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8
“명심하게. 우리는 적을 죽이기 위해 왔지, 그대들을 지키기 위해 오지 않았음을.”
스스슥- 테잔의 분신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로 새로운 거인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옛 거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피와 살점들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있었다.
역시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었다. 화아악- 강한 신성력이 터져 나오고 지쳐있던 아군들에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던 체력이 다시 차올랐다. 아이반은 한참을 치료받았음에도 아직 멀쩡해지지 않은, 시커멓게 타버린 오른쪽 팔을 뻗어 피의 검 브리카를 회수했다.
브리카는 노르드의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잠시나마 구현하는 핵으로 쓰였기에 그동안 빨아들였던 막대한 기운을 몽땅 토해낸 상태였다. 그렇게 비어버린 검을 쥐고 아이반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새로운 신을 불렀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던 그의 이름을 외쳤다.
“프레이, 당신의 차례가 왔소.”
거인족 미녀와 결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칼을 팔아먹은 멍청한 신이라고 하도 욕을 해서 그런지 단번에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이반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니 저 멀리 아스가르드에서 그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나헤임에서 아스가르드로 넘어온 자, 바니르 신족 출신이면서 애시르 신족에 합류하게 된 풍요와 햇빛, 비의 신. 그가 말했다.
멍청하고 하찮은 전사야, 나는 그대에게 흥미가 없노라. 다소 신기하기는 해도 그뿐, 다른 이들과 달리 프레이는 아이반에게 관심이 없었다.
신들의 과분한 관심을 받고 넘치는 영광을 누리면서 감히 그들을 숭배하지 않는 건방진 전사에게 왜 흥미를 느껴야 한다는 말인가. 아이반에게는 신의 호감을 강제로 끌어내는 독특한 힘이 있었으나 프레이는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반의 그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오래된 잘못을 씻어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운명적 과오가 결국 나를 이렇게 만드는구나. 프레이는 한숨처럼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고 멍청한, 하찮은 전사에게 그의 권능을 내려주었다.
한 번 잃어버린 검이다. 그것을 어찌 쓰든 상관치 않겠다.
그의 의지에 따라 피의 검 브리카에 힘이 깃들었다. 프레이의 권능을 담고 그가 한때 지니고 있던 검을 구현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거인을 쓰러뜨리는 검. 그가 스스로 버렸기에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라그나로크에서 활약하지 못해 마침내 이름마저 남지 않은 그 검의 힘이 피의 검 브리카를 채웠다. 우웅- 텅 비어있던 브리카를 채우고도 모자라 밖으로 뻗어 나왔다.
화려하게 치장된 거대한 검의 형상이 피의 검 브리카를 덧씌웠다. 새롭게 태어난 놈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심지어 거친 분노를 토해내며 카락취와 싸우고 있던 위대하고 거대한 자도 순간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이 검이 거인에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쉬이익! 거인을 베는 검이 아이반의 손에서 벗어나 날아올랐다. 스스로 움직여 근처에 다가오던 녀석들을 단번에 베어내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위대하고 거대한 자, 옛 거인을 노리고 쏘아졌다. 푸슉! 거인을 베는 검이 옛 거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거대한 목이 쩍 갈라지며 막대한 피를 흩뿌려놓았다. 전체에 비하면 크지도 않은 상처였으나 그곳으로 폭포처럼 피가 쏟아지고 그 거대한 몸을 유지하고 있던 마력이 빠져나왔다.
옛 거인의 육신이 쪼그라들고 점차 작아졌다. 카락취가 팔을 잘라버린 것에 이어서 아이반의 검이 목을 스치자 옛 거인은 굴욕에 몸을 떨었다.
자신이 이렇게나 영락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친 분노를 토해냈다. – 너희가 밟고 있는 땅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깨달아라! 옛 거인이 소리를 치자 땅이 울리고 세상이 흔들렸다.
폭풍처럼 거센 바람이 흘러나와 주변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기온이 내려갔다. 혹한의 땅에서조차 경험한 적이 없는 추위가 덮치고 온 사방이 얼어붙었다.
쩌저적! 하늘에서부터 세상이 멈췄다. 저 멀리 날아오르던 새가 그대로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지고 손끝 발끝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정말로 바닥까지 힘을 긁어모아 털어낸 아이반의 눈이 자꾸만 감겼다. 이대로 추위에 휩쓸리면 숨이 끊어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그렇게 넘어가는 몸을 사나운 이빨이 받아주었다.
체온이 내려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아이반의 몸을 감싸고 그 냉기를 그대로 받아냈다. 그리고 델피노가 그 앞에 섰다. 오래된 성자의 지팡이를 바로 세우고 기도를 올렸다.
“빛이여,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당신의 자비를. 가장 추운 곳에서도 당신의 온기를.”
화아악! 어둠이 밀려나고 하늘에서부터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빛의 인도를 받은 성황청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이 힘을 보탰다. 착, 착! 물의 장벽이 몇 겹이나 생겨나 순식간에 주변을 감싸 안았다.
반구 형태로 몰아치는 추위를 막았다. 물의 장벽은 외부에서부터 빠르게 얼어붙었으나 아홉 겹을 뚫었을지언정 열 번째를 얼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프로스트 엘프, 혹한의 요정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껏 아끼고 있던 힘을 끌어내고 옛 거인을 노려보았다. 우웅- 발티무어 이리딘의 이마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빛으로 이루어진 무늬가 나타나고 손에 오래된 지팡이가 잡혔다. 스스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났던 옛 요정의 힘이 담긴 신기. 그의 오래된 선조이자 일곱 요정의 하나인 이리딘이 사용했다는 지팡이, 진정한 세계수의 가지. 발티무어의 등 뒤로 얇고 가느다란 실선이 무수히 많이 나타났다.
아이반은 그것이 바로 엘프들을 연결하는 세계수 네트워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영적인 연결이 뻗어나가 요정들을 하나로 묶었다.
이내 옛 거인의 방해를 뚫고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그곳, 요정의 숲에 위치한 세계수의 근원으로 이어졌다. 요정이 노래를 부른다.
숲이 환호했다. 온 세상의 엘프가 이곳을 바라보고 힘을 실어주었다.
모든 엘프의 집합의식이자 그들이 스스로 만든 자신들의 종족신, 세계수가 눈을 뜨고 가지를 뻗었다.발티무어 이리딘이 엄숙히 선언했다.
“태초에 이 땅을 가꾼 최초의 숲지기, 세상의 정원사가 그대를 거부한다.”
이리딘의 지팡이, 진정한 세계수의 가지가 땅을 파고들었다. 쿵! 길고 긴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온다.
두껍게 쌓인 눈이 녹아내리고 새싹이 움텄다. 혹한이 물러나고 숲이 살아 숨 쉰다. 파릇파릇한 초록색이 순식간에 번지고 거대한 세계수의 환영이 나타났다.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매개로 만들었던 작은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닮은 한낱 물푸레나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거대한 세계수가 물질계에 나타나자 온 세상이 떨렸다. 끼이익! 위대한 신격의 등장에 세상이 비명을 질렀다.
차원방벽이 요동치고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는 신격이 기지개를 켰다. – 으으윽! 스스로 신격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던 옛 거인은 자신이 여전히 필멸자를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위대함에 절망하고 무릎을 꿇었다. 세계수가 그를 붙잡았다.
정말로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던 옛 거인을 찍어 눌렀다. 쿵! 거대하고 거대했던 거인의 껍질이 벗겨지고, 거짓된 초월성이 사라지자 카락취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가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다.
옛 거인이 쓰러졌다. 한때 신격과 싸워 세상의 주인이 되려 했던 자는 끝내 세월을 이기지 못했고, 자신이 여전히 필멸자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아야만 했다.
그토록 무시하던 하찮은 피조물들에게 목이 잘리고 심장을 꿰뚫려 쓰러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으나, 결국 땅을 벗어나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아득한 옛 시절에 그가 경험한 것처럼 또다시 치명적인 패배를 겪고 예전보다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불멸자에 한없이 가까운 자이기에 이 죽음이 끝은 아니었으나, 결국 필멸자에 불과했기에 다시 깨어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옛 거인이 쓰러지고 며칠이 지났다.
일행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기력을 회복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질린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땅이 온통 뒤집어지고 지형이 바뀌었다.
언덕이 협곡이 되고, 평지가 솟아올랐으며 숲은 불타거나 얼어붙었다. 그 위에 새로 올라온 파릇파릇한 새싹이 가득했다.
“이대로 숲이 사라지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그래도 세계수가 잠시 나타났다고 온통 푸르게 변했군요. 추위도 훌쩍 물러간 느낌입니다.”
델피노가 차가운 이슬을 머금고 있는 새싹을 톡 건드렸다. 이런저런 초월적인 힘이 휩쓸고 지나간 땅은 참으로 묘하기만 했다. 세계수의 신력이 남아 추위를 몰아낸 숲은 마치 봄이 온 것만 같았다. 전투의 긴장감마저 잔뜩 흐려지고 있었다. 이레인이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치열한 싸움을 벌여놓고 지금은 또 마냥 평화롭네. 며칠 전에 있었던 싸움이 마치 꿈만 같아.”
아직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거인의 잔당들도 처리해야 했고, 옛 거인의 마력에 이끌려서 모여들었던 설인 같은 놈들도 몰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협이라고 할 수 있는 옛 거인은 사라졌고, 나머지는 치명적인 위험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지루한 잔당처리의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리치까지 붙잡았으면 완벽했겠지만 말입니다.”
델피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번 일도 녀석이 핵심이었습니다. 옛 거인의 난동은 멈췄지만, 녀석은 원했던 것을 모두 이루었겠지요. 그게 영 마음에 걸리는군요.”
옛 거인이 깨어나 움직이는 것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그를 막기 위해 여러 세력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세계수가 잠시 이 땅에 현신하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리치가 계획했던 대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크게 의심스러웠다.
“신격이 물질계에 등장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쨌든 차원방벽이 출렁거리게 되었으니까요. 신격이 이 땅에 크게 개입할수록 악마들도 쉽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이게 옳은 일이었는지는 모르겠군요.”
대량의 죽음을 흩뿌리고 혼란을 만들었다. 심지어 옛 거인이 목숨을 잃었으니 죽음의 악마를 숭배하는 리치 입장에서는 소득이 너무 많았다. 결국 옛 거인마저도 이용당한 셈이 아닌가.
“결국 순서의 차이일 뿐이오. 악마가 날뛰는 것을 막겠다고 옛 거인이 휩쓸고 다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
아이반이 한숨처럼 말을 내뱉자 테잔이 옳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래, 당장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뭐, 그렇긴 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반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늙은 오크 주술사 하나가 끌끌 웃으며 서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소?”
“우리는 이제 슬슬 가볼까 해서 말일세. 돌아가기 전에 인사라고 하려고 왔지. 나름 전우가 아닌가?”
능글능글 웃으면서 말을 하던 테잔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나저나 꽤 무리를 했나 보군. 내가 나타난 것도 모르다니. 반응이 늦어.”
그 말에 아이반은 동료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다들 테잔이 나타난 것을 진작 깨닫고 경계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아이반이 쓴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누가 열심히 안 싸우느냐 하도 채찍질을 갈겨서 바닥까지 힘을 쏟아냈더니 영 기운이 없소.”
“그런가? 거참 안된 일이네. 적당히 좀 하지 그랬나? 인제 보니 자네는 참 요령이 없구먼.”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쯧쯧 혀를 차는 테잔에게 도끼를 집어 던지고 싶어서 손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어차피 던져봐야 분신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잘 아는 아이반은 애써 그런 충동을 참아냈다.
“여기까지 와서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나타난 것은 아니리라 믿소.”
“흘흘, 속이 뒤집어졌다면 절반쯤은 성공한 셈이군.”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신경을 살살 긁던 테잔이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가득하던 장난기가 모두 사라진 채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이반 에시르손, 아스가르드의 선택을 받은 노르드 전사.”
“말씀하시오.”
“자네와 악연으로 시작되었으나, 그대가 우리의 적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네.”
“의외로군. 나의 목을 노리는 오크들이 제법 있을 텐데.”
당장 이번에 테잔이 이끌고 온 부대에 있는 오크들만 하더라도 투쟁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러지만 않았다면 이미 몇 번이고 덤벼들었을 정도로 적의가 흘러나왔다.
“혹시 오크로드 카르타크가 내 목을 가져오라고 하지는 않았소? 내가 그 아들을 둘이나 조져버렸는데.”
다소 도발적인 아이반의 말에 테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타크는 그리 말했지. 상당수의 오크가 그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부인하지는 않아. 하지만 나는 자네와 싸우기를 원치 않아.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어째서?”
“자네는 특이점이 아닌가.”
테잔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너무나 깊고 깊어서 마치 호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곧 대지의 심장으로 돌아가네. 그곳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스승 크뮨을 뵙고 열두 번째 대주술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시작하겠지.”
그건 무척이나 영광스럽고 고된 과정이었다. 육신을 깎아내고 영혼을 정련하여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