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2
“왕국의 출입이 폐쇄되고 병사들이 마물과 싸우기 시작했지. 그거야 그렇다고 치지만 브릭타 왕자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들고 나섰어. 평범한 수준이라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파라스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을 알려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긴 단숨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에는 그와 아이반 사이에 신뢰가 깊지 못했다.
“그러면 난쟁이 이야기나 합시다. 이건 숨기지 마시오.”
“그건 좋지.”
파라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도저히 호기심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먼저 물었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 메긴기요르드와 드라우프니르의 모조품이 맞지? 그것도 난쟁이가 직접 만든 물건.”
“글쎄, 난쟁이가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소.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니니까.”
“아마 맞을 거야. 그건 나의 선조가 찾은 물건이니까.”
“그런 것 치고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던데.”
“뭐,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분께서는 끝까지 여행을 계속하셨지. 그 끝에 난쟁이를 만났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분이 남긴 기록을 보고 나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나까지 계속해서 찾아다닐 뿐이야.”
“성과는 있었소?”
“조금은.”
드르륵! 그가 가구를 옆으로 밀고 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마력등이 켜져 있어서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이게 그동안의 성과일세.”
지하에는 온갖 장비가 가득했다. 낡은 책과 양피지가 산처럼 쌓여있고, 한쪽 벽에는 대륙 전체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었다. 그곳에는 빼곡하게 메모가 붙어있었다. 대륙을 몇 번이나 가로지르는 굵은 선을 가리키며 파라스가 말했다.
“이게 난쟁이가 이동한 경로야. 우리는 수백 년을 넘게 그 흔적을 추적했지. 틀림없어.”
“대륙 남쪽, 마경에서 끊어졌군.”
“우리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은 그가 마경으로 향했다는 것뿐일세.”
“들어가지는 못했소?”
그 질문에 파라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노력은 했지. 하지만 마경이 아닌가? 전사도 아닌 내가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었어.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버는 중이었지. 그래야 마경에 함께 들어갈 실력 있는 자들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마경은 몹시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실력자는 웬만한 돈으로는 고용할 수가 없었다. 목적지가 마경이라면 더욱. 그가 선선히 자신의 패를 까놓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거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가능할지 알 수 없다는 절박함.
“만약 자네가 마경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나도 같이 갔으면 해. 나보다 난쟁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짐이 되지는 않을 거야.”
아이반 역시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이유로 찾아온 것이니까.
“좋소. 그러면 우리와 함께······.”
쿵!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고 막강한 마력이 뻗어 나왔다. 온 세상의 마력이 뒤흔들리면서 아이반의 분신을 유지하고 있던 마력도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파라스와 마주하고 있던 분신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아이반이 대뜸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본체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유지력이 강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단번에 연결이 끊어져 버릴 정도라니. 심상치 않았다.
“이건 대체 무슨 일이냐!”
사나운 이빨이 검을 뽑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레인이 표정을 굳히고 활을 꺼내 들었다. 그들이 머리 위로 델피노의 축복이 스며들었다. 드워프 병사들은 갑자기 숙소에서 튀어나오는 일행을 경계했으나 덤벼들지는 않았다. 그들도 지금의 상황에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나운 이빨이 그리 멀지 않은 산을 가리켰다. 강철 모루의 중심부, 불타는 산이었다.
“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진해졌군요. 화산활동이 시작된 걸까요?”
델피노의 물음에 이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불타는 산은 화산이 아니야. 산꼭대기에서부터 땅을 파고 들어가 만든 거대한 용광로가 있을 뿐이지.”
불타는 산, 지진, 강력한 마력장, 이상 현상, 만만치 않은 적. 아이반의 머릿속에 몇 가지 키워드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옛 기억 속에서 그것과 관련된 사건을 뽑아낸 아이반은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드워프가 거인과 싸우러 오지 못한 이유가 있었군.”
아이반이 시커먼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불타는 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용이 깨어났소.”
지진이 멈췄다. 불타는 산에서 솟아오르던 시커먼 연기가 잦아들고 온 사방으로 번지던 마력이 흐려졌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일순간의 평화임을 모르지 않았다. 조금 전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 살기에 아직도 온몸이 떨렸다.
“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사나운 이빨이 검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며 설명을 요구했다. 델피노와 이레인 역시 입을 열지는 않았으나 눈빛으로 물었다.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선주종족인 태초의 드래곤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분신이 지금 시대의 드래곤이었다. 마이너 카피, 분명히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태초의 드래곤과 비교하면 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은 여전히 대륙 최강의 생물로 군림하는 강대한 종족이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종족 중에서 가장 선주종족에 가까운 자들이기도 했으며, 그들 자신이 선주종족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이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도 드래곤은 닿을 수 없는 공포이며 범접하기 힘든 위대한 존재였다. 그저 성장하기만 해도 반신에 가까워진다는 존재를 어찌 가벼이 여기겠나.
“이 마력, 이 살기. 틀림없소. 이건 드래곤의 것이오.”
아이반이 단언하자 이레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이 불타는 산에 있다고? 어째서?”
드래곤은 무척이나 강대한 존재지만 그 수가 무척이나 적었다. 게다가 활발하게 외부활동을 즐기는 종족도 아니었고. 보통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긴 수면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강대한 육신을 유지하고, 또 성장하려면 막대한 수준의 마력이 필요했다. 신화시대에는 온 세상에 짙은 마력이 흐르고 있었으니 상관없었겠지만, 지금 시대에는 세상에 퍼져있는 마력이 크게 부족했다. 만족할 만큼 마력을 얻는 것이 어렵다보니 세월이 흐를수록 드래곤의 활동성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옛 전설에서는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였으나, 최근 수백 년 동안은 드래곤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아마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가 아니라면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많지 않겠지. 그렇다 보니 드래곤이 뜬금없이 강철 모루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일행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는 드래곤의 영역도 아니야. 아주 오래전부터 드워프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니까. 드래곤이 영역을 벗어나 움직였다면 그 소식을 모를 리가 없는데?”
드래곤 정도의 존재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아마 대륙 전체에 이야기가 퍼졌을 거다. 자신의 몸을 숨겨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텐데 그 커다란 몸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는 것을 본 사람이 설마 아무도 없을까. 모두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드래곤은 외부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타난 거요.”
아이반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덧붙였다.
“나야 대장간의 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훌륭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이 중요하다더군. 질 좋은 금속을 뽑아내는 데 필수적이라고.”
단순히 온도가 높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 자체에 신비로운 마력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온갖 신비로운 금속을 녹이고 마법 같은 힘을 불어넣을 수가 있지.
“드워프의 세 왕국은 각자 쇠를 달구는 방법이 다르오. 혹시 그것에 대해 알고 있소?”
사나운 이빨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델피노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이레인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은빛 용광로는 달빛을 받아 불을 피우고, 청동 망치는 들끓는 화산의 불꽃을 사용하오. 그리고 강철 모루는······.”
이레인이 곰방대를 만지작거리다가 아이반의 말을 마무리했다.
“···그래,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으로 쇠를 녹인다고 했었지.”
오래된 바다의 신,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남긴 심장에 바다를 다룰 수 있는 권능이 깃들어 있듯, 반신을 넘어선 화염 드래곤의 심장에는 불을 다룰 수 있는 권능이 깃들어 있었다. 강철 모루는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으로 용광로에 불을 붙이고 지금처럼 번성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쌓은 업이 다시 돌아온 셈이다.
“심장만 남은 화염 드래곤이 부활한 거요. 아마도 불타는 산 내부는 이미 던전으로 변해버렸겠지.”
불타는 산이 던전으로 변하고 부활한 화염 드래곤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강철 모루가 봉쇄된 것도 당연했다. 당장 자기 집이 불타고 있는데 거인의 군대를 막으러 갈 수도 없었겠지. 보통일이 아니었으나 자기네 안방을 빼앗겼다는 것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드워프의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으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우러 가야 합니까?”
델피노의 물음에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드워프는 자존심이 무척이나 강해. 그들이 먼저 요청한 것이 아니라면 도와준다고 해도 곱게 보지는 않을걸.”
“화염 드래곤이 상대라면 이들도 그리 여유롭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결국은 이겨내겠지. 여기는 강철 모루야. 진짜 화염 드래곤도 아니고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화염 드래곤에게 왕국을 뺏길 만큼 드워프가 약하지는 않아.”
던전의 화염 드래곤은 어떤 면에서 실제보다 더욱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원본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게 이레인의 판단이었다.
“글쎄, 물론 그렇기는 하겠지만······.”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타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정말로 드워프들이 화염 드래곤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가 있을까? 그러던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도와야 하오.”
“드워프들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들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거요.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지 않을 테니까.”
아이반은 자신의 몸을 스쳐 지나간 흉포한 용의 마력을 떠올렸다. 그리고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드워프들이 화염 드래곤을 죽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놈이 도망가는 것을 막지는 못하오.”
“뭐?”
“이대로라면 녀석이 던전을 벗어나 밖으로 빠져나갈 거요. 그러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지. 적어도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될 테니까.”
던전은 마력과 공상, 흘러간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허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었고, 때로는 이 땅을 덮어쓰고 현실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아이반은 오래된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흐릿한 기억을 통해 이 근방이 얼마나 개판이 되었는지 알았다. 잃어버린 화룡의 심장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길고 지루한 싸움을 반복해야 하는지도.
“던전 내부의 힘이 이만큼이나 바깥으로 새어 나왔소.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요.”
그때 걸걸한 드워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이 많지 않다! 그대는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어깨에 걸치고 저 멀리서 브릭타가 걸어오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그의 갈색 수염이 이전보다 조금 더 꼬불꼬불하게 변한 것을 보면 화염 드래곤과의 싸움이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쿵! 그는 묵직한 소리를 내는 갈라로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민망한 듯이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손님 대접이 엉망이군. 이미 눈치챈 모양이니 솔직하게 말하면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나름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크게 연회도 베풀고 했는데 망할 드래곤이 몸을 뒤트는 바람에 다 글러 먹었다고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상황이 이러하여 옛 협약을 지키지 못하였다. 오랜 벗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부디 우리의 사정을 이해하였으면 좋겠다.”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있었으면 미리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요정의 숲에서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거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대들이 또 다른 적과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노라!”
그렇게 대답한 브릭타는 이내 표정을 굳히고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말로 망할 드래곤이 도망쳐서 주변을 불바다로 만든다면 더는 우리의 일만은 아닌 법. 그대의 추측은 확실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