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0
“바다의 권능과 숲은 그리 어울리지는 않아. 다른 거래 상대가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 말에 델피노와 아이반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문득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외로군. 바다의 보주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닐 텐데. 정말 엘프는 관심이 없소?”
신성이 일부나마 담겨있는 물건은 흔치 않았다. 이건 성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신조차 아니라고 까이는 옛 해신의 것이라고는 해도 그 희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성의 조각과 바다를 지배하는 권능의 일부가 깃든 물건, 언제든 해신이 손을 뻗어 정신을 오염시킨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아니라면 대륙을 뒤흔들만한 보물이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레인이 손을 내저었다.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당신이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텐데?”
지금 엘프의 최우선 목표는 세계수의 유지였다. 세계수가 스스로 예언한 파멸을 막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즉, 이레인은 해신의 심장을 포기하는 것이 세계수의 비극적인 결말을 지우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는 뜻이다.
“무슨 사건이 벌어졌군. 무슨 일이오?”
아이반의 물음에 이레인이 얇은 양피지를 흔들었다. 조금 전 새가 날아와 전해준 따끈따끈한 소식이었다.
“대륙의 뒤틀림이 커지고 있어. 우리가 얼마 전에 다녀온 곳처럼 던전이 여기저기서 새롭게 튀어나오고 세상이 요동치고 있어.”
잠깐이나마 악마가 소환되었을 정도였다. 차원 방벽이 예전처럼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다만 그 정도가 아이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큰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이오?”
“동서남북, 어디를 들을래?”
“젠장, 완전히 개판인가 보군.”
어디서는 악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어디서는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움직여 영지를 몇 개나 쓸어버렸다고 했다. 또 오래된 옛 신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했다. 하나하나가 대륙을 뒤흔들만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몇 개나 연속해서 벌어지고 있으니 어디 하나 조용한 곳이 없었다.
“해신의 심장을 삼키기보다 그것을 성황청에 넘겨서 대륙을 안정화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 세계수의 판단이야. 해신의 심장을 성황청이 가지고 있으면 깊은 바다의 폭군이 깨어나는 시간을 뒤로 미룰 수 있으니까.”
“당장 코앞이 문제란 말이군. 세계수도 여유가 없기는 없는 모양이야.”
인상을 팍 찡그린 아이반은 힐끗 바깥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척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일행도 기척을 느낀 것인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에서 씻고 있던 사나운 이빨마저 빠르게 튀어나왔다.
“이 기척은 무엇이냐! 전투인가!”
“진정하시오. 적은 아니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으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레인이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문을 열자 세상 감정 없는 얼굴을 한 엘프가 서 있었다. 필레인 그레이우드. 요정군단의 지휘관이자 옛 요정의 피를 이은 엘프 영웅.
“이렇게 빨리 재회하게 될 줄이야. 당신이 숲을 벗어나 여기까지 오다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겠군.”
아이반의 말에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담담히 말했다.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치지직! 하하하하하! 짜릿한 스파크가 튀기고 천둥신이 환호하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 옛날, 옛 영웅들이 활약하던 시대보다도 이전의 세계. 이제 막 대륙의 생명이 태동하던 신화의 시대를 거닐던 오래된 종족들이 있었다. 태초의 드래곤, 고대 요정, 원시 거인. 하나하나가 초월자에 도달하여 신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던 존재들. 지금 세상에서는 그들을 일컬어 선주종족이라 불렀다.
태초의 드래곤은 대륙의 창조자이자 온갖 짐승의 원형이었다. 숭배자 없는 신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대륙의 토대를 만들고 다른 세계로 나아갔다고 했다.
지금의 드래곤은 그들이 자신들을 본떠서 만든 분신이었다. 그렇게 열화된 상태의 드래곤이 대륙 최강의 생물로 군림할 정도니 진실로 위대한 이들이었다. 고대 요정은 자연의 화신이었다.
그들은 신격과 비슷한 태생을 지니고 있었으나 정신체를 벗어나 스스로 육신을 만들고 물질계에 정착하였다. 오랜 세월 대륙의 생명을 풍성하게 만들던 그들은 다시 육신을 버리고 멀고 먼 자신들의 고향을 향해 떠났고, 그들이 남긴 후손이 지금의 엘프였다.
원시 거인은 위대한 신격이자 신의 대적자였다. 끝없는 욕심과 향상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스스로 신격이 되기도 했고, 신격의 자리를 노리는 가장 강력한 대적자가 되기도 했다.
지하와 지상, 천상을 나누는 모든 것이 신격과 거인의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따라서 이 땅에 기록된 최초의 신화는 거인이 눈을 뜨는 것에서 시작했고, 마지막 거인이 눈을 감는 것으로 신화를 끝맺었다. 신들은 거인의 육신을 찢어 그것을 재료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굳이 따지면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자 옛 거인의 후손인 셈이다.
“그리하여 찬란하신 빛의 주께서 자비로운······.”
그렇게 옛 신화와 선주종족에 관해서 설명을 늘어놓던 델피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이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평소에 강론할 일이 없다 보니 오랜만이라 무심코 이야기에 취해버렸다. 그는 그것을 반성하면서 급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고맙소. 도움이 되었소.”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이반은 힐끗 필레인 그레이우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반듯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지고 숲 밖으로 나온 엘프들은 대개 감정 변화가 극적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그는 여전히 덤덤했다. 눈빛이나 표정만으로는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땅에 남은 선주종족은 몇 되지 않을 텐데, 정말로 원시 거인이 나타났다는 소리요?”
“그렇습니다. 오랜 세월 봉인되어있던 거인이 깨어나 영락한 자신의 자손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 표정을 굳혔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시 거인은 그저 덩치가 커다란 인간이 아니라 신격과 비교되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말하자면 노르드 신화의 요툰, 그리스로마 신화의 티탄. 깊은 바다의 폭군이 잠깐 깨어나려고 했던 것만으로 그 고생을 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훨씬 더했다.
격으로 따지자면 썩어가는 손아귀 수준의 악마가 소환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인이 깨어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델피노가 경악하며 소리치자 필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사건이 너무 많았습니다. 차원 방벽이 흔들린 것이 컸겠죠.”
그 말을 들으면서 아이반은 생각에 잠겼다. 도저히 상황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지금 거인이 튀어나오는 것이 맞을까?’ 사건이 워낙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니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이미 그가 알고 있던 진행과는 많은 면에서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아이반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덩치만 큰 거인들은 어떻게 처리한다고 해도 원시 거인은 쉬운 상대가 아니오. 엘프는 어찌할 생각이오?”
“요정군단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수호자들 역시 나설 준비가 되었죠. 원시 거인이 아무리 강한 상대라고 한들 오랜 봉인으로 인해 본래의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일 테니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집중하면 요정의 숲을 막을 수가 없겠지. 방비가 약해지면 언제든지 적들이 공격을 할 수 있으니.”
“···그 말이 옳습니다.”
엘프라는 종족이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하지만 그걸 모두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의 병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거인이 나타났다면 그건 엘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일을 최대한 알려서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델피노가 그리 말하자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른 쪽에도 사신이 갔습니다. 인간들의 나라, 성황청, 대수림, 피의 동맹까지.”
“피의 동맹?”
“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엘프는 극히 폐쇄적인 성향이었지만 이번 일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여러 세력에게 사신을 보내 위험을 알리고 힘을 모을 것을 요청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것이 잘 풀리지 않았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미 대륙 전역에 사건이 많이 터지고 있소. 그걸 수습하느라 바쁘다고 거절했겠지. 시간을 질질 끌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거나.”
“···맞습니다. 거인이 등장했다는 것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더군요.”
“인간, 오크, 고블린, 트롤은 물론이고 수인들까지. 수명이 길어봐야 당신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오. 옛이야기를 잘 보존한 엘프와는 달리 우리들에겐 그저 오래된 신화 속의 이야기일 뿐 현실감이 없지.”
차라리 거인이 아니라 악마였으면 반응이 달랐으리라. 그랬다면 바로 위험을 인지했겠지. 하지만 거인이 등장했다고 말해봐야 그리 와닿지 않았다.
인간들의 왕국은 신뢰의 연합을 맺고 피의 동맹과 싸우기로 했다. 그런 전쟁 상황에서, 안 그래도 이리저리 곤란한 문제가 많은데 거인을 퇴치하겠다고 병력을 파견할 리가 없었다.
아마 거인이 인간의 땅으로 진격해 영지 몇 개쯤은 갈아엎어야만 움직이겠지. 그런 우울한 전망을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부인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법을 꺼냈다.
“만약 해신의 심장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것으로 성황청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물론 그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조금 이유가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 이레인이 제안했던 것과 동일한 결론이었다. 대가를 엘프에게 받을 수 있다면 아이반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반은 힐끔 동료들의 눈빛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대가가 있다면, 받아들이겠소.”
“감사합니다. 요정의 창고가 그대들을 실망하게 하진 않을 것입니다.”
아이반과 델피노, 사나운 이빨은 필레인 그레이우드의 안내를 받아 요정의 숲으로 들어갔다. 이레인은 함께하지 않았다.
숲을 떠난 방랑자인 그녀는 자신의 사명이 흐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온 요정의 숲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저 멀리 보이는 세계수의 거대한 모습과 정령이 돌아다니는 동화적인 풍경은 질릴 수가 없었다. 그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바로 요정군단으로 복귀했다.
사실 그는 대단히 바쁜 몸이었다. 단순한 길 안내에 그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반의 일행을 대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계수는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이전보다 더욱 강인한 영혼을 하고 계시는군요.”
필레인이 떠나고 엘레나 이븐우드가 그들을 반겼다. 그녀는 역시 감정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언뜻 피곤한 기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고민이 많겠지.’ 세계수가 스스로 파멸을 예언한 시각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수의 무녀에 가까울 정도로 적합성이 높은 그녀라면 다른 엘프보다 더욱 큰 압박을 받고 있으리라.
“해신의 심장을 대가로 그대들에게 우리가 보관하고 있던 보물을 양도하겠습니다. 부디 각자 자신에게 맞는 물품을 선택하시길.”
그녀는 일행을 요정의 숲 깊은 곳에 있는 성으로 데려왔다. 이곳 지하에는 오랜 세월 엘프들이 모아온 보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몇 겹에 달하는 엄중한 경비와 복잡한 결계를 통과하고 나서야 요정의 보물창고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델피노는 언뜻 감격한 것 같기도 했다.
“드래곤의 동굴보다 드워프의 대장간, 그보다 요정의 창고라고 했죠. 그런 곳에 제가 들어왔군요.”
아이반도 익히 들어본 속담이었다. 주로 술집에서 용병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 ‘근데 그건 술 이야기가 아닌가?’ 드래곤이 모은 금은보화보다, 드워프가 만들어내는 전설적인 병장기보다 엘프가 만들어내는 술이 더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딴생각하지 말고 술이나 퍼마시다 죽자고 술꾼들이 외치는 말. 아이반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눈이 바빴다. 요정의 창고는 보통의 창고처럼 어둡고 퀴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고 산뜻했다. 금과 은을 실처럼 얇게 뽑아내어 장식했고, 천장과 바닥은 마치 유리처럼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쓰이지 않는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 들여서 장식하고 있었기에 어디 훌륭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일행이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서 흩어졌다.
아이반 역시 오른쪽 눈을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과연 요정의 창고, 하나하나가 대단한 물건들밖에 없었다.
스릉- 슥! 아이반이 지나가다가 검 하나를 뽑아 들었다. 공기가 베이는 소리마저 날카로웠다.
뛰어난 절삭력은 물론이고 정령석이 몇 개나 박혀져 있어서 속성 공격까지 가능한 물건이었다. 마력을 잘 빨아들이는 것을 보니 재질도 남달랐다.
욕심이 피어올랐으나 아이반은 내려놓았다. 그에게는 피의 검 브리카가 있었다.
검보다 다른 물건을 찾는 게 나았다. 한동안 이것저것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아이반은 문득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힘의 허리띠, 메긴기요르드가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게 왜?’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메긴기요르드의 떨림에 집중했다.
이것이 대체 무엇에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어느 황금 팔찌 앞에 도착했다. 아이반은 그것을 보자마자 운명적인 끌림을 느꼈다.
그것을 쥐자마자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마치 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주체할 수 없는 마력이 들끓었다.
그때 영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아스가르드의 전사. 당신은 겨우 물건에게 잡아먹힐 남자입니까?”
아이반이 고개를 돌리니 어느 엘프 여성이 천천히 다가왔다. 엘프의 기준으로도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지만 그런 외형이 아니라 그녀가 품고 있는 기운 때문에 아이반은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나오는 신성의 힘, 초월적인 존재감. 처음 보지만 아이반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시아린 이븐우드.”
엘레나 이븐우드의 언니이자 현재 세계수의 무녀. 세계수라는 초월자를 온전히 자신의 몸에 강림시킬 수 있는 존재.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반이 쥐고 있는 팔찌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