
델피노의 표정이 굳어지고 불편한 신음을 흘리자 해적들이 화들짝 놀라 행동이 빨라졌다. 혹시 자신들이 굼뜨게 움직여서 불쾌해진 것이라 여긴 듯했다. 물론 델피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니라 지독한 뱃멀미 때문이었다.
델피노가 선실로 들어가 쓰러지듯 몸을 누이고, 사나운 이빨이 그 옆을 지키는 동안 아이반은 갑판 한쪽 구석에 앉아 낡은 금속 허리띠를 천으로 닦았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메긴기요르드, 힘의 허리띠. 토르의 것으로 유명한 신화적인 장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진품일 리가 없었다.
비록 토르가 얼빠진 것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설마 자신의 장비를 이런 곳에 흘리고 다닐 리가······. ‘···그럴 법한데?’ 노르드 신화에는 결혼을 하겠다고 자기 검을 팔아먹은 덜떨어진 신도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토르가 술 퍼마시다가 이상한 곳에 흘리고 다녔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기는 했다.
아이반은 몹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었다.
‘진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장비라면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 토르가 잠깐 빌려준 묠니르를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팔이 시커멓게 타버렸었다. 심지어 아스가르드에 있는 본체도 아니고 지상에 강림한 화신체인데도. 묠니르가 원래 그런 물건이라 좀 요란스럽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신의 물건이 이렇게나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메긴기요르드, 토르가 가지고 있는 힘의 허리띠가 아니라 그것을 본떠서 만든 물건이리라.
아이반은 허리띠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신성이 깃들어 있지 않을 뿐 완성도만 본다면 정말 토르의 물건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비록 오래되고 낡아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런 물건을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자신에게 황금 멧돼지 갑옷을 만들어주었던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이 떠올랐다.
그는 대대로 난쟁이의 기술을 이어왔다고 했다. 혹시 그의 선조가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어. 난쟁이의 솜씨가 아니라면 쉽게 만들기는 어렵······.’ 문득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꺼냈다. 이미 무기의 수명이 다해 부서진 녀석이 얕게 떨고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아이반은 깨달았다. 이 녀석이 마지막으로 힘을 토해서 가리킨 게 이 메긴기요르드라는 것을. 두 개를 놓고 열심히 살펴본 아이반은 곧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제작자가 같다는 뜻이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
이레인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한껏 귀찮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일행 중에 유일하게 뱃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그녀가 해적들을 다그치며 일을 시키고 있었는데 적당히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내 창과 같은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소.”
“그래? 신기한 일이네. 아니, 창이 가리키는 곳으로 왔으니 필연인가?”
“뭐, 그렇지.”
반가우면서도 아쉬운 일이었다. 살아있다면 수리를 맡겨볼 수도 있으련만, 수백 년도 지난 유물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 아이반이 그렇게 내뱉으니 이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오랜 세월이 지났소. 헛된 기대일 것이오.”
“겨우 몇백 년이라면서? 그러면 혹시 모르는 일이지.”
그 말에 아이반은 문득 깨달았다. 서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하긴, 엘프에게 몇백 년이 아주 먼 과거는 아닐 터였다. 어쩌면 그때도 이레인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올 때는 날씨가 개판이었는데, 지금은 적당하네.”
이레인이 문득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긴, 제물을 그렇게나 받아먹었으니 조용해야지.”
짙은 안개도 없고, 폭풍 같은 바람과 비도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적당히 일렁이는 파도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근처에 가기만 해도 난파의 위험이 있다는 칼바람 군도 주변 해역답지 않은 모습. 그건 아마도 던전이 해결되고 섬에 깃들어 있던 해신의 마력이 흩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남긴 심장을 들고 있으니 바다가 거칠지 않고 얌전할 수밖에. 해신의 심장, 그러니까 바다의 보주에는 깊은 바다의 폭군이 가지고 있던 바다에 대한 지배권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아주 작은 파편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편안히 항해를 계속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괜히 해적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던 것이 아닌 셈이다. 이레인은 아이반이 쥐고 있는 바다의 보주를 빤히 바라보다가 곰방대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내뿜는 연기가 바다로 흩어졌다. 사나운 악몽 같던 항해가 그렇게 끝이 났다.
일행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익숙하지 않은 배를 타고 돌아다녔더니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단순히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지친 것이다. 사방이 온통 물인 곳에서 며칠을 계속 떠돈다는 것이 바다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바다라고 좋아하던 델피노와 사나운 이빨 역시 지금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은 지독한 뱃멀미에 시달려서, 다른 한 명은 그 기간 마음 편히 씻지 못했다는 것이 컸다.
“물이 그렇게나 많은데 시원하게 씻을 수가 없다니,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찝찝한 몸을 씻어내고 싶은 모양이다.
민물과 달리 바다는 소금기가 있었다. 그걸 계속 마주하고 있다 보니 온몸이 텁텁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마법이나 물의 정령을 이용해 몸을 씻는 거야 청결하게 씻지만, 온몸을 물에 푹 담그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나운 이빨에게는 부족하기만 했다. 항해 중간에 심심하다고 바다에 뛰어들어 고래를 토막 칠 때만 해도 좋았지.
“저는 사교도에 대해 알리기 위해 신전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한동안 말없이 입에 음식물을 밀어 넣던 델피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뱃멀미 때문에 제대로 고생하던 그는 육지에 내리자마자 천국을 발견한 것 같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굶주린 속을 채워 넣더니 이제야 살만한 모양이다.
“그 전에 해신의 심장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그건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물건인데······.”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요정의 숲으로 보낼까 하오. 엘프라면 이것을 잘 정화해서 사용할 수 있겠지.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값을 잘 쳐주기도 하고 말이오.”
그 말에 델피노의 어깨가 묘하게 처졌다. 아이반의 선택을 납득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옛날 서쪽 바다를 지배하던 해신의 심장이라니,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 그것이 성황청에 얼마나 큰 힘이 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대륙 서부에 바다와 근접한 지역들의 민심을 다스리는 것에도 좋았고, 깊은 바다의 폭군과 같은 옛 바다의 신들이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가장 강력한 물의 신이 된 뤼안의 사제들이 본다면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그러나 비록 뤼안 교단이 성황청을 이루는 아홉 교단 중 하나라고는 해도 델피노가 나서서 챙겨줄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성황청 소속이라도 교단이 달랐으니 거리감이 있었다.
“뭐,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처리하는 걸로 알겠······.”
그때 이레인이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