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6
“시그룬드(Sigrunnr:승리의 나무).”
스르륵- 피의 검 브리카를 타고 바닥에서부터 새싹이 솟아올랐다. 혹한의 날씨와 두꺼운 눈을 뚫고 새파란 싹이 자라나 순식간에 몸집을 키웠다. 피의 검 브리카를 집어삼키고 거대한 나무가 솟았다.
구주물푸레나무, 노르드의 신성한 상징. 위대하고 신성한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닮은 나무가 나타나자 주변에 몰아치던 칼바람마저 잠잠해졌다. 봄처럼 훈풍이 불고 평화롭고 달콤한 향기가 번졌다.
단순히 따뜻하고 달콤한 것만이 아니었다. 지쳐있던 자들에게 기운을 불어넣고 적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말 그대로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만들었다.
“으, 윽!”
거인들과 커다란 덩치의 괴물들이 불편한 신음을 흘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내뿜던 사나운 살기가 줄어들고, 저 멀리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원시 거인의 힘이 흐려졌다.
쉬이익! 푸슉! 백발백중. 목표를 놓치지 않는 요정의 화살이 적을 꿰뚫었다. 팔다리, 가슴, 혹은 눈과 귀. 단번에 적의 목숨을 거두지는 못했을지언정 하나같이 치명적인 곳이었고, 그렇게 틈을 만들어내자 성황청의 사제들, 성전기사단이 힘을 냈다.
“청명하신 여신이여!”
“생명의 자비를, 물의 분노를!”
사제들이 힘을 합쳐 외치자 바닥에 쌓여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 투명한 물이 되었다. 물은 순식간에 커져 적들을 덮쳤고, 마치 숲속에서 파도가 치듯 그들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적들을 감싼 물이 움찔거리며 잘게 흔들렸다.
초고속의 진동이 물 전체에 퍼지자, 그 안에 잡혀있던 적들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몸속에 있는 수분마저 따라서 흔들리며 내부를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악! 거인들이 거세게 몸을 흔들자 그들을 감싸던 물이 사방으로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시간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필레인 그레이우드의 검이 어느 거인의 목을 베고, 발티무어 이리딘의 정령이 다른 녀석을 짓눌렀다. 사나운 이빨이 거인과 검을 맞부딪히고, 이레인 팔라시온의 화살이 심장을 꿰뚫었다. 그렇게 거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놈들이 소리쳤다.
한가득 분노를 담아 온 사방이 흔들릴 듯 고함을 내질렀다.
“우리는 위대하고 거대한 자의 후예로다!”
거세게 분노를 내뿜은 거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어떤 녀석은 돌로 만든 도끼를, 어떤 녀석은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창을, 어떤 녀석은 날이 잔뜩 나간 거대한 검을.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진 원시 거인과 달리 현대의 거인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커다란 덩치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었다.
어떤 갑옷보다 튼튼한 피부와, 어떤 마법보다 강인한 근육으로 날뛰기 시작하자 쉽게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았다.
그때 성황청의 사제들, 성전기사단이 신성력을 내뿜었다. 마치 바다처럼 푸른빛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우웅- 해신의 심장을 대가로 받아 출정한 물의 신 뤼안 교단의 최정예 병력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증명하고자 했다.
스르륵- 바닥을 적시고 흩어졌던 물이 다시 모인다. 혹한의 기온에 얼어붙던 것이 다시 액체로 돌아와 솟아올랐다. 투명한 물이, 바다처럼 푸른 기운을 가득 담아 조금씩 모습을 갖추었다.
천상에서 신들을 모시는 그들을 불러와 물로 만든 육신에 강림시켰다.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천사가 투명한 몸으로 눈을 떴다.
쉬이익! 물로 만들어진 검이 휘둘러지고, 거인의 육신을 꿰뚫었다. 극도로 압축된 물이 거인의 질긴 피부를 뚫고, 강철보다 튼튼한 뼈를 잘라냈다.
“크아악!”
거인 하나가 팔이 잘려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다른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다. 큼지막한 손이 투명한 전투 천사들을 후려쳤다.
파악! 투명한 전투 천사들은 물로 만들어진 방패를 들어 올렸다. 몸의 일부가 짓뭉개져 흩어지나 싶더니 다시 모습을 되찾았다.
평범한 육신이 아니라 물로 이루어진 화신이기에 물리적인 공격을 무시하는 듯싶었다. 강력한 공격력에 막강한 방어력과 회복력. 언뜻 보기에는 너무나 강력해서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 하지만 오래 끌지는 못하겠군.’ 자신을 노리는 거인을 상대하면서 아이반이 힐끔 전투 천사를 바라보았다. 처음 소환되었을 때보다 크기가 줄어있었다.
그들이 공격할 때마다, 방어하고 다시 회복할 때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액체가 조금씩 줄어든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날개 끝에서부터 증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전투 천사는 무척이나 강하지만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사제들이 이전에 비해 크게 지친 표정인 것을 보면 신성력의 소모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어쨌든 전투 천사가 합류하면서 거인들을 크게 밀어붙일 수가 있었다. 강력한 육신을 지닌 그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전투 천사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자 상대하기가 한층 편해졌다.
그때 전투 천사들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 어디론가 바라보았다. 아이반 역시 검을 휘두르는 것을 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엘프는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고, 사제들은 기도문을 읊지 못했다. 초월적인 존재가 이곳을 보았다. 아니, 그저 지켜보다 못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신과 자웅을 겨루던 그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땅이 몸을 일으켰다.
숲이라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 산이 기지개를 켰다. 폭풍이 몰아치고, 또 바람이 멎었다.
하늘의 별이, 달이 가려지고 밤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거인(巨人). 위대하고 거대한 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커다란 덩치가 솟아올라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허 .”
아이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그는 악마도 보았고 신의 화신도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나 움츠러든 적은 없었다.
이 덩치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것일까? 이런 존재를 과연 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이반은, 그곳에 있는 모두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불멸자에 한없이 가까운 위대한 존재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그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 그저 건조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 온 세상이 떨렸다. 마치 세계가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 오랜 세월 . 이 땅은 참으로 나약해졌구나.
신이 선언하듯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때리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땅을 딛고 하늘에 닿는 거대한 덩치에 압도당해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속으로 자신의 신을 부르며 얼어붙었다. 그때 이레인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모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 옛 거인이 자신의 힘을 모두 되찾았을 리가 없어. 이건 허세에 불과해.”
그 옛날 신격과 비교되던 초월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도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초월자들이 아무렇게나 이 땅을 거닐던 신화시대는 이미 옛날 옛적에 막을 내렸다. 그렇게 강력한 존재는 차원방벽이 모두 세계 저편으로 밀어냈다.
대륙 전역에서 막대한 신앙을 받는 성황청 아홉 교단의 신들마저도 함부로 지상에 내려오지 못하는 판에 오랜 세월 잠들어 있다가 이제 막 봉인에서 풀려난 원시 거인이 옛 시대의 힘을 모두 발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신이 아니야. 그저 덩치 큰 괴물에 불과해. 우리의 선조에게 밀려난 오래된 패배자일 뿐이지.”
이레인의 차가운 말에 아이반이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렇겠지.”
실로 초월적인 덩치, 압도적인 존재감. 세계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은 위엄. 그러나 잘 살펴보면 어딘가 허술한 점이 있었다. 부풀어 오른 풍선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으드득! 아이반이 이를 갈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 앞에서도 그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옛 시대의 패배자에게 무릎을 꿇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다. 그가 허리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 높고 높아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옛 거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스르륵! 그때 아이반의 옆에서 주력이 솟아올랐다.
나뭇가지가 모이고 잎사귀와 흙이 움직이며 늙은 오크 주술사의 모습을 만들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 그의 분신이 눈을 떴다.
“어때, 그쪽은 정리가 좀 되었나?”
“그럭저럭. 하지만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소. 갑자기 저런 존재가 튀어나와서 말이오.”
아이반이 옛 거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테잔이 껄껄 웃었다.
“흘흘, 그러게 말이야. 더럽게 크네. 식비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겠어. 가만히 내버려 두면 굶어 죽을 것 같지 않나?”
농담처럼 말했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신화시대와 지금은 환경이 달랐다. 저만한 덩치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할 텐데, 숨만 쉬어도 힘이 차오르던 신화시대와 달리 지금은 저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저 녀석이 굶어 죽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그때까지 시간을 끌 수가 있겠소?”
“뭐, 가능은 하겠지. 숲이 사라지고 어쩌면 나라가 하나둘쯤 멸망하겠지만, 그 정도면 싸게 치는 것 아니겠나?”
어차피 망해도 인간의 나라가 먼저 망할 텐데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냐고 테잔이 너스레를 떨자 아이반이 그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주둥아리 좀 조심하시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 말에 테잔이 북동부 오크 사투리로 투덜거렸다.
“주둥아리라니, 말버릇하고는!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는 해도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었어. 하여간 싸가지가 화려한 놈일세. 에잉, 도끼질하는 놈들은 죄다 혀에도 근육이 붙어서 말이 짧아.”
“···내가 다 알아듣는 거 알면서 괜히 그러지 마시오.”
테잔은 못 들은 척 태도를 바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승부를 볼 거면 차라리 지금이 좋아. 녀석이 제대로 힘을 회복하지 못했으면서 무리해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지금? 가능하겠소?”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 모인 것 아닌가? 그리고 명심하게. 우리는 오랫동안 이곳에 붙잡혀있을 수 없다는 것을.”
피의 동맹은 인간들의 나라와 전쟁 중이었다. 귀한 병력을 파견했으니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다음은 없었다. 지금 끝을 내야만 했다.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보려면 죽을힘을 다해야겠군.”
“흘흘, 산다는 것은 항상 그런 법이지.”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매개로 만들어낸 물푸레나무를 테잔이 힐끗 보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여기 좋은 게 있군. 어떻게든 녀석을 붙잡아볼 테니 나머지 녀석들을 처리해보게.”
“믿어도 되겠소?”
그 말에 테잔이 껄껄 웃었다. 다소 능글맞던 이전과 달리 오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지.”
테잔이 땅에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쿵! 숲이 흔들린다.
나무가 노래하고 땅에서부터 힘이 솟구쳐 오른다. 막대한 주력이 아이반이 만든 물푸레나무에 스며들어 그것을 크게 키웠다.
아주 크고, 거대하게. 마치 작은 세계수와 같이 순식간에 자라나자 엘프들이 그것에 힘을 보태었다. 우웅- 다시 한번 정신을 열고 서로를 연결했다.
엘프 하나하나에 잠들어있던 세계수의 정수가 빛을 내뿜고 초월적인 존재를 이 땅에 불러왔다. 옛 거인의 힘이 요정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옛 요정의 힘이 거인을 약하게 만들었다.
스스슥! 대지를 뚫고 뻗어 나온 세계수의 뿌리가 옛 거인의 발을 타고 올라갔다, 그를 묶고 힘을 빼앗았다. 하늘의 끝까지 닿았던 옛 거인의 덩치가 조금씩 줄어든다.
온 세상을 억누르던 존재감이 약해지고 기껏 모았던 기운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옛 거인은 당황하지도 않고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 요정은 이미 떠났는가.
뚜두둑! 옛 거인이 발을 들어 올리자 그를 묶고 있던 세계수의 뿌리가 끊어져 나갔다. 그를 감싸려던 결계가 크게 뒤흔들리며 밀려났다.
엘프 몇 명이 비틀거리며 피를 토했다. 옛 거인이 뿜어내는 기운을 못 견디고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테잔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