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3
“추측에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소? 하지만 가능성을 따지자면 열에 아홉은 그러리라 생각하오.”
“허, 드래곤이 도망을 친다고! 아무리 던전의 마력으로 부활한 녀석이라고 해도 그런 자존심도 없단 말인가!”
브릭타는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런 가능성이 생긴 이상,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보통의 드워프라면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강철 모루의 왕자였다. 다른 종족과의 관계나 이후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히 녀석이 도망치려고 하면 붙잡기는 어렵겠어. 난감한 일이군.”
브릭타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대들이 합류한다면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모르지.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 하는 것 아니오?”
“그래, 그렇지.”
그는 표정을 가다듬고 한층 진지해진 얼굴로 도움을 요청했다. 자존심 강한 드워프에게서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왕자의 의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면목이 없는 일이지만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나의 나라, 나의 백성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면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이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워프가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도와달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대들의 오래된 벗이니 옛 협약에 따라 합류하겠어. 나의 동료들 역시 그대들의 힘이 되겠다.”
델피노가 그에 동의했다. 사나운 이빨이 검을 들어 올리며 언제든지 싸울 수 있음을 알렸다.
“녀석을 처리하고 나면 실로 만족할 만큼의 보상을 주겠다. 세간에는 요정의 창고가 드워프의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지 알려주겠노라.”
세상의 모든 황금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강철 모루의 왕자가 하는 말이었다. 대가가 부족하지는 않겠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일 아침, 불타는 산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아이반은 그러한 소식을 파라스에게 전했다. 어쨌든 앞으로 난쟁이의 흔적을 쫓아서 마경에 같이 갈 동료였으니 알려주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강철 모루 전체를 뒤흔드는 지진과 강력한 마력의 흐름, 갑자기 사라진 아이반의 모습에 불안해하고 있던 파라스는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보게. 전해줄 것이 있으니까.”
자신의 창고를 한참이나 뒤적거리던 그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상자를 가져왔다. 그리고 쇠로 만들어진 장갑 하나를 꺼내서 내밀었다. 아이반은 그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야른그레이프로군.”
야른그레이프(Jarngreipr), 토르가 가지고 있다는 세 가지 보물 중 하나. 무쇠로 된 장갑. 이 무쇠 장갑은 당연히 토르의 진품은 아니었고, 심지어 아이반이 가지고 있는 메긴기요르드처럼 난쟁이가 만든 물건도 아니었다. 분명히 잘 만들어진 명품이었으나 초월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옛 노르드 신화를 바탕으로 파라스가 직접 만들었겠지. 그는 옛 신화를 따라서 무쇠 장갑과 힘의 허리띠를 만들어보았으나 자랑스럽게 내밀 수준은 아니라고 했다. 아이반이 가지고 있는 메긴기요르드를 확인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더욱 크게 느꼈다며 쓰게 웃었다.
“자네에게는 그 허리띠가 있으니 내가 만든 것은 필요가 없겠지만 이건 가져가게.”
그는 흘깃 아이반의 오른쪽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이 몇 번이나 타들어 갔다가 회복된 흔적이 있더군. 이게 한 번 정도는 도움이 될 걸세.”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 스파크가 튀었다.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천둥신이 매우 흡족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불만이 많았다. 이전 거인 사냥에서 자신의 묠니르보다 프레이의 거인을 베는 검이 더욱 활약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묠니르는 맨손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쇠 장갑 야른그레이프가 있어야만 묠니르의 짧고 뜨겁게 달궈진 손잡이를 제대로 쥘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쇠 장갑이 대단치 않아서 겨우 한 번밖에 견디지 못하겠지만 이제는 프레이의 검 따위보다 자신의 망치가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천둥신의 목소리를 따라 아이반의 몸에서 스파크가 번쩍이며 피어올랐다. 아이반은 그것을 무시하면서 무쇠 장갑을 착용했다. 오른손에 부드럽게 착 달라붙은 것이 확실히 드워프의 솜씨였다. 비록 신화 속 보물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명품은 명품이다.
“이건 얼마나 하오?”
설마 또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냐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아이반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파라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부족한 물건으로 돈을 받을 수는 없네.”
“관광 상품은 잘도 팔아먹고서는.”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과 그렇게밖에 만들지 못한 것은 다르니까.”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명심하게. 자네가 정말로 천둥신의 가호를 받아서 묠니르를 휘두를 수가 있다면, 그 무쇠 장갑은 한 번밖에는 견디지 못해. 신중하게 사용해야 해.”
무쇠 장갑을 낀 오른쪽 손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던 아이반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거면 충분하지.”
덥다. 피부에 달라붙는 공기가 후끈 달아올라서 이글거렸다. 위치로 따지자면 대륙 북부,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시기라 싸늘한 바람이 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른 열풍만 가득했다.
“불타는 산은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다. 하지만 아직 안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이런 것은 망할 드래곤의 영향이지.”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그렇게 말한 후 입을 다물었다. 드워프 왕국의 자랑이 이렇게 변한 것이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드워프 군대는 불타는 산을 포위한 채 전투를 준비했다.
던전이 현실에 완전히 뿌리내리고 내부에 갇힌 녀석들이 밖으로 쏟아졌을 때 막아낼 수 있도록. 사실 지금도 일부는 내부 정리를 위해 던전에 진입해있었고, 또 일부는 강철 모루 외부에서 전투 중이었다. 드래곤은 모든 짐승과 괴물의 왕이었다.
옛 거인의 마력에 이끌려 설인과 예티, 사스콰치 같은 놈들이 모인 것처럼 드래곤의 마력에 이끌린 놈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로 던전이 터지고 화염 드래곤이 나타나면 개판이 되겠어.’
아이반은 자신의 오른쪽 손을 만지작거렸다.
지난밤에 파라스에게 받은 무쇠 장갑의 딱딱한 감촉이 그를 안심시켰다. 왕자 브릭타를 중심으로 잔뜩 무장한 드워프 몇몇, 그리고 아이반의 일행이 불타는 산에 함께 진입할 예정이었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화염 드래곤을 상대할 인원인 셈이다.
“불타는 산 내부는 이미 이계로 변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행에게 경고한 왕자 브릭타가 갈라로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앞장서서 나아갔다. 이미 몇 번이나 던전 안으로 들어가서 싸우고 빠져나온 그의 걸음걸이는 거침이 없었고, 또 무척이나 신중했다.
불타는 산의 시작 부분에는 내부로 들어가는 거대한 입구가 있었다. 일행은 그 어둡고 일렁이는 공간을 지나 안으로 향했다.
탁! 던전의 입구를 통과할 때 아이반이 살짝 뛰었다가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 소리에 움찔 놀라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불타는 산의 내부는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바닥과 벽, 천장까지 모두 매끄럽게 다듬어져서 자연적인 동굴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한동안 그런 입구를 걸어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 높은 곳에서 저 지하 바닥까지, 그 거대한 공간에 성 하나가 만들어져있었다.
이리저리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다리와 돌계단, 다양한 석상과 벽화로 장식된 건물. 산을 파고들어 만든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내부가 크고 섬세했다. 공간의 답답함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심지어 지하수가 성을 감싸고 흐르게 되어있었다. 천장에는 무수히 많은 마력석이 박혀서 빛을 뿜어냈다.
덕분에 지하임에도 그리 어둡지 않아서 그 모든 것이 잘 보였다.
“···대단하다.”
드워프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사나운 이빨마저 그렇게 중얼거릴 정도였다. 예전에 보았던 피눈물 지하 성채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곳과 비교하면 왕궁과 움막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일행이 그리 감탄하고 있으니 옆에 있던 드워프 하나가 뽐내듯이 말했다.
“이곳이 바로 불타는 산의 내부, 붉은 공방이오.”
자부심을 가질만했다. 이 정도 규모의 지하 도시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드워프밖에 없을 테니까. 드워프 병사들의 어깨가 펴지고 표정이 당당하게 변했다. 그러나 왕자 브릭타는 오히려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평소 망치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했지. 그러나 지금은 조용하기만 하군.”
그 말에 모든 드워프들이 숙연해졌다. 무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다리를 건너 지하에 만들어진 성, 붉은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내부에 전투의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붉은 공방의 일부가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건 아마 이곳이 던전으로 바뀌고 몬스터가 나타났기 때문이겠지.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흔적이 많아지더니 그 끝에는 아직 전투 중인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청동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살기를 뿌리며 팔을 휘둘렀다. 그 주먹을 피하고 어느 드워프가 망치로 청동상의 머리를 후려쳐 날렸다.
쿵! 쓰러진 녀석에게 몇 번이나 망치를 내리찍어서 아주 고철덩이로 만들어버린 드워프가 이쪽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왕자님! 이제 오셨습니까!”
드워프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브릭타는 손을 대충 들어서 인사를 받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상황은 어떤가?”
드워프는 자신이 직접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청동상을 아쉬운 듯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기랄! 어제와 다른 것도 없습니다. 망할 드래곤이 우리 작품을 다 망치고 있지요.”
“놈이 움직이지는 않고?”
“가끔 지랄병이 도졌는지 날뛰긴 합니다. 아직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녀석이 정말 도망칠 것 같나?”
브릭타가 그리 묻자 드워프는 힐끗 아이반을 바라본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악한 놈입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서 다시 살펴보니 수상쩍긴 하더군요. 용족의 자존심만 아니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차피 심장의 마력과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놈, 제대로 된 드래곤이 아니니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이반은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 부서지는 것을 본 청동상 외에도 돌이라거나 쇠라거나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이 파괴된 흔적이 널려있었다. 이레인은 그걸 보며 낮게 말했다.
“용아병이야. 드래곤이 드워프의 작품을 일으켜서 자신의 병사로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네.”
자신들이 만든 조각이나 동상이 자신들이 만든 무기를 들고 덤벼들고 있는 셈이다. 상대하고 있는 입장에서 눈물이 흐르겠지. 어쨌든 드워프 병사들이 만들어놓은 방어선 너머,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최전선으로 향했다.
여기부터는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피우웅! 쾅! 저 멀리 서 있던 동상 하나가 이레인의 활에 꿰뚫려 박살이 났다.
드워프들이 그녀를 바라보자 이레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 동상이 고개를 돌렸어. 움직이기 전에 처리했지.”
“···저건 원래 그런 물건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훌륭한 대처였노라.”
드래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공기가 한층 뜨거워져서 슬슬 숨 쉬는 것이 답답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르르르르 거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때때로 땅이 흔들리고 거친 용의 마력이 흘러나왔다.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온몸을 자극했다. 아직 용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입안이 마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녀석이 몸을 뒤틀고 있는 모양이군.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것을 보니 정말로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겠어.”
가끔 덤벼드는 용아병을 처리하며 안으로 향했다. 붉은 공방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용광로의 중심에 도착하자 아주 뜨거운 열기가 새어 나왔다. 항상 불과 함께하기에 웬만한 화염에는 내성이 있는 드워프의 피부마저 붉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빛이여, 당신의 자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