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4
“정당한 지배자가 돌아왔으니 너희는 마땅히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패배자가 다시 깨어났다고 그를 섬길 자는 아무도 없다! 패배자의 후손들이여!”
“너희의 하찮은 섬김은 필요 없다. 우리는 너희를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자가 돌아왔음을 곧 온 세상이 알게 될 터이니 세계가 정당한 지배자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쿵! 쿵! 쿵!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거인들이 발을 구르자 땅이 흔들렸다. 대지가 갈라지고 비탈에선 눈사태가 일어났다.
수백의 거인들, 수천의 설인과 예티, 사스콰치, 빅풋. 한때 신과 같은 힘을 지녔다던 옛 거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눈앞에 있는 적들만으로 숲을 갈아엎고 대륙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언젠가 하룻밤에 나라 하나를 부쉈다는 거인의 군세가 눈앞에 있었다.
“정당한 지배자의 힘을 확인하라. 너희는 절망할 것이다.”
그런 거인의 말을 들은 아이반이 비웃음을 날렸다.
“얼마 전에 오만하게 떠들어대던 거인 하나를 죽였지. 오다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그의 시체를 보지 못했소?”
낮게 중얼거렸지만,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렸다. 목소리에 마력을 실어서 증폭했기에 아이반의 목소리가 저 멀리 거인에게까지 닿았다. 동족의 죽음을 언급하는 아이반에게 거인들은 분노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약한 녀석이 죽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나약한 놈이 죽었다고 하여 우리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으냐?”
“그래야 할 것이오. 당신들의 목 역시 떨어질 테니까.”
“발악하라, 하찮은 자들아. 너희의 몸부림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알게 될 테니.”
둥! 둥! 둥! 다시 한번 북소리가 들린다. 낮고 긴 뿔피리 소리와 함께 적이 진군을 시작했다.
숲의 경계에 선 엘프들은 모두 활을 들어 올렸다. 피우웅- 어느 누가 시작이랄 것도 없이 화살이 날아갔다.
지독한 눈보라를 가르고 적의 몸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강한 바람과 두꺼운 가죽은 화살을 막아냈다. 정령의 힘으로 강화한 화살들이 적의 목숨을 끊지 못하고 그저 생채기만 입혔다.
그걸 본 이레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보다 더욱 가죽이 질겨졌어. 조금 더 거리가 좁혀지지 않으면 화살로는 제대로 타격을 주기가 어렵겠는데.”
“옛 거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오. 그가 가진 권능이 녀석들의 육신을 강화하고 있는 거지. 생각보다 원시 거인이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있는 모양이군.”
한동안 활을 쏘던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창을 몇 개나 꺼내서 바닥에 꽂아 넣었다. ‘새로 보충한 창도 금방 다 써버리겠군.’ 잠깐 가격을 떠올리던 아이반은 잡념을 흘려보내고 집중했다.
자신을 둘러싼 창을 하나 뽑아 들고 허리를 비틀어 날렸다. 슈우욱! 쾅! 마치 대포라도 쏘듯이 굉음과 함께 날아간 창이 설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하나로도 모자라 둘을 동시에 관통하고서 바닥으로 사라졌다. 어찌나 강하게 날렸는지 눈 속 깊이 파고들어서 겉으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거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를 하나씩 집어 던지기 시작했는데 웬만한 공성 병기 못지않았다.
이건 순수한 물리 공격이라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엘프가 정령을 불러서 막아내기는 했지만 위태로운 것이 금방이라도 방어막이 깨질 것만 같았다.
가까이 다가온 설인의 목을 잘라버린 발티무어 이리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혹한의 땅에는 저만한 크기의 바위가 많지 않아. 저건 녀석들의 근거지에서 가져온 거다.”
“뇌까지 근육이 들어찬 것 같은 녀석들이 머리를 쓰는군.”
아이반은 창을 들고 저 멀리 거인들을 보았다. 녀석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뒤에서 바위만 던지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은 설인이나 예티, 뭐 그런 녀석들에게 맡기고 본인들은 뒤에 물러나 있다니, 지나치게 전략적인 행동이었다. 무기를 들고 직접 적과 마주치는 것을 즐기는 놈들이 저러는 것을 보면 책사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시 거인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항상 신들의 시선을 느끼며 사는 아이반은 초월자의 사고방식을 대충 이해하고 있었다. 필멸자를 하찮게 생각하는 그들은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치밀한 전략을 짜서 하나하나 지시하고 있다고?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할 리가 없지. 우웅- 아이반의 몸에 헤임달의 권능이 깃들었다. 감각이 확장되고 눈과 귀가 예민해졌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초월자의 감각을 빌려 눈보라를 꿰뚫고 적진을 살폈다. 선두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설인, 그 뒤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고 있는 예티와 사스콰치. 그 너머에서 바위를 던지고 있는 거인들, 그리고 그 뒤에서 검은 로브를 쓴 채로 전장을 살펴보고 있는······.
“으윽!”
눈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아이반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위대하고 거대한 자가 손을 들어 시야를 막아버린 것이다.
순간 온몸을 스치는 냉기가 스며들었다. 영혼마저 얼려버릴 듯 시리고 시렸다.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강한 스파크가 튀었다. 번개가 솟구치듯 힘이 흘러나왔다.
천둥신의 권능이 차가운 기운을 몰아냈다. 앞에서 설인 하나를 토막 낸 사나운 이빨이 그를 힐끗 보았다.
“알아낸 것이라도 있나?”
아이반은 아직도 시린 자신의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 거인이 어째서 이렇게나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소. 빌어먹을 리치가 여기에 붙어있었군.”
그 말에 델피노가 화들짝 놀라서 되물었다.
“리치? 리치라니, 혹시 예전에 도망갔다던 그 녀석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소. 썩어가는 손아귀가 영혼을 거두지 않고 풀어주었기에 어디를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군. 망할 놈.”
썩어가는 손아귀를 소환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서 크게 힘을 잃어버렸지만 분명 그때 그 녀석이 틀림없었다. 녀석이 직접 원시 거인을 부활시킨 것인지, 아니면 부활한 원시 거인에게 접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용케 거인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반은 이 소식을 필레인 그레이우드에게 알리자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때 완전히 처리를 해야 했었는데 놓친 것이 이렇게 돌아왔군요.”
그는 적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적어도 사흘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반격은 그때부터다.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입을 다물고 주변에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지시를 받은 엘프들은 동시에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엘프는 조금 더 격렬하게 싸우는가 싶더니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났다.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작전이 우선이었다.
온몸을 설인과 예티, 사스콰치의 피로 적신 발티무어 이리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인의 숫자는 하나도 줄이지 못했어.”
“대신 자잘한 녀석들은 많이 처리했지. 이 정도면 시작이 좋소.”
아이반의 위로에도 그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원시 거인의 마력에 홀린 녀석들은 계속해서 몰려들 거다. 큰 의미가 없어. 진짜는 뒤에서 바위만 던지고 있던 거인들, 그리고 원시 거인이니까.”
혹시 아군이 후퇴할 때 거인들이 날뛰기 시작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들은 끝까지 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다는 자신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음 날, 훌쩍 뒤로 물러난 전선에서 또다시 맞붙게 되었을 때 아이반은 그들이 그저 여유를 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독한 악취가 온 사방에 퍼졌다. 아주 더럽고 역한, 시체가 썩는 것보다 더욱 고약한 냄새였다.
“윽! 저 녀석은 대체 무엇인가!”
사나운 이빨이 자신의 코를 가리며 크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거인의 군세에서 못 보던 녀석들이 새로 추가되었음을 알아차렸다. 5m에 가까운 커다란 덩치, 어제 죽어버린 설인과 예티, 사스콰치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이어서 만든 그릇에 강림한 괴물. 델피노가 녀석의 정체를 확인하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웬디고입니다. 눈과 얼음, 굶주림의 악령이죠. 녀석은 사람의 정신에 스며들어 미치게 만드니 조심해야만······.”
– 크아아아악! 악령이 울부짖었다. 이미 차가웠던 기온이 더욱 밑으로 내려갔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원령의 한이 사방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선두에 서 있던 엘프 몇 명이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살기로 가득한 눈동자,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 진득한 눈빛. 악령에 홀린 엘프들이 달려들었다.
“캬아악!”
카락취가 움직였다. 느릿하고 느긋하게, 강자의 여유와 권태로움을 담아서. 그렇게 그가 걸을 때마다 주변에 있던 거인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이 꿰뚫렸으며, 목이 떨어져 나갔다.
“이 조그마한 녀석이!”
거인들이 분노해서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달려드는 기세만큼이나 빠르게 목숨이 사라졌다. 그가 그렇게 스물이 넘는 거인을 홀로 베어내니 전장을 유린하던 거인들이 크게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적은 많았다. 카락취가 대단하다고 해도 홀로 모든 전장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가 등장하여 적의 기세가 꺾였다. 사기를 잃은 적의 군세는 이전처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개인의 용맹으로 전장의 흐름을 바꾸는 자를 영웅이라 불렀다. 그가 바로 이 전장의 영웅이었다. 뿌우우우- 적진에서 뿔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투의 시작을 알리던 때만큼이나 우렁찼다. 그 신호를 받은 거인의 군대가 전투를 멈추고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적은 몹시 전략적이었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기보다는 전장의 변화를 느끼고 그저 한발 물러섰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거인의 군대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노려보던 요정군단과 프로스트 엘프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허억!”
생각 이상으로 치열했던 전투였다. 거기에 세계수와의 연결을 스스로 끊어내며 생긴 정신적인 상처가 너무나 컸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들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흩어진 병력을 수습한 필레인 그레이우드와 발티무어 이리딘이 다가오자 카락취가 힐끔 그들을 바라보았다. 겨우 고블린, 하찮고 나약한 고블린. 평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나 그 고블린의 시선에 엘프의 영웅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순간적으로 카락취와 자신들의 격차를 느꼈기 때문이다.
“···놀랍군. 고블린이 이렇게나 강할 수도 있었나?”
발티무어 이리딘이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자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불쑥 나타나 이죽거렸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도움에 대해 감사부터 하는 것이 어떤가? 그대들에게는 그런 예의가 없나, 엘프?”
그 말에 발티무어 이리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내 실수다. 그것에 대해 사과하지. 도움에 감사한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흘흘흘, 엘프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라니. 이건 귀하군. 자원한 보람이 있어.”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과장되게 웃는 것을 본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연에 파묻혀 사는 주술사치고 정치질이 익숙하군.’ 다시 눈을 뜬 옛 거인의 군세에 맞서 함께 싸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피의 동맹이 엘프와 아주 원만한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로 몇몇 세력이 더 모일 테니 본인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피의 동맹 측에서 선수를 치고 나온 셈이다. 반면 카락취는 테잔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실제로 그렇겠지. 그는 스스로 단련하는 것 이외의 일에는 큰 관심이 없을 테니까. 아이반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이루어낸 업적을 알았고, 그가 만들어낼 전설을 알았다. 피의 동맹을 대표하는 검사, 최강의 고블린. 겨우 그런 수식어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그의 대단함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인간?”
아이반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카락취가 입을 열었다. 공용어가 익숙하지 않은지 다소 딱딱하고 투박한 말투였다. 그러나 그게 그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니, 딱히. 그저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렇게 대답하며 아이반이 한 걸음 물러나려는데, 의외로 카락취가 말을 걸어왔다.
“발크룬을 죽이고 스라칸의 팔을 잘라낸 전사, 그게 네가 맞나?”
발크룬과 스라칸, 둘은 아이반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거나 병신이 되어버린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카락취가 읊으니 아이반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가 무슨 의도로 그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은 잠시 틈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 일이 있었지.”
카락취는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고요하고 차분했다. 그저 오늘 날씨에 대해 묻는 듯 일상적인 말투였다.
“들었던 것과는 다르다. 그 녀석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만큼 성장했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