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0
“그건 아니야. 보통은 정문이 모두 개방되는 일은 없고 저기에 있는 문을 열겠지.”
그녀가 성벽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문도 작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정문을 보고 나니 뭔가 초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든 화려하기는 하군.”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사나운 이빨이 코웃음을 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의식이 강한 놈들이다. 입구를 열심히 장식하는 건 당연하지.”
잘 포장된 도로 양옆에는 대륙에 존재하는 각 종족을 나타낸 거대한 동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것들이 마치 드워프의 성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사나운 이빨은 그중에서 리자드맨 동상을 발견하고 리자드맨 전사는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서 투덜거렸다.
“역시 드워프는 재수가 없는 놈들이 분명······.”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가면 된다, 리자드맨! 분명 성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대답을 했는지 바라보니 델피노가 반쯤 몸을 기대고 있던 동상이 삐걱거리며 일행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델피노가 깜짝 놀라서 물러나고 사나운 이빨이 검을 뽑았다. 그러자 왕좌에 앉아있는 드워프의 동상이 거칠게 소리쳤다.
– 감히 드워프의 성문 앞에서 무기를 뽑다니!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나운 이빨은 동상의 외침에도 굴하지 않고 전투태세를 갖췄지만 아이반이 그를 말렸다.
“사나운 이빨, 검을 집어넣으시오. 객이 주인을 위협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아이반의 말을 들은 그가 검을 집어넣으니 드워프 동상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졌다. – 한 번의 무례는 참으나 두 번은 없다. 명심하라.
“알겠소.”
– 엘프, 리자드맨과 인간 둘이라. 그대들은 어찌하여 우리의 왕국을 찾아왔느냐? 왕국이 잠시간 문을 닫기로 한 것을 그대들은 듣지 못하였단 말이냐? 그 말에 아이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어쩐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싶기는 했지만, 설마 왕국이 봉쇄되었을 줄이야.
“강철 모루가 문을 닫았다는 말이오?”
– 그러하다! 아이반은 힐끗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상 현상.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오. 방법이 없겠소?”
– 우리의 왕국이 다시 열릴 때까지 기다리라! 왕국이 언제 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드워프의 고집을 꺾을 수도 없을 테고. 아이반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레인이 슬쩍 끼어들었다.
“얼마 전 북부에서 거인들의 군세가 날뛰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겠지. 그때 도움을 청했음에도 거부한 이유를 알고자 한다. 엘프와 드워프 사이의 오래된 협약에 의하면 그대들은 마땅히 원군을 파견해야만 했어.”
그 말에 차갑게 돌아가라는 말을 반복하던 드워프의 동상이 멈칫거렸다. 그리고 이레인을 빤히 바라보다 되물었다. – 그건 일리가 있군. 하지만 그 오래된 협약을 아무나 들이댄다고 그대들을 안으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 그대는 오래된 협약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가? 자격을 증명하라! 이레인이 자신의 손등을 들어 올렸다.
일순간 마력의 빛이 흘러나오고 그녀의 손등에 문양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요정의 신기, 팔라시온의 활.
“나는 이레인 팔라시온이다. 일곱 요정의 후예이자 그의 계약을 잇는 자로서 드워프가 오래된 협약을 이행하지 않은 이유를 물으러 왔다.”
당당한 그녀의 말에 왕좌에 앉은 드워프의 동상은 한참이고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인정한다.
그대는 그대의 자격을 증명하였노라. 쿵! 쿠구구궁!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성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드워프 왕국의 문이 단 네 명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일행의 시선이 빤히 그녀를 향하자 이레인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활짝 열린 드워프 왕국의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앞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드워프 군대가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키는 작지만, 팔다리가 두껍고 체격이 단단한 것이 모두가 장사 체질이었다. 그런 자들이 줄을 맞춰 일행을 바라보고 있으니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대들은 정녕 옛 협약을 잊었는가!”
이레인이 소리치자 드워프 군대가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그리고 갈색 턱수염이 수북한 드워프 하나가 나타나 호탕하게 외쳤다.
“우리는 옛 협약을 잊지 않았다! 팔라시온의 후예여! 우리는 오랜 벗의 방문을 환영하노라!”
커다란 망치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드워프. 대체로 체격이 비슷하고 거친 머리칼과 수북한 턱수염 탓에 얼굴도 비슷비슷해 보이는 드워프의 얼굴을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들고 있는 특징적인 망치는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작부터 거물이 나타났군.’ 저걸 과연 무기로 쓸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랗고, 이런 걸 휘둘러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힘의 망치 갈라로자는 수많은 드워프의 보물 중에서 손에 꼽을만한 걸작이었다. 그런 녀석을 들고 다니는 자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드워프의 세 왕국 중 하나인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 그는 가까이 다가와 일행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레인을 시작으로 한 명씩 악수를 했는데, 참으로 단단한 것이 제대로 된 전사의 손이었다.
“나는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다! 급작스럽게 연락을 받았기에 오랜 벗에게 예를 다하지 못함을 용서하라!”
“대접을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다.”
“요정의 숲에서 온 사자라고 하기에는 멤버 구성이 조금 특이하군.”
브릭타의 시선이 이레인을 제외한 일행을 스칠 때마다 조금 흔들렸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서둘러 연회를 준비하겠다! 방을 내어줄 테니 그동안 그곳에서 휴식하라!”
엘프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에게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는지 일행을 서둘러 숙소로 안내했다. 잠시나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의도겠지. 드워프와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기에 일행은 순순히 그의 의도를 따라 움직였다.
실제 외교 특사라고 한들 대뜸 첫 만남에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일행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드워프의 왕국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었으나, 방문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드는 물건을 얻기 위해 대륙 전역에서 손님이 몰려드니 그들을 위한 숙소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드워프가 다른 종족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숙소 중에 가장 좋은 곳을 배정받은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며 힐끔 눈을 돌렸다. 종족마다 문화가 다르고 미의 기준이 달랐지만, 모두가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드워프가 마음껏 솜씨를 부려 만들어낸 건물은 그 자체로 예술작품과 다르지 않았다. 감상하듯이 잠깐 방안을 돌아보면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반은 이레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문을 열었군. 옛 협약이란 것이 대체 뭐요?”
유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만든 재떨이를 바라보던 이레인이 곰방대를 물었다. 그녀는 잠깐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설명을 시작했다.
“엘프와 드워프는 모두 오래된 종족이야. 그동안 서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힘을 합친 적도 많았지. 특히나 이 근방, 대륙 북부는 예전부터 아주 험한 곳이었으니까. 옛 협약은 뭐, 일종의 동맹 같은 거야. 이 땅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맺었던 상호방위조약.”
“어떤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입니까?”
엘프와 드워프는 결코 약한 종족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기까지 했던 걸까? 그런 델피노의 의문에 이레인이 그와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것저것.”
그 이것저것에는 인간의 위협이 아주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레인이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 그래서 브릭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이상했군. 인간과 싸우자고 맺었던 협약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따지면서 일행으로 인간을 둘이나 데리고 있었으니.”
어쩌면 포로를 데려왔으니 본보기로 목을 치라는 뜻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반이 헛웃음을 짓고 있으니 이레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협약에는 직접적으로 적이 누구임을 지목하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그 협약이라는 것도 오래전의 일이라 요즘에는 유명무실한 거야. 우리들이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지만 드워프에게는 까마득하겠지.”
“그러면 그 유명무실해진 협약을 들이밀어서 들어온 거요? 드워프가 문을 열어준 게 용하군.”
“뭐, 그거 아니었으면 방법이 없었잖아. 우리가 시간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들어왔으면 된 것 아니냐고 뻔뻔하게 연기를 뿜어내는 그녀에게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들어왔으면 된 거지.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시간이 흘러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해도 협약이 파기된 것은 아니었어. 공통의 이익을 심대하게 위협하는 적이 나타나면 드워프는, 적어도 강철 모루는 도와주러 왔어야만 했어. 그러지 않았으니 아예 헛소리인 것은 아니지.”
이들이 이곳에 자리 잡아 왕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오래전 엘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오래된 은혜를 따진다면 명분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드워프의 왕자를 붙잡고 있는 사이에 당신은 할 일을 해. 요정의 숲에서 온 사자의 일행이라면 완고한 드워프라고 해도 마냥 묶어둘 수는 없을 테니까.”
“고맙소.”
“딱히.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아이반은 숙소를 슬쩍 빠져나와 밖으로 향했다. 중간에 드워프 병사가 그를 발견하고 멈춰 세우기는 했지만, 이곳까지 온 김에 드워프제 장비를 사려고 한다고 하니 결국 보내주었다.
어차피 아이반이 돌아다녀봐야 곳곳에 배치된 드워프 병사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겠지. 일곱 요정의 후예가 동료라고 소개한 인간을 죄인처럼 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일이다. 아이반은 곳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확인하면서 공방 골목으로 향했다.
이곳은 외부에서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 그러니까 드워프 이외의 종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이런저런 공방들이 쪼르르 모여 있었는데, 최근에 왕국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손님 하나 없었다.
아이반은 몇 개쯤 가게를 돌아다니며 뒤적거리다가 어느 구석에 있는 무기점에 슬쩍 들어갔다. 입구부터 화려한 장비들이 전시되어있었는데, 확실히 겉모습부터 평범한 인간 도시의 것들과는 차이가 났다.
“흠, 흠!”
아이반이 헛기침을 하자 가게 한쪽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드워프 하나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날카로운 창이 이곳에··· 으잉? 인간?”
드워프가 어색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아이반의 존재가 무척이나 놀라웠던 모양이다.
“왜 그러시오? 인간 처음 보오?”
“아니, 처음은 아니지. 이곳이야 원래 인간들이 바글바글하게 찾아오는 동네니까.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 있을 리가 없는데?”
“오늘 방문객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나 보군.”
“엘프가 찾아왔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일행이요.”
드워프는 아이반의 말을 그리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게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병사들이 아이반을 확인하고도 별말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무엇이 필요해 오셨나?”
“칼, 창, 도끼나 망치.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물건만 괜찮다면 무엇이든.”
“우리 물건이야 뭐든지 괜찮지. 인간의 장비를 생각하고 들어왔다면 깜짝 놀랄 거야.”
자부심 넘치는 드워프의 말에 아이반이 코웃음을 쳤다.
“글쎄,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는데.”
“뭣이? 그럴 리가!”
“여기 있는 것들, 전부 겉만 그럴듯한 놈들이잖소? 괜히 보석이나 덕지덕지 박아서 호구 잡기 딱 좋은 물건들.”
당연히 드워프제니 물건 자체가 나쁘지는 않았다. 평범한 인간 장인이 만들어낸 것보다는 품질이 괜찮지. 하지만 정말로 대단한 물건들이냐 물으면 당연히 아니었다.
“나는 드워프 관광 상품 말고 진짜 장비가 필요하오.”
그 말에 드워프가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오히려 씩 웃었다.
“그래, 진짜 전사란 말이군.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피의 검 브리카, 드라우프니르, 메긴기요르드, 뱀신의 황금 방패. 그런 것들은 모두 숨겨져 있었지만 아이반이 입고 있는 갑옷 역시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손이 황금 멧돼지 가죽으로 만든 훌륭한 물건이었다. 비록 거친 싸움을 계속하다 보니 영 형편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아이반이 겉멋만 잔뜩 든 녀석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