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3
그때 아이반의 머리 위에 신성한 빛이 내리쬐었다. 델피노가 뿜어낸 신성력이 다친 그의 몸을 순식간에 치료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상처라면 그게 얼마나 심각하든 델피노가 단번에 치료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생명의 구슬도 있었으니까. 아이반은 델피노 쪽을 흘깃 바라보며 엄지를 올렸다.
그들은 어느새 나타난 설인 무리와 싸우는 중이었는데, 델피노는 용케 이쪽을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딜 보는가! 건방진 전사야!”
잔뜩 화가 난 거인이 절뚝이며 다가왔다. 아이반의 망치가 그의 오른쪽 발목을 으스러뜨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이반은 그의 발을 완전히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겨우 뼈가 부러진 정도라니, 거인의 튼튼함에 질릴 것 같았다. ‘티르의 권능으로 결투를 시작했으면 뭘 해보지도 못하고 터진 토마토가 되어버렸겠어.’ 서로의 이능을 봉인하고 육체적 능력만으로 싸우는 티르의 결투는 강력한 이능을 가진 적에게는 훌륭한 방법이었으나 이처럼 순수하게 육신이 강한 상대에게는 그냥 목숨을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아이반 역시 순수 육체파라기보다는 이능에 많이 기대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질척! 아이반의 마법이 눈을 녹이고 바닥을 진창으로 만들었다.
절뚝이며 다가오던 거인의 발이 그것을 밟았으나 워낙 덩치가 커서 큰 의미가 없었다. 아이반이 만들어낸 진창은 그의 발목도 적시지 못했다.
“얼어붙어라!”
아이반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거인의 발바닥에서부터 얼음이 솟아났다. 그러나 거인의 질긴 가죽은 항마력까지 뛰어난지 몸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전사가 이런 잔재주를 부리다니!”
거인이 불쾌한 듯이 벌컥 소리를 지르며 도끼를 들어 올렸다. 지금 시대의 거인은 뛰어난 육신을 가진 대신 이능에 대한 재능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마법도 익히지 못하고, 정령과도 친하지 않았으며, 하다못해 숙련된 기사들처럼 오러를 뿜어내지도 못했다. 거인이 보기에 순수한 육체의 힘 이외의 것은 모두가 사술이자 잔재주이며, 그중에서도 현실을 왜곡하고 법칙을 뒤흔드는 마법은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쾅! 거인의 도끼가 아이반을 내리찍었다. 그의 머리가 깨지고 육신이 눌린 토마토가 되어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자 오히려 거인이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아이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자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는 죽지 않았다. 스스슥- 거인의 도끼에 쪼개진 아이반의 시체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는 멀쩡한 모습으로 그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내고는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런 식이군. 어렵지는 않아.”
거인의 육신은 무척이나 튼튼하고 뛰어난 항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능이 없는 그들은 환영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었다. 아이반이 만들어내는 환영은 도적의 은신과 전사의 감각, 뛰어난 마법에 참과 거짓을 농락하는 로키의 권능까지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엘프나 영혼을 다루는 악마마저도 순간적으로 놓칠 정도인데 거인이 그것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쾅! 거인의 도끼가 재차 아이반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것 역시 거짓으로 만들어진 환영. 아이반은 피의 검 브리카를 뽑아 들고 거인의 멀쩡한 발목마저 갈라버렸다.
스걱! 거인의 질긴 가죽이 쩍 벌어졌다.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지고 힘이 빠져나갔다.
각성을 마친 피의 검 브리카는 주변의 힘을 게걸스럽게 빨아 마시고 아이반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거인의 몸속에 있었으나, 그들 자신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던 힘이 피의 검 브리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거인이 아까처럼 발로 차서 아이반을 떨어트리려 했으나, 이미 한쪽 발목이 으스러진 상태에서는 제대로 힘을 실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그의 발길질을 가볍게 피하고 조금씩 깎아나가듯 상처를 입혔다.
차라락! 거인의 덩치만큼 피도 많았다. 새하얀 눈밭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흘린 피 이상으로 거인은 지쳐있었다.
그들은 남달리 튼튼한 뼈와 근육, 겉으로 보이는 덩치에 비해 무척이나 가벼운 무게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거대한 덩치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너무나 많았다. 폭발적인 힘과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나 지구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자는 것으로 보냈고, 그렇게 비축한 체력으로 짧게 움직여 사냥하기를 반복했다. 안 그래도 전투가 길어질수록 빠르게 체력이 떨어지는데, 피의 검 브리카가 야금야금 힘을 뺏어가기까지 하니 거인은 죽을 맛이었다.
“허억! 허어······.”
거친 숨을 내쉬는 거인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둔해졌다. 이제는 도끼를 들 힘조차 없는지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이미 양쪽 발목은 엉망이 되어 무릎을 꿇고 있었고, 팔과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 핏물이 가득했다.
“네, 녀석! 어찌하여···!”
거인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분노를 터트렸다. 아이반이 단숨에 자신을 마무리하지 않고 마치 실험하듯 이리저리 가지고 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자의 후손으로서 이렇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니, 그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방자한 자여! 그대에게 저주가···!”
스걱! 거인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목이 잘려 나갔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머리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진 후 데굴데굴 굴러가다 멈춰 섰다. 그 사이 수십이 넘는 설인 무리를 모조리 처리한 일행이 다가왔다. 거인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델피노가 물었다.
“어땠습니까?”
“강한 상대였소. 그러나 어째서 옛 거인의 영락한 후손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더군.”
덩치와 힘은 놀라웠다. 공격 하나하나가 묵직했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솔직히 메긴기요르드와 토르의 권능이 아니었다면 처음 부딪쳤을 때 힘에 밀려서 그대로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단점이 명확했다. 장기전에는 약하고, 눈을 가리는 환영에도 대처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결국 네임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거인 전사였단 말이지.’ 이런 녀석이, 이것보다 강한 녀석이 적어도 수십, 수백 명은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 원시 거인, 그 옛날 신과 승부를 겨루었던 존재까지.
“지독한 싸움이 되겠군.”
아이반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사나운 이빨이 크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전사의 삶이니까!”
원래 계획대로 사냥은 성공했다. 그러나 찜찜한 점이 많았다. 왜소한 설인 하나를 미끼로 쓴 것을 보면 처음부터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다니, 원래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거인에게서 볼 수 없는 조직적인 모습이었다. 그건 깨어난 원시 거인이 지시한 걸까? 아니면 계략에 능한 자가 있는 걸까? 아이반은 그런 고민을 하면서 거인의 돌도끼를 주섬주섬 챙겼다.
거인의 강력한 힘을 견딘 것을 보면 평범한 바위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시커먼 바위로 만든 거인의 돌도끼는 웬만한 마차만큼이나 크기가 컸다.
이게 인벤토리에 다 들어갈까 싶었지만, 어찌어찌 아슬아슬하게 넣을 수가 있었다. 아이반이 그렇게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확인한 발티무어 이리딘이 일행을 재촉했다.
“다 챙겼으면 서둘러 움직이지. 이제 시작인 셈이니까. 적이 우리의 힘을 제대로 판단하기까지 한 번 정도는 더 잘라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그렇게 서둘렀음에도 귀신같이 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옛 거인의 마력에 취해 돌아다니던 설인 무리만 몇 개 처리했을 뿐이다.
자신들의 영역 근처에서 소란을 벌이고 있으면 한 번쯤 나와 볼 법도 했다. 거인은 무척이나 자존심이 강한 자들이었고, 남들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을 못 견디는 놈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는 듯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게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더는 움직이는 거인이 없어. 그건 이미 모일 만큼 모였다는 소리겠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군. 그렇게 게으른 존재들이.”
발티무어 이리딘이 심각하게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의 반응이 실로 전략적이었다. 그건 그저 거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군대로 조직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도적과 군대가 다르듯 거인의 무리와 거인의 군대는 의미가 달랐다.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 봐야 더는 얻을 것이 없군. 이만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하지.”
또다시 얼어붙은 혹한의 땅을 넘어 프로스트 엘프의 거처로 돌아갔다.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던 거인의 무리는 한동안 조용했으나 그건 사람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지금 움츠린 만큼 적의 폭발력이 크리라는 것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일 밤낮으로 경계하며 기다리기를 한 달, 추위가 더욱 심해지고 눈보라가 몰아쳐서 눈과 귀를 가리던 날. 멀리서 북소리가 들렸다. 우렁찬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두둥! 뿌우우- 그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보라 너머, 모든 것이 얼어붙은 혹한의 땅을 뚫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하 수십 도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인의 군대가 진격을 시작했다.
최전방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프로스트 엘프들이 소식을 전했다. 적이 움직였음을 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이 끊어졌다.
강한 눈보라가 적들의 존재를 가려서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게나 날렵한 프로스트 엘프들이 미처 몸을 빼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티무어 이리딘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올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과 흩날리는 눈바람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느낄 수가 있었다. 고통과 분노, 절망. 차례로 연결이 끊어지는 자신의 동족이 마지막으로 남긴 감정. 발티무어 이리딘과 프로스트 엘프의 눈빛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투지가 들끓고 살기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프로스트 엘프는 보통의 엘프와는 달랐다.
일반적인 엘프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여 오히려 겉으로는 크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서 프로스트 엘프는 모두가 같이 분노하고 같이 슬퍼했다. 혹한의 땅에 자리를 잡은 프로스트 엘프의 가슴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선명하게 토해내었다.
“놈들을 찢어 죽인다. 함께할 자는 나를 따르라.”
발티무어 이리딘의 분노는 격렬했으나 이성은 차가웠다. 미리 정해진 작전을 잊지 않고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후퇴하라. 숲으로 끌어들여서 조금씩 처리할 수밖에 없다.”
프로스트 엘프가 그동안 쌓아 올린 영역을 포기하라는 명령. 남은 이들은 이를 악물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지도자의 명령은 곧 전체의 명령이었다.
그것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프로스트 엘프의 정신이었다. 최우선 가치는 생존. 일단 살기만 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
반면에 얼마 전 도착한 요정군단과 그를 이끄는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조용했다. 입을 열지 않고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조용히 진군을 준비했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마치 기계와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이 높게 치는 가치는 희생이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저 의지를 단단히 세웠다. 이미 목숨을 잃은 척후병들은 자신의 몫을 다했다. 그러면 이제 본인들이 활약할 차례였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아이반은 자신의 장비를 점검했다. 갑옷은 물론이고 허리띠와 팔찌, 검과 방패, 도끼와 창, 활과 화살까지. 순식간에 전투준비를 마친 그가 물었다.
“지금 지원 병력은 어디쯤 있소?”
엘프의 저력이 대단하지만, 그 힘은 대부분 요정의 숲에 묶여있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적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적어도 각 종족에 요청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성황청의 성전군이 오기까지 적어도 사흘은 필요해. 대수림 역시 비슷한 시간이 필요하고. 피의 동맹에서 참여한다고는 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어.”
이레인의 대답을 들은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흘은 너무 긴데.”
“그래도 해내야지. 어쩌겠어?”
“그것도 그렇지. 젠장, 어디 쉬운 전장이 없어.”
아이반은 낮게 투덜거리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발티무어 이리딘과 필레인 그레이우드를 따라 최전선, 숲의 끝자락으로 향했다.
이미 얼어붙은 땅으로 들어가 적을 감시하던 프로스트 엘프들은 모두 연결이 끊어졌다. 그건 적들이 정말로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 그러나 아직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북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에 담긴 패기가 사방을 내리눌렀다.
저절로 위축되고 몸이 굳었다. 그때 허공을 가르고 큼지막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전처럼 바위라도 날린 것인가 싶어서 아이반이 창을 집어던지니 눈과 얼음이 깨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쏟아지는 눈덩이 사이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장난 좀 쳤는데 그것마저 받아주지 않는군. 참으로 재미없는 녀석들이야.”
거친 수염을 지닌 거인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원근감을 파괴하는 커다란 덩치가 움직이자 아군이 모두 긴장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는데, 그 모습이 퍽 가소롭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약한 녀석들아, 비켜라. 우리는 우리의 땅을 되찾아야겠다.”
그 말에 발티무어 이리딘이 소리를 질렀다.
“이 땅은 우리의 것이다! 수천 년도 넘게 살아온 숲을 넘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