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
비록 자신이 원했던 신이 아니라 이교도의 신이라 해도.
– 또오다아아시이이어어두움으으로오오! 화르륵! 저주받은 수도자의 몸이 불타오르고, 일행들을 공격하던 시체와 원혼마저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서쪽에서 히드라 새끼를 잡은 이후로 오랜만에 꽤 만족할만한 경험치가 차올랐다.
‘그나저나 언제 신도의 목숨을 뺏어갈지 모르는 사악한 신과 악마를 섬기던 타락한 수도자라니. 잘 어울리는데 쟤는 왜 죽는 거 윽!’ 속으로 한껏 이죽거리던 아이반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노려다보았다.
까불지말라는 듯 신성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온몸을 적시는 탈력감에 바닥에 주저앉은 아이반이 일행들에게 말했다.
“젠장, 여기서 잠깐만 쉬다가야겠소.”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받은 수도자를 해치운 뒤로부터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질이 좋아졌다.
사령술을 사용하는 스켈레톤 메이지, 나름의 무장을 갖춘 스켈레톤 워리어, 강화된 좀비와 구울.
말하자면 중간 보스 이후에 등장하는 정예몹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이전에 등장했던 녀석들보다 강한 녀석들이었다. 몸이 튼튼하고 움직임이 훨씬 빠르고 매끄러웠다. 그러나 아이반은 오히려 상대하기 편하다고 느꼈다. 나타나는 숫자가 줄어들었기에 칼질을 덜 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제대로 된 광역기가 없었기에 차라리 숫자로 밀어붙이는 쪽이 까다로웠다. ‘앞으로는 광역기도 신경을 써야겠어.
당장 쓸 만한 게 뭐가 있지?’ 이 빌어먹을 세계에 떨어지고 아이반은 꽤나 힘을 쌓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효율적으로 강해지는 방법은 아니었다.
중구난방으로 스킬을 찍어가며 범용성은 넓혔을지언정 그 어느 분야도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잡캐.
그것은 그동안 아이반의 목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효율적으로 강해지고, 쉽게 적을 해치우는 것보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가 있도록 스펙을 쌓는 것이 우선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적의 육성루트로 한 길만 파고들었으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때는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었다. 미래의 강함보다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울 뿐이다.
“젠장, 이게 던전인가? 더럽게 빡세군. 아주 뒤져버리겠소. 으윽!”
랄프가 허벅지에 성수와 포션을 흘려 넣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옆쪽에서 치고 들어온 몬스터를 상대하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함정에 꿰뚫린 것이다. 허벅지가 크게 찢어지고 피를 많이 쏟았다. 꽤 질 좋은 포션의 힘으로 상처가 지글지글 아물고 있었지만 안색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어때, 괜찮겠소?”
아이반이 묻자 랄프는 몇 번 자신의 다리를 굽혔다 펴고, 제자리에 뛰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보다 심각한 상처는 아니오. 좀 뻐근하기는 한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반걸음만 더 움직였으면 아예 다리가 잘려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이정도면 감지덕지지. 아주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싸우기 불편한 정도는 아니오.”
부상을 입은 것은 랄프만이 아니었다.
에민은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다가 내상을 입은 상태고, 율리아는 한쪽 어깨갑옷이 부서져 나가며 팔을 다쳤다. 스벤의 경우에는 옆구리 쪽에 부상이 있고.
멀쩡한 것은 아이반 뿐이었다.
그나마 아이반도 자잘한 생채기 따위는 피할 수가 없었고, 스켈레톤의 뼛가루와 좀비들의 썩은 살점 따위로 지저분해져서 겉은 아주 엉망이었지만. ‘이러다 칼 맞아 죽기 전에 먼저 병에 걸려서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툭툭! 대충 겉에 묻은 오물을 털어낸 아이반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보스룸이 코앞이었다.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하룻밤 쉬어갈 타이밍이다.
지금 일행이 느끼는 피로는 적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면서 숲을 통과하고,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던전 속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크게 신경을 갉아먹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 숨겨진 함정, 어두운 시야.
베테랑 용병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평생 마탑에서 연구만 하던 에민이 느끼는 피로감은 더욱 컸다.
탁, 타다닥!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장작더미가 타오르고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방금 전까지 시체들과 싸우느라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것이 모닥불이 가진 매력이었다.
“오늘밤은 형편없는 스튜라도 만들어먹어야겠소. 망할, 몬스터 놈들이 오려면 오라지.”
스벤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차피 던전 내의 몬스터는 대략 다 쓸어버린 상태였다. 남은 것은 보스룸 안에 있을 녀석 정도.
게다가 언데드 뿐이라면 여기서 음식냄새를 풍기고 말고가 뭔 소용이겠나. 오죽하면 그리 나서지 않던 율리아가 손수 모닥불 위에 반합을 걸고 조리를 시작했다.
물을 붓고 일행들이 가진 식량을 조금씩 모아서 다 때려 넣은 용병스타일 캠핑요리.
곡물 가루, 견과류, 육포 따위를 아무렇게나 집어넣어 끓이기만 한 요리는 결코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는 맛이었으나 아주 최악은 아니었다.
그래도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니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후루룩 ‘뜨끈한 국밥에 깍두기 하나 얹어서 먹고 싶다.’ 전체적으로 서양풍의 분위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곳이 진짜 서양은 아니었다.
찾아보면 국밥이나 김치 비슷한 것도 없지는 않았다. ‘마을로 돌아가면 꼭 먹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율리아가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기 .”
“무슨 일이시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아까 그대가 사용한 기술은 천둥걸음으로 보이는데 . 아니, 확실하게 천둥걸음이었어. 그대도 우리 무파의 일원이었나?”
몸에서 전기를 뿜어대며 빠르게 이동하는 보법, 천둥걸음.
그건 무파 썬더울프의 기본 보법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이기도 했다.
썬더울프의 기술은 모두 보법 천둥걸음을 바탕으로 펼치는 것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보니 익히게 되었소. 예전에 만난 썬더울프 수련자가 꽤나 인상적이었거든.”
” 마티아스 선배가 그대에게 천둥걸음을 전수했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소. 그냥 그가 사용하는 것을 보고 어설프게 따라하다 보니 되더군. 그 이후로 노력을 좀 하기도 했고.”
그 말에 율리아는 몹시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저 겉으로 보기만 하고 따라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천둥걸음이 그렇게 쉽게 익힐 수가 있는 것이 아닌데 .”
“천둥걸음이 문외비밀은 아니지 않소? 마티아스도 그저 웃고는 말던데.”
무투가들은 단지 사람을 가릴 뿐 가르침을 나누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고행자들이니까. 다만 대부분의 경우 알려줘도 따라하지 못할 뿐이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특유의 수행법으로 십수 년 이상 단련을 거듭해야만 겨우 따라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
그쯤 되면 사실 외인이라기보다는 무투가이자 무파의 수련자라고 불러야 한다.
물론 아이반은 십수 년 동안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스킬 포인트를 사용했을 뿐이니까.
“그건 그렇지만 .”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율리아가 이내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천둥걸음을 그 정도 수준으로 익혔다면 그대는 이미 썬더울프의 수련자다. 비록 무투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투의 정신은 그대와 함께 하고 있으니.”
척! 율리아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겠군. 무파 썬더울프의 수련자이자 뇌랑권(雷狼拳)의 계승 자, 율리아 밀러. 새로운 수련자를 환영한다.”
” 아이반 에시르손. 천둥걸음만을 익혔소.”
“그대에 대해 본단에 알리겠다. 만약 그대에게 불합리한 위험이 닥친다면 썬더울프는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다.”
무파 썬더울프에는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었다. 그저 먼저 수련을 시작한 사람이 선배, 나중에 시작한 사람이 후배일 뿐이다. 무투가는 개인의 단련을 중시하며 극도로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누군가의 앞길을 막는 불합리한 위험에 대해서는 함께 움직일 줄 아는 끈끈한 동료애 역시 가지고 있었다.
“하, 여기서 이렇게나 강한 후배를 만날 줄이야.”
계속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던 율리아가 시원스럽게 미소를 지으니 순간 던전이 화사하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어딜 가나 시선을 잡아 끌만한 미인이었다.
“미모의 선배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하하, 딱딱하게 보였는데 그대도 농담을 할 줄 아는군.”
“누가 할 소리를.”
일행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곧 던전 공략도 마무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오면서 은제 식기니, 금화 주머니, 사기에 물든 장비들까지 몇 개쯤 발견해서 챙겨놓았다. 힘들어도 기분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어서 자지. 던전을 마무리하려면 체력을 회복해야해.”
돌더미로 양쪽 복도를 막고 각자 자리를 잡아 바닥에 누웠다. 불침번은 역시 에민을 제외한 네 명이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씩. 초번을 맡은 아이반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에 신성력을 담아 성호를 그려 넣었다. 대단한 결계술이나 보호막을 사용할 줄은 모르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자잘한 사기(邪氣)의 움직임은 막아낼 수가 있었다. 혹시나 보스룸 안에 묶여있을 악마 녀석이 잠자고 있을 때 수작질을 부릴지도 몰랐다. 아예 보스룸을 뛰쳐나와 덤벼올지도 모르고. 별 도움은 안 되더라도 하지 않 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자신의 차례를 마치고 율리아를 깨워 불침번을 넘겨준 아이반. 그는 자신의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지는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싶어서. 다행인지 별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반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너무 조용하게 넘어간 게 이상하군.
아니면 .’ 한참을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아이반은 얼른 표정을 지우고 방금 깬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은 어제 끓였던 잡탕 국물 요리에 재료를 조금 더 넣어서 해결하고 각자 장비를 다시 정비했다.
두두둥! 청동으로 만들어진 듯 묵직한 문을 열자 짙은 사기가 밖으로 퍼져 나왔다. 온몸이 오싹할 정도의 사악한 기운, 죽음의 향기.
일렁거리는 불완전한 데몬 게이트 앞에서 해골을 뒤집어쓴 악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녀석이 바로 숲의 이상을 만들어낸 원인이었다. 그 옛날 타락한 수도자들이 소환하려고 했던 악마, 썩어가는 손아귀 고오오오- 킬킬킬킬- 밀폐된 지하에서 갑자기 바람이 분다.
사악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썩어가는 손아귀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 드디어 제물이 찾아왔구나! 슈우욱! 쾅!
“윽!”
바닥을 뚫고 시체골렘이 몸을 일으켰다.
인간의 몸을 아무렇게나 이어 붙여 그럴듯하게 몸을 만들어낸 3미터짜리 괴물.
녀석이 주먹을 휘두르자 탱커인 랄프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나갔다.
“젠장! 힘이 너무 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