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5
“나에게는 한참 전의 일인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그리 멀지도 않았군. 죽지 않으려면 강해져야만 했소.”
“좋은 동기다. 보통 그렇게 강해지는 법이지.”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다보는 말투. 그러나 아이반은 반박할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그만큼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이반이 많이 강해졌지만 하나의 세력을 대표할 만큼의 강자와 비교하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만약 한계까지 신의 힘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카락취와 자신의 수준을 재보던 아이반은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아직은 그저 욕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척, 척! 약간의 시간이 지나 오크와 고블린, 트롤이 섞인 부대가 눈 덮인 숲을 가로질러 도착했다. 피의 동맹이 보낸 지원군이 모두 도착한 것이다. 나름 정예를 보냈겠지만, 존재감이 크지는 않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카락취와 테잔의 보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동맹은 지금도 인간들과 전쟁 중이라 수가 많지는 않아. 하지만 성의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걸세.”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그리 말했고, 다른 이들이 모두 인정했다. 얼마 전 인간의 나라들은 피의 동맹과 싸우기 위해 신뢰의 연합을 결성했고,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카락취와 테잔을 보냈으면 크게 신경을 쓴 셈이다. 어쨌든 그렇게 피의 동맹이 보낸 지원군이 합류하자 아이반과 일행은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 악연이 있는 만큼 괜한 충돌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델피노가 지친 표정으로 아이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군. 환자들은 어떻소?”
“피해가 큽니다. 역시 거인들이 직접 날뛰면서 당한 엘프들이 많아요. 어떻게 회복시키고는 있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가 있었다. 문제는 정신적인 면이었다.
“세계수와의 연결을 급하게 끊어내면서 다들 정신에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쪽은 단번에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군요.”
그 말에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웬디고 때문인가. 어째서 녀석의 저주가 스며들 수 있었지?”
얼음과 굶주림의 악령, 웬디고는 참으로 지독한 놈이었다. 그러나 원래라면 강인한 요정군단과 프로스트 엘프의 정신을 뒤흔들 수준은 아니었다. 심지어 세계수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건 신력에 의해 정신이 보호되고 있다는 소리, 악령 따위가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그 답은 이레인이 알려주었다.
“옛 거인의 힘이야. 녀석이 세계수의 힘을 억누르고 우리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고 있어.”
옛 거인은 한때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존재였다. 비록 주도권 싸움에서 패배해 쫓겨나거나 봉인되었지만, 그 본질은 필멸자가 아니라 불멸자에 한없이 가까운 자였다. 아직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여겼지만 이미 그의 힘과 권능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옛 거인이라면 요정을 상대하는 법은 이골이 났겠지. 우리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종족 중에서 가장 옛 선조의 흔적이 짙으니까.”
그 말에 아이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옛 거인이 이미 자신의 힘을 모두 되찾은 것이오?”
“그랬다면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을걸.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아주 빠르게 회복 중이라는 건 잘 알겠어.”
이레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미 한참 전에 세계수와의 연결을 끊고 정신을 닫았던 그녀가 그럴 정도니 다른 엘프들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웬디고의 광기에 물들었던 엘프들은 모두 정신을 차렸으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만큼 크게 피폐해졌다. 다른 이들 역시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혹시나 거인들이 또다시 공격하는 것이 아닐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조용했다. 타닥타닥! 거센 눈바람을 막기 위해 벽을 세우고 모닥불을 지폈다. 아이반이 장작을 추가하고 있을 때 대뜸 테잔이 나타나 중얼거렸다.
“며칠이나 조용하다니 이상하구먼. 만약 나라면 지금쯤 공격을 했을 텐데. 그렇지 않나?”
야밤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모닥불 속에 집어넣은 감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뺏어가는 그를 아이반이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실 시간을 끌수록 좋은 것은 저쪽이잖소? 옛 거인이 힘을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그 말에 테잔이 코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만약 정말로 그런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야. 자기들 영역에서 계속 버티다가 원시 거인이 힘을 모두 되찾았을 때 시작했겠지. 놈들이 제법 체계적으로 움직여서 착각하나 본데, 그렇게 인내심이 강한 놈들이 아니란 말일세.”
“아니면 저자의 등장이 조금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아이반은 힐끔 카락취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낡은 검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때때로 그의 미간이 꿈틀거리고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때마다 카락취의 몸 주변에 날카로운 기파가 생겼다가 가라앉았다.
“심상 수련 한 번 거칠게 하는군. 눈보라마저 피해가고 있어.”
이렇게나 차가운 날씨, 칼바람이 불고 있는데 카락취의 주변에는 오히려 훈풍이 불었다. 그의 몸에서 때때로 흘러나오는 기운이 일종의 결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뭐, 이 정도면 얌전한 편일세. 외지에 나왔다고 자제하는 모양이야.”
순식간에 뜨끈한 감자를 집어삼킨 테잔이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역시 자네도 재미있는 사람이야. 아주 흥미로워.”
“글쎄, 썩 좋은 관심은 아닌데. 우리가 친근한 사이는 아니잖소?”
“너무 그러지 말게. 우리는 얼굴만 보면 서로 대가리를 깨려고 달려드는 전사도 아니잖아?”
“···오크들은 그렇소?”
“뭐, 그렇지. 그러고 살아남으면 절친이 되는 거고. 나는 전사가 아니라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보통 그렇게 친구를 사귀더군.”
마계가 따로 없네, 미친놈들. 역시 오크 새끼들이랑은 상종을 하는 게 아닌데. 속으로 그렇게 욕설을 내뱉던 아이반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숲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푸드득! 아이반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까마귀 정령들, 후긴과 무닌이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걸 바라보던 테잔이 흥미로운 듯 턱을 긁적였다.
“감이 좋군. 반응이 빨라.”
“···먼저 알아차렸으면 정보를 뱉으시오. 잠시나마 힘을 합쳐야 할 사이인데.”
“거인들이 움직였네. 서쪽으로 한 무리, 동쪽으로 한 무리가 움직이는군.”
“그쪽에 뭐가 있소?”
“한쪽은 수인, 다른 쪽은 인간. 음, 신성력이 가득한 것을 보니 신전의 인간들이군.”
지원군이었다. 대수림과 성황청. 거인들이 그들을 알아차리고 먼저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엘프들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숲에 가까이 오자마자 알아차렸겠지만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져서 한발 늦은 모양이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군. 그들을 도와야겠소.”
“하나씩 맡지. 인간은 그쪽이, 수인은 우리가. 괜찮겠나?”
“영감이야말로 괜찮겠소? 관절도 성치 않을 텐데.”
아이반의 도발에 테잔이 싱긋 웃었다.
“나는 이미 출발했네.”
스르륵 테잔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흙과 나뭇가지, 잎으로 만들어진 분신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흩어진 것이다. 아이반이 입술을 깨물고는 소리쳤다.
“동쪽! 나를 따라오시오!”
후긴과 무닌이 칼바람을 헤치고 날갯짓을 계속했다. 게리와 프레키가 컹컹 코를 벌렁거리며 낮게 달려 나갔다.
아이반과 델피노,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 그리고 요정군단과 프로스트 엘프들이 그 뒤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아이반은 급하게 움직이면서 힐끗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요정군단이고 프로스트 엘프들이고 죄다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애써 힘든 기색을 숨기고 달리고 있었다. ‘괜찮을까?’ 그들의 의지는 잘 알았다. 그러나 과연 제대로 싸울 수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그런 아이반의 생각을 짐작한 이레인이 낮게 말했다.
“수백 년간 단련했어. 우리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
“뭐?”
“옛 거인이 요정을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선조가 어떻게 거인을 몰아냈는지 우리도 잘 알고 있어. 세계수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지.”
” 알겠소.”
아이반은 세계수가 불타 사라지고 요정의 숲이 갈기갈기 찢어졌던 엘프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심코 엘프를 나약한 자들, 혹은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크게 반성했다. ‘천하의 엘프를 얕보다니, 병신 같은 생각이지.’ 여린 외형과 달리 엘프는 무척이나 강인한 종족이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이 땅에 살아온 선주종족의 직계 후손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원시 거인은 패배자였고, 이들은 승자의 후예들이다.
괜히 움츠려들 이유가 없었다. 뽀드득뽀드득 한동안 말없이 눈 밟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러다 문득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후긴과 무닌, 게리와 프레키가 그에게 적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엘프들 역시 정령들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예전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세계수와 연결이 끊어진 엘프들은 감정 변화가 그대로 눈에 보였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더 생동감이 넘친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쿵! 쿠궁! 땅이 울린다.
충격파가 번지고 나무 위에 쌓였던 눈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모두가 깨달았다.
“먼저 가보겠소.”
아이반이 그리 외치며 땅을 박차고 앞으로 뻗어나갔다. 빛이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푸른 번개를 온몸에 감싸고 달렸다. 천둥걸음. 아이반이 익히고 있는 것 중에서 직선 이동으로는 가장 빠른 기술. 쾅! 마치 공간을 접은 것처럼 아이반이 쭉쭉 뻗어나갔다. 그렇게 달리니 저 멀리서 성황청의 성기사들이 괴물들에게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꽈아악! 아이반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집어 던졌다. 그의 손을 벗어난 창은 어느 성기사의 뒤를 노리던 설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슉! 피가 흘러나왔다. 심장을 부수고 생명의 정수를 바깥으로 강제로 끄집어냈다.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새하얀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설인과 예티, 사스콰치 혹은 빅풋. 이름이야 어쨌든 덩치 큰 괴물들 뒤에 여유롭게 서 있던 거인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반의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힘이 끓어올랐다.
“토오르으으으!”
아이반의 외침을 들은 천둥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를 내려쳤다.
수많은 거인의 두개골을 부수고 심장을 꿰뚫었던 파괴의 상징이 우렁찬 소리를 내질렀다. 쾅!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친다.
천둥이 울리고 밤을 마치 낮처럼 밝혔다. 아이반은 천둥신의 권능을 한손에 쥐고 휘둘렀다.
미처 반응하지 못한 거인 하나가 피를 내뿜었다. 두꺼운 가죽을 뚫고, 강인한 항마력을 넘어 녀석을 불태웠다.
“으어억!”
쓰러지는 녀석을 무시하고 아이반은 도끼를 꺼내 다른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쉬이익! 눈을 향해 날아오는 자그마한 도끼를 막기 위해 녀석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스스로 가려버린 시야, 녀석의 사각으로 아이반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피의 검 브리카를 휘두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흐라미(Hrami:찢는 자).”
언령의 힘을 빌려 한층 날카로워진 검이 거인의 질긴 가죽을 잘라내고 놈의 다리 근육과 인대를 끊어버렸다.
“크아악!”
녀석이 고통스러워하며 도끼를 내려찍었다. 아이반의 머리를 쪼갤 듯이 후려쳤다.
아이반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우웅- 쿵! 아이반의 몸을 감싸며 빛으로 된 보호막이 생겨났다.
거인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은 듯 막아내고 사라졌다. 그가 도우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성황청의 사제들이 보호막을 씌워준 것이다.
아이반은 바닥에 피의 검 브리카를 꽂았다. 그리고 거인들의 힘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녀석을 핵으로 삼아 주문을 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