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7
“그래, 이래야지. 내가 거인의 허리를 꺾겠다!”
테잔의 분신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나뭇가지와 잎사귀, 흙더미가 되어 흩어졌다.
분신을 유지할 주력마저 뽑아내어 거인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작은 세계수가 더욱더 환하게 빛을 뿜었다.
숲의 뿌리가 다시금 솟아나 옛 거인의 발을 붙잡았다. 그의 멱살을 쥐고 바닥으로 이끌고 내려왔다.
쾅! 옛 거인이 한 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렸다. 엘프들이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정령은 점점 더 많아졌다.
정령들이 주변을 둘러싼 괴물들과 거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황청 뤼안 교단의 사제들이 불러낸 전투 천사들이 거인들의 목을 베었다.
성기사들이 적을 밀어내고 축복을 읊었다.
“생명의 자비를! 물의 분노를!”
적을 쇠약하게 만들고 아군을 회복시키는 신성력이 흩뿌려졌다. 거인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아군의 몸놀림이 가벼워졌다. 창으로 어느 거인의 심장을 꿰뚫은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인들이 지나치게 약해졌소!”
아이반의 오른쪽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세상 만물의 지혜를 담은 그의 눈이 쓰러지는 거인들을 관찰했다.
그들에게서 뻗어 나온 생명력의 흐름이 원시 거인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옛 거인이 자신의 영락한 후손들을 제물로 삼아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긴, 한때는 신격과 싸우던 위대한 존재가 권능도 없이 그저 덩치만 큰 지금 시대의 거인을 자신의 후손이라 여길 리가 없었다. 초월자의 오만한 시선에는 그저 먹기 편한 간식 정도로 보였겠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인들은 전투의 광기에 물들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약해졌다는 것도, 죽어간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피와 전투를 부르짖을 뿐이다.
“하찮은 녀석들아! 모두 쓰러져라!”
“정당한 지배자의 시대가 돌아왔다!”
그저 투쟁심이 강한 수준을 넘어섰다. 스스로 몸을 파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날뛰는 것은 명백히 이상했다.
아이반은 그것이 누구의 수작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던 거인들의 몸에서 짙은 흑마력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위대하고 거대한 자, 옛 거인의 후손이자 정당한 지배자라고 여겼던 거인들이 한낱 고깃덩이 언데드가 되어 다시 일어섰다. 쉬이익-
“윽!”
사나운 이빨이 코를 붙잡았다. 죽어버린 거인들의 육신이 순식간에 썩어 더럽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얼음과 굶주림의 악령, 웬디고가 대신 그 거죽을 뒤집어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웬디고가 크게 비명을 질렀다.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하고 광기를 불어넣는 사악한 정신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사악한 힘이 닿기 전에 작은 세계수가 빛을 뿜었다.
거대하게 자라난 이 땅의 수호목이 아군의 정신을 보호했다. 옛 거인의 권능은 새로 솟아난 작은 세계수에 막혀 상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엘프들이 한낱 악령의 속삭임에 홀려 광기에 물들 리가 없었다.
적은 무척이나 강했다. 그러나 아군은 약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스걱! 거인들의 썩은 몸이 조각나 흩어졌다.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이 성수를 뿜어내 적을 씻었다.
악령이 괴로워하고 조각 난 상태로 꿈틀거리던 언데드가 다시 시체로 돌아왔다. 서서히 주변이 정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막강해 보이던 거인의 군대가 무너져 내렸다.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으나 적은 거의 전멸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적을 쓰러뜨릴수록 옛 거인의 기세가 강해지고 있었다.
저 녀석을 처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내버려 두면 새로운 거인들과 괴물이 합류해서 또다시 군대를 이룰 테니 이참에 끝을 내야만 했다.
쾅! 녀석의 힘이 점점 강해지자 마침내 결계가 깨졌다. 옛 거인의 주먹이 작은 세계수를 후려치고 그것을 꺾었다.
기껏 만들어놓았던 방패가 사라지자 엘프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옛 거인의 권능이 또다시 요정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끊어졌다가 새롭게 연결되었기에 아직 세계수의 힘이 온전하지 않았다. 거대하게 자라난 수호목, 물푸레나무의 보조가 없다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으드득! 아이반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든지 끼어들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던 천둥신을 불렀다.
“토르! 나에게 힘을! 당신의 망치를!”
우르르, 쾅! 천둥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갈라졌다.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고 번개가 아이반의 손에 잡혔다.
우웅- 허리에 두른 힘의 허리띠, 메긴기요르드가 붉게 물들고 힘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렇게 증폭된 힘조차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신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아이반이 몇 번이고 휘둘렀던 번개의 망치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것은 정말로 천둥신의 망치, 하나의 신화를 대표하는 파괴의 상징. 언젠가 한 번 소환했을 때, 잠깐 쥐고 있었던 것만으로 팔이 온통 타버렸던 초월적인 권능. 그 이름은 묠니르(Mjolnir), 뜻은 파괴하는 것.
“으윽!”
아이반의 오른쪽 팔이 떨려왔다.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힘으로도 잠시나마 들고 있기가 벅찼다.
치지직! 묠니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힘에 오른쪽 팔이 조금씩 타들어 갔다. 그 튼튼한 육신이 망치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숯덩이가 되려 했다.
아이반은 더 이상 쥐고 있지 못하고 그것을 집어던졌다. 천둥신 토르가 무수히 많은 거인의 머리통을 박살냈을 때처럼, 옛 거인을 향해 쏘아 보냈다.
쉬이익- 쾅! 옛 거인이 휘청거린다. 묠니르에 얻어맞은 녀석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놈의 움직임에 따라서 온 세상이 흔들리고 땅이 갈라졌다. 어딘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던 옛 거인의 덩치가 줄어들었다.
여전히 거대하고 거대했지만 아까 전처럼 초월적이지는 않았다. 분명 녀석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반은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힘을 다 끌어 모아 날린 일격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오른쪽 팔은 이미 시커멓게 타버렸다.
델피노는 물론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이 신성력을 퍼붓고 있었으나 회복은 더뎠다. – 증오스러운 힘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역시 헛되구나! 옛 거인의 주먹이 다가온다.
유성이 떨어지듯 막대한 힘을 담아 내리쳤다. 결계를 부수고 작은 세계수를 꺾어버린 것처럼 아이반을 짓누르려 했다.
그것을 그가 막아섰다. 피의 동맹 최강의 검사, 깨달음을 얻은 고블린. 스르릉 카락취가 검을 뽑았다.
언제나 품에 안고 있던 낡은 검이 검집을 벗어나 그의 손에 들렸다. 자연재해와도 같은 공격,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옛 거인의 주먹질에 맞서 얇고 가느다란 검을 내밀었다.
툭.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대충 내민 것 같은 검의 움직임. 그러나 세상을 부술 듯이 떨어지던 옛 거인의 주먹이 그 앞에 멈췄다. 신, 초월자, 혹은 세계 그 자체.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폭력으로만 보이는 위대하고 거대한 자. 그런 존재의 주먹이 한낱 고블린의 검을 넘지 못한 것이다.
카락취가 검을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을 논하기엔 주먹이 가볍군.”
쿵! 카락취가 쥐고 있던 검을 비틀어 휘두르니 옛 거인의 주먹이 튕겨 나갔다. 머리 위를 온통 뒤덮던 거대한 주먹이 뒤로 훌쩍 물러나니 어두웠던 세상이 순간 빛을 찾은 느낌이었다.
세상의 멸망이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방으로 강력한 충격파가 퍼졌다.
거인은 한걸음 물러섰고, 카락취는 자세를 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카락취가 옛 거인을 압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위대하고 거대한 자, 옛 거인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 이 작고 하찮은 녀석이란 말인가.
아직 대륙이 제대로 형상을 갖추지도 못한 옛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런 나약한 세상의 피조물이 자신의 주먹을 멈췄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찮게만 여겼기에 무심하던 거인에게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때 신격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자신이 한낱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 짓뭉개버리겠다! 다시 한번 옛 거인의 주먹이 떨어져 내렸다. 벌레를 짓밟듯 발을 들어 올리고 내리찍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카락취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쾅! 카락취가 검을 휘둘렀다.
아이반은 단지 그렇게만 느낄 정도로 너무나 빨랐다. 그저 가까이 다가왔던 옛 거인의 주먹과 발이 튕겨 나가는 것을 보면서 카락취가 맞받아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쉬이익! 차르륵! 옛 거인의 거대한 육신에 검흔이 새겨진다. 카락취의 검이 옛 거인의 손발을 꿰뚫고 육신을 깎아냈다. 그러나 덩치가 너무나 컸다.
한참을 공격하고 있음에도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스슥! 아이반의 곁에서 테잔의 분신이 다시 나타났다.
한동안 옛 거인이 날뛰는 것을 붙잡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게 분신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 할 일이 없는데, 혹시 카락취 혼자서 옛 거인을 쓰러뜨릴 수가 있는 것 아니오?”
허무한 듯이 말하는 아이반의 물음에 테잔이 끌끌 웃음을 터트렸다.
“거인의 덩치가 조금만 더 작았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보기보다 그는 꽤 무리하고 있다네. 사실 카락취는 누군가를 지키는 것보다는 상대를 죽이는 것이 익숙하거든.”
테잔의 말은 결국 그들이 도움이 아니라 방해만 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한 아이반은 물론, 그곳에 있는 모든 엘프와 성황청의 성직자 부대까지 모두 무시하는 말투. 그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숨기고 있는 힘이 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쪽에만 부담을 짊어지우는 것은 곤란해.”
“씨부럴, 열심히 하고 있소. 지금 내 팔이 병신이 된 것은 보이지 않소?”
아이반이 묠니르의 부작용으로 시커멓게 타버린 자신의 오른쪽 손을 가리키며 말하자 테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를, 엘프를, 성황청의 성직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가? 정말로 그게 최선인가?”
아이반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가 코웃음을 쳤다.
“대답하지 못하는군. 그래, 그래야지.”
아이반의 일행도, 요정군단과 프로스트 엘프들도, 성황청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도 결코 대충 싸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적을 상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최선을 다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지 않은가. 요정군단과 프로스트 엘프는 세계수가 불타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것에 대비하기 위해 힘을 비축해야만 했고, 그래서 다른 세력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뻗은 것이기도 했다. 성황청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은 옛 해신의 심장을 대가로 파견된 병력이었다.
신의는 다하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전원 산화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각 세력이 잠시 힘을 합쳤다고는 해도, 안심하고 등을 맡길 만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힘을 아낄 수밖에. 다들 숨기고 있는 비장의 한 수는 있었다.
정말 최악의 상황에나 사용하려고 버티고 있을 뿐.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테잔에게는 무척이나 못마땅한 것 같았다. 그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자네가 말했듯이 잠시나마 힘을 합치는 사이지. 그런데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군. 그게 인간의 본능인가? 요정의 명예인가?”
“···면목이 없군.”
“서로 힘을 합치고도 얼굴을 붉히고 싶지는 않네. 동맹이 얼마나 성의를 보였는지 안다면.”
스걱! 카락취가 마침 옛 거인의 팔뚝을 잘라내는 것이 보였다. 잘려 나간 육신의 대부분은 마력으로 변해 허공에 녹아 사라졌지만, 그러고도 남은 큼지막한 부분이 땅을 때리자 강한 바람과 함께 막대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쪽을 힐끗 살피면서 테잔이 말했다.
“적은 결코 약하지 않아. 모든 것을 동원하지 않으면 크게 낭패를 볼 걸세.”
“알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