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89
무수히 많은 자가 실패해서 쓰러졌다. 결국 벽을 넘지 못하고 죽어 사라졌다. 그러나 테잔은 자신이 열두 번째 대주술사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고, 아이반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이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두렵네. 그들이 자네를 공격하고, 그리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는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 투명한 눈동자로 아이반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물었다.
“자네는 어떠한가? 우리와 싸우고자 하는가?”
아이반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벽을 지키며 오크들과 싸웠던 일, 발크룬이 병사를 죽이고 그에게 도끼를 내리찍던 일, 아이반의 창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던 일, 스라칸과 병사가 덮쳐오고 뱀신의 제단에서 그의 팔을 잘라버린 일. 물론 기사 케빈 말그레이의 외침도 떠올랐다.
동부회색성채의 유격부대 대장. 모든 부대원을 잃고 자신조차 팔을 잃은 채 피눈물로 절규하던 그의 모습. 그 모든 것을 떠올리며 아이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분노를 위해 싸우지 않소. 필요하기 때문에 싸울 뿐. 하지만, 우리는 이미 꽤 멀리 온 것 같지 않소?”
그 말에 테잔이 한숨을 내뱉었다.
“뭐, 그렇군. 그 또한 운명의 흐름이겠지.”
테잔은 아이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나운 이빨, 델피노, 이레인. 그들과 눈을 마주친 후 낮게 읊조렸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음을 기억하게.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선택의 결과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야.”
투둑! 테잔의 분신이 흙먼지와 함께 흩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 피의 동맹의 부대가 떠나는 것이 보였다. 선두에는 짙은 로브를 뒤집어쓴 테잔과 검을 품에 안은 카락취가 있었다.
아이반은 순간 카락취와 눈이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가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와도 다시 만나겠지. 그때 서로 검을 들이댈 것인지, 아니면 다시 힘을 합치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카락취가 하늘을 가르던 장면이 선명했다.
그 앞에 자신이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리던 아이반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을 더 가야 하겠어.”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벽을 확인했으니 마냥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비록 그것이 턱없이 높고 두껍다고는 해도. 먼저 피의 동맹이 떠났다.
이후 성황청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이 돌아갔고, 대수림의 수인들이 적당히 잔당들을 퇴치하다가 복귀했다. 그렇게 상황이 안정되면서 아이반의 일행 역시 떠나고자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요정의 숲을 통한 공간이동이 막힌 것이다.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다소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설명했다.
“세계수가 물질계에 잠깐 현신하면서 요정의 숲이 노출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잠시 폐쇄되었으니 이전처럼 대륙을 가로질러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요정의 숲은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번에 좌표가 알려졌으니 새로운 좌표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뤼안 교단의 성직자들이 떠날 때 같이 출발할걸 그랬소.”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정의 숲이 폐쇄되기 전 세계수의 무녀로부터 받은 편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에게 전해주면 된다더군요.”
세계수의 무녀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삐딱하게 곰방대를 피우고 있던 이레인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의 무녀? 시아린 이븐우드? 그녀가 직접 편지를 보냈다고?”
이레인이 아이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있기에 같은 엘프조차 쉽게 얼굴을 보기 힘든 시아린 이븐우드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신기한 모양이다.
“요정의 창고에서 잠깐 마주쳤었소. 이것에 대해 잠깐 설명해주더군.”
아이반이 황금 팔찌, 드라우프니르를 짤랑짤랑 흔들자 이레인이 어렵게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활을 돌려준 것을 보면 그녀의 의지가 있었겠지. 이제야 이해했어.”
그 말에 아이반은 이레인의 손등을 흘깃 살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는 마력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에 발티무어 이리딘이 소환한 진정한 세계수의 가지와 동급인 고대 요정의 신기, 최초의 일곱 요정 중 하나인 팔라시온의 활이 잠들어있겠지. 이번에는 팔라시온의 활이 활약하지 못했다. 요정의 신기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계수가 백업을 맡아서 이리딘의 지팡이를 사용했는데 굳이 추가로 팔라시온의 활을 사용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고대 요정의 신기는 말하자면 엘프라는 종족이 보유한 결전병기라 할 수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껴야만 했다.스윽 아이반은 필레인 그레이우드에게서 편지를 건네받았다.
은은한 꽃향기 가득한 밀랍봉인을 뜯고 편지지를 펼치니 아주 유려하고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닮은 글자들은 모두 요정어였다.
그 옛날 최초로 이 땅에 나타난 고대 요정들의 시대에서부터 사용된 문자는 지금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고, 일반적인 언어체계와는 많이 달랐다. 글자라기보다는 아름다운 그림에 가까워서 자연과 숲을 형상화한 무늬의 나열처럼 보였다.
보통의 인간이 보았다면 이게 편지라는 것도 몰랐을 거다. ‘···이걸 내가 읽을 줄 알 거라고 믿고 보낸 걸까?’ 아이반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엘프를 통해 전달하는 데다 그의 동료 중에는 이레인도 있으니 어지간히 알아들으리라 여겼겠지. 물론 그럴 필요도 없이 아이반에게는 언어학이 있어서 다소 답답한 속도로나마 편지를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이반이 한참이나 편지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자 사나운 이빨이 물었다.
“무슨 내용인가? 물론 개인적인 내용이라면 알려줄 필요가 없다!”
사나운 이빨의 코가 살짝 벌렁거렸다. 아이반은 그동안의 경험상 그것이 사나운 이빨이 웃음을 참으며 농담을 하고 있다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일행들은 리자드맨의 유머 코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딱히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개인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소? 그저 다음 목표가 발견되었을 뿐이오.”
아이반이 편지지를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드워프의 광산으로 갑시다.”
엘프가 숲의 종족이라 불린다면 드워프는 광산의 종족이라 불렸다.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던 위대한 정신이 이 땅에 흥미를 느끼고 스스로 육신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이 최초의 요정, 엘프의 선조라면 최초의 드워프는 대지의 정기가 모여서 생명체로 변한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엘프는 외계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계와 정령계 사이에 요정의 숲을 만들어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프로스트 엘프나 스스로 숲을 떠난 고행자들처럼 일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엘프는 요정의 숲에서 지내고 있으니 지금도 순수한 이 땅의 종족이라 불리기는 어려웠다.
반면에 드워프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종족이었다. 대지가 움트고 최초의 산맥이 생겼을 때, 넘치는 대지의 정기가 뭉쳐서 만들어진 종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령과 같은 자연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원시 거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족이기도 했다.
그 옛날, 바다밖에 없던 세상에 최초로 만들어진 들판과 산맥, 협곡은 모두 원시 거인들의 시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정령의 순수함과 거인의 욕망을 동시에 지닌 그들은 자신들이 탄생한 대지의 속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욱 아름답게 가꿀 수가 있을까 고민을 했다. 그 결과 드워프는 지금처럼 광산을 파고 온갖 보석과 금속을 다루는 장인의 종족이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들에게는 참으로 신비로운 종족이죠.”
타닥타닥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델피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따스한 모닥불까지 겹치니 뭔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가장 몽환적인 점이라면 역시 나무 꼬치에 꿰여서 지글지글 익고 있는 사슴고기. 고소한 향기가 솔솔 풍기니 마음의 짐마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퍼지니 참을 수가 없는지 사나운 이빨이 자신 몫의 사슴고기를 날름 입에 집어넣었다.
아무리 봐도 덜 익은 듯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리자드맨은 생식을 즐기는 데다 미각이 둔해서 차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사나운 이빨이 그렇게 사슴 고기를 으적으적 씹으면서 대꾸했다.
“드워프라, 그렇게 좋은 기억은 없는데. 내가 만난 녀석들은 모두가 아주 까칠한 녀석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부족이 머무는 산맥에도 드워프가 있었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나 보군.”
“그쪽은 지하 광산이고 우리는 습지였으니 영역이 겹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마주할 때가 있었는데,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광산을 개발하다 보면 근처의 물이 더러워지는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 땅을 파고들어 개발해야만 하는 드워프와 물에서 사는 리자드맨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겠지.
“뭐, 그럴 수도 있겠어. 당신은 어떻소? 살면서 드워프를 마주한 적이 꽤 많았을 텐데.”
그 말에 새로 찾은 약초를 빻고 있던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많이 만나기는 했지. 하지만 개인적으로 드워프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
“왜? 무슨 문제라도 있소?”
“으흠, 설명하기 어려운데. 어찌 되었든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자들이 많았어. 나랑은 영 맞지 않더라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기가 설명을 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느끼는 것이 빠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당황하지 말라고, 이 종족은 이럴 것이라 미리 편견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알게 될 테니까. 보통은 개인차가 훨씬 크지.”
그 말에 아이반이 잠시 고민하다가 되물었다.
“예를 들면 당신처럼?”
“뭐?”
“아니, 되었소. 개성은 좋은 것이지.”
잘 익은 사슴고기를 씹어 삼키던 아이반은 힐끗 바깥을 바라보았다. 길고 낮은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사슴고기 냄새 때문인가?’ 원래 아이반은 숲에 있을 때는 극도로 조심하고는 했었다. 조금의 냄새도 풍기지 않겠다고 항상 식량은 건량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일행의 전투력은 평범한 여행자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서 음식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녀석들 정도는 우습게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 마리 늑대 정령, 게리와 프레키를 파수견 삼아 풀어놓았기 때문에 웬만한 짐승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할 텐데 묘한 녀석들이었다. 우웅-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게리와 프레키의 덩치가 조금 더 크게 변하고 흉포한 기세를 뿜어냈다. 컹, 컹! 게리와 프레키가 어두운 숲속으로 달려 들어가 거칠게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몰려들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게리와 프레키가 다시 돌아와 엎드리자 아이반은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상한 일이군. 저 녀석들은 딱히 굶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나운 느낌이야.”
“대륙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숲의 동물들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네.”
이레인이 심드렁하게 말하는 것을 사나운 이빨이 받았다.
“그 말은 이곳 근처에서도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는 말이겠군. 전사의 혼이 울고 있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휘두를 듯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벌써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칼을 쓰더라도 순서가 있어야지. 손님이 집 앞에서 피를 뿌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오.”
화르륵! 아이반은 장작을 추가해 모닥불을 크게 키웠다.
“오늘은 모두 따뜻하게 주무시오. 내일부터는 또 바빠질 테니.”
드워프의 왕국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다른 종족과 대놓고 섞여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폐쇄적인 종족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숨어 살지 않았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뿐 그들의 왕국은 당당하게 드러나 있었다.
짙은 숲이 끝나자마자 잘 포장된 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끝에 거대한 건축물이 보였다. 높이 50m가 넘는 거대한 성벽이 협곡을 가로지르듯 세워져 있었고, 거대한 청동 문에는 화려한 조각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이반은 그것이 그 옛날 최초의 드워프가 탄생했을 때부터 이곳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건축물이 주는 인공물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압도적인 웅장함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엄청나게 크네요. 평소에는 저 문이 활짝 열리는 겁니까?”
델피노가 그리 질문하자 이레인이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