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2
이레인이 팔라시온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어쩌면 이번 거인 사건에 휘말려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애써 흩어버렸다.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원래 그랬다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옛 거인이 깨어나서 자신의 영락한 후손들을 모으고 있어. 적당히 세력이 모이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그러니까 시간을 벌어야만 해.”
요정 군단이야 금방이라도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으나 나머지는 아니었다. 아이반이 건네준 해신의 심장으로 성황청과 협상이 잘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들이 이곳까지 오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아이반의 일행이 그랬던 것처럼 요정의 숲을 경유하여 공간을 뛰어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일행이 쉽게 드나들어서 익숙해졌을 뿐 원래 요정의 숲은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엘프의 심장부였기에 함부로 좌표를 노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녀석의 주변을 돌면서 합류하고 있는 놈들을 하나씩 사냥하고 있어. 그것을 함께 하겠나?”
발티무어 이리딘의 물음에 아이반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소.”
“좋아, 내일 아침에 그대들을 부르지.”
그렇게 결정한 발티무어 이리딘은 힐끗 일행을 살폈다. 날씨에 비해서 무척이나 가벼운 옷차림이 거슬린 모양이다.
“그대들의 몸에 맞는 방한복을 전해주지. 단단히 챙겨 입고 나오라고.”
그 말에 사나운 이빨이 가슴을 치며 답했다.
“전사는 이깟 추위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 전사들이 얼어 죽는 곳이 이 땅이야. 허세는 자네의 땅에서 부리게, 젊은이.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곳의 법칙을 따라야지.”
그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경험할 추위는 상상 이상일 거야. 장담하지.”
다음 날 새벽,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아 캄캄한 시각. 일행은 간밤에 프로스트 엘프가 가져다준 방한복으로 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로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평소보다 적어도 두어 겹은 더 껴입었기에 몸이 퉁퉁하고 둔하게 보였다.
두꺼운 털옷이 따뜻하긴 했으나 솔직히 아주 편하지는 않았다. 일행이 그것을 토로하고 있으니 어느새 발티무어 이리딘이 나타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추위의 무서움을 모르는군. 일단 밖으로 나가면 나의 배려에 감사할 거야.”
발티무어 이리딘을 시작으로 프로스트 엘프 십수 명, 그리고 아이반의 일행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엘프의 거처를 벗어나 눈 덮인 숲으로 들어서자 온도가 한층 떨어졌고, 이내 숲마저 벗어나 광활한 얼음의 땅으로 나아가니 추위가 더욱 심해졌다.
일행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본 발티무어가 껄껄 웃었다.
“이제 시작이야. 각오 단단히 하라고.”
휘이잉- 칼바람이 불었다. 영하 수십 도의 차가운 공기가 털옷마저 뚫고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멀리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온도 변화가 너무 극심했다.
이 추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추위라면 솔직히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체력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혹한의 땅이란 이런 것이었다.
“여기는 원래 이렇습니까? 아무래도 정상적인 수준이 아닌데요.”
델피노의 물음에 발티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북부가 춥기는 하지만 여기는 조금 더 지독한 곳이야. 이 땅의 마력이 자연적인 결계를 만들었거든. 그래서 이곳에는 그 어떤 것도 살지 않아. 그야말로 얼어붙은 땅이지.”
아이반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온통 눈밖에 없어서 도대체 어디서 움직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연적인 결계와 몰아치는 눈바람 때문에 방향감각마저 흐려졌다. 레인저의 경험을 가진 아이반마저도 이런 곳에서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이 없었다.
후긴과 무닌, 두 마리 까마귀 정령을 소환해서 하늘로 날려 보낸다고 해도 눈바람 때문에 아래 지형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터였다.
“여기는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군. 잘못하면 영원히 헤매겠어.”
“보통은 영원히 헤매기 전에 얼어 죽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수천 년간 이곳에 살아오면서 익숙해졌으니.”
발티무어의 장담대로 프로스트 엘프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이정표로 삼는지 고민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낮에는 걷고 밤에는 눈을 파고 그 속에서 잠을 잤다. 프로스트 엘프가 정령을 불러 몇 번 손짓을 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잠자리가 만들어졌다.
내부에 불을 피우자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며칠을 움직이고 나서야 프로스트 엘프의 움직임이 크게 조심스러워졌다. 그걸 본 아이반은 적의 영역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았다.
“녀석들은 게을러. 아무리 옛 거인이 불렀다고 해도 모두 도착하진 않았겠지. 우리는 이곳에서 녀석들을 하나씩 사냥하며 시간을 번다.”
발티무어 이리딘의 지시에 따라 일행은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적을 발견했다. 거친 털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설인. 키가 4m를 훌쩍 넘는 커다란 덩치의 괴물이었으나 발티무어 이리딘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소한 녀석인데, 무리에서 쫓겨난 놈인가?”
잠깐 주변을 살폈으나 녀석 외에 다른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미심쩍긴 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사냥을 시작했다.
끼이익 먼저 이레인이 시위를 당겼다. 다시 돌려받은 팔라시온의 활 대신 그녀가 계속 쓰던 활이었다.
고대 요정의 신기는 함부로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피우웅- 쾅! 이레인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설인의 가슴에 박혔다.
바람의 정령이 힘을 보태어 무척이나 빠르고 강력한 화살이었지만 녀석의 목숨을 끊어내는 것에는 실패했다. 어찌나 가죽이 두꺼운지 심장까지 박혀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
녀석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동안 프로스트 엘프가 빠르게 다가갔다. 설인이 바닥을 후려쳐 눈과 얼음이 날렸지만 프로스트 엘프들은 이리저리 쉽게 피해내고는 녀석의 뒤로 돌아가 다리를 베었다.
차라락! 붉은 피가 흘렀다. 단번에 녀석의 근육까지 베어내지는 못했는지 놈이 마구 날뛰었으나 점점 상처가 많아졌다.
프로스트 엘프는 능숙하게 녀석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때 사나운 이빨이 땅을 박차고 날아가 녀석의 머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머리가 쪼개지고도 움직일 수는 없는지 설인이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사냥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나운 이빨은 심각하게 물었다.
“이런 녀석이 얼마나 되는가? 뼈가 너무 두껍다. 내 검의 이가 나갈 뻔했다.”
쉽게 사냥하긴 했으나 그건 녀석이 비교적 약한 녀석인데다 아군이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옛 신의 화신과 싸우던 일행과 프로스트 엘프의 정예가 모였다. 그러고도 단번에 녀석의 목을 치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점이었다.
“그 녀석들은 그저 곁다리에 불과하다. 진짜는 그런 멍청한 괴물이 아니야.”
사실 설인은 옛 거인의 영락한 후손이 아니라 그저 거인의 마력에 이끌려 몰려든 녀석에 불과했다.
“진짜는 거인이지. 현시대의 거인들.”
발티무어 이리딘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아이반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 폐쇄적인 엘프가 다른 종족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당연히 적이 만만치 않겠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쯧, 계속 잠이나 잘 것이지 왜 깨어나서 깽판을 치는 거야?’ 원시 거인은 악마가 아니었다. 태생부터 사악한 존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워낙 욕망에 충실한 존재라 위험하기로는 똑같았다.
원래 순수한 어린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찢고 개미굴에 뜨거운 물을 붓는 법이다.
“생각보다 소란스러웠소. 빨리 자리를 옮겨야······.”
말을 하던 아이반이 문득 어딘가를 바라보며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냈다. 그리고 재빨리 그것을 날려 보냈다. 쉬이익! 쾅! 공간을 찢고 날아간 아이반의 창이 허공에서 떨어지던 커다란 바위를 꿰뚫었다. 그렇게 박살을 내고 잘게 파편으로 만들었다.
“으하하하! 그것을 막다니! 용맹한 전사로다!”
저 멀리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작은 가죽을 몇 개나 이어서 만든 누더기 갑옷을 입고, 돌로 만든 도끼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아주 멀리 있음에도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아주 잘 보였다. 그것은 그 남자가 조금 전 사냥한 설인보다도 훨씬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격이나 다름없던 원시 거인과는 달리 그저 커다란 덩치와 괴물같이 튼튼한 육신만 물려받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현시대의 거인. 자신의 위대한 선조가 부르는 소리를 따라 다가온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인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적이니까. 하하하하하! 그때 누군가 껄껄 웃었다.
즐거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피와 전투, 죽음과 영광이 기다린다! 천둥신이 망치를 내려치자 아이반의 몸에서 폭발적인 힘이 솟아올랐다.
그가 착용한 메긴기요르드, 힘의 허리띠가 붉게 물들었다. 손에 번개가 모여들어 망치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아이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았다. 쾅!
푸른 번개가 땅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닥에 쌓인 눈이 터지듯이 밀려나고 아이반은 그 위를 달리며 거리를 좁혔다.
천둥걸음, 무파 썬더울프의 기초이자 핵심. 번개가 내리치듯 빠르고 천둥이 울리듯 무겁게 움직였다. 그 힘을 그대로 실어 새하얀 번개의 망치를 휘둘렀다.
쾅! 거인의 도끼와 아이반의 망치가 맞부딪쳤다.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땅이 뒤집어지고, 눈과 얼음이 허공에 솟구쳤다 떨어져 내렸다.
생명체가 그저 육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눈보라가 가라앉으니 둘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아이반은 막대한 충격을 받고 멀찍이 밀려났다.
그가 밀려나며 생긴 고랑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거인의 표정 역시 좋지 못했다. 그 역시 뒷걸음질을 쳤기 때문이다.
이 조그마한 전사의 힘을 못 이기고. 아이반의 덩치 역시 작은 편은 아니었으나 말 그대로 집채만 한 크기의 거인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덩치는 곧 힘이고, 거인이 휘두르는 도끼는 자연의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체급이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 서로 맞부딪쳐서 거인이 한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거인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짐짓 여유로운 듯 소리쳤다.
“놀랍구나, 작은 전사여! 그러나 계속해서 나의 힘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이 그 자신의 원천이었다.
거인의 힘은 정말 무지막지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으나 아이반은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 튼튼한 몸이 뼈마디가 쑤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의 패배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겨우 힘만 센 덩치에게 질 리가 없었다.
우웅- 아이반의 몸에서 막대한 기운이 솟구쳐 오른다. 허리에 두른 메긴기요르드가 육신의 힘을 증폭한다.
거인과 한 번 맞부딪친 이후 사라졌던 번개의 망치가 다시 그의 손에서 생겨났다. 치직, 치지직! 새하얀 번개가 번쩍이고 다시 한번 아이반이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익!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리찍는 거인의 도끼, 그러나 아이반은 그와 힘 싸움을 하는 대신 속도를 더 높여 도끼를 지나쳤다. 단숨에 지근거리까지 다가가 망치로 거인 발목을 후려쳤다.
쾅!
“으아아아!”
거인이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아이반을 털어내듯 발로 후려 찼다. 워낙 가까이 붙어있어서 피할 방법이 없는 아이반은 뱀신의 황금 방패를 펼쳐 몸을 가렸다. 그리고 뒤로 훌쩍 물러나며 충격에 대비했다. 쿵!
“컥!”
온몸을 때리는 충격에 아이반이 멀찍이 튕겨 나갔다. 눈밭을 데굴데굴 구른 아이반은 힘겹게 일어나며 바닥에 퉤 침을 뱉었는데, 피가 잔뜩 섞여 나오는 것이 내장을 다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