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4
델피노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며 기도를 외웠다. 그에게서 신성력이 뻗어 일행의 몸을 감싸 안았다.
느껴지는 열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녀석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 붉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두 날개는 무척이나 커서 자신의 몸을 다 가릴 정도였고, 날카로운 이빨은 웬만한 성인 남성의 몸통 크기는 될 것 같았다. 강철을 종이처럼 쥐어뜯을 발톱과 온몸에 꿈틀거리는 근육, 창칼이 박히지 않는 단단한 비늘이 보였다.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허공에 불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지상 최강의 생물, 드래곤이 일행을 노려보며 낮은 짐승 소리를 흘렸다. 그르르르 쿵! 녀석이 몸을 뒤틀자 땅이 흔들렸다.
이곳에 가득한 마력이 모두 그들을 배제하듯 날을 세웠다. 심장이 쪼그라들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옛 거인이 내뿜는 살기보다 더욱 거칠었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가득해서 훨씬 강하게 느껴졌다.
브릭타가 크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녀석은 아직 움직이지 못한다!”
화염 드래곤은 두껍고 커다란 쇠사슬로 몸이 묶여있었다. 그건 족쇄였다. 이 던전에 종속된 존재라는 증명. 그러나 녀석의 몸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제 녀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잠시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그 선을 넘어간 순간, 세상이 시뻘겋게 변하며 불타올랐다. 델피노가 만들어낸 보호막에도 불구하고 이글거리는 열기가 덮쳤다.
조금 전 있던 붉은 공방의 가장 깊은 곳, 용광로가 아니었다. 세상 모두가 불꽃에 휩싸여있는 화염 드래곤의 영역이었다.
녀석은 비록 던전의 힘으로 부활했으나,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정도로 강했다. 이 영역에서만큼은 실제 드래곤과 그리 다르지도 않겠지. – 드워프···! 증오스러운 녀석들! 정신을 후려친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강력한 사념파가 흘러나왔다.
화염 드래곤의 분노가 그대로 전해졌다. 화르륵! 짙은 불꽃을 몸에 두르고 있는 녀석에게는 더 이상 쇠사슬이 보이지 않았다.
던전의 족쇄는 녀석이 벗어나는 것을 막을 뿐이었다. 자신의 영역에서 그런 제약은 없었다.
“전원! 전투준비!”
아이반이 소리치는 것과 함께 불꽃이 쏟아졌다. 땅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육신이 그대로 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브릭타가 무기를 휘둘렀다. 힘의 망치, 갈라로자. 쾅! 땅이 몸을 일으킨다.
흙더미가 솟아나 순식간에 성벽의 모습을 하고 드래곤의 불길을 막아냈다. 뜨거운 화염이 일행의 몸이 아니라 하늘로 흘러나갔다.
쿵! 브릭타가 다시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바닥에서 두꺼운 쇠사슬이 솟아나 화염 드래곤의 몸을 붙잡았다.
차르륵! – 감히 누구를 붙잡으려 하느냐! 화염 드래곤이 소리치는 것과 함께 쇠사슬이 터져나갔다. 녀석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살기가 실체화되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웅- 사나운 이빨이 뱀신 모르나에게 받은 석화의 마안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잠시나마 녀석의 몸을 멈추려는 의도, 그러나 화염 드래곤이 가진 강력한 항마력을 뚫을 수가 없었다.
잠시도 멈추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르륵 사나운 이빨의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용의 심장을 뱀신에게 바치겠다!”
쉬이익! 검에서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검기가 화염 드래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녀석의 피부조차 긁지 못했다.
사나운 이빨이 뿜어낸 마력이 허공에서 흩어졌기 때문이다. 실로 강력한 마력장악력. 숙련된 전사의 검기조차 녀석이 만들어낸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 죽어라! 벌레 같은 놈! 용언. 드래곤을 세상의 여타 다른 종족과 구별 짓는 가장 강력한 특징. 태초의 드래곤이 세상의 창조자로서 가진 권능이자 지금 시대의 드래곤이 그들의 분신이라는 증거. 스스슥! 드래곤의 의지에 따라 세상의 마력이 움직였다. 화염의 폭풍이 생겨나 밀려왔다.
모든 것을 갈아버리고 불태워버릴 힘이 다가왔다.
“갈라로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의 이름을 부르며 허공을 후려쳤다. 드워프의 보물, 갈라로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화염 폭풍을 밀어냈다. 그렇게 만들어낸 틈으로 그가 뛰기 시작했다.
허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착착착! 바닥에서부터 땅이 솟아오른다.
그것이 계단으로 변해 브릭타를 단단하게 받쳤다. 그렇게 거리를 좁힌 브릭타가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 멈춰라! 우웅-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던 브릭타가 느릿해졌다.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지던 갈라로자는 마치 거북이가 걸음을 내딛듯 느려서 누구도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은 드래곤의 영역이었다.
녀석의 의지에 따라서 시간과 공간마저 움직였다. 쾅! 갈라로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브릭타는 자신의 몸을 붙잡고 있던 굳어버린 시간을 깨버리고 나왔지만 그사이 드래곤은 훌쩍 물러나 허공에 날아올랐다. – 너희가 내뱉는 숨결마저 역겹다! 스스슥! 땅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의 마력을 받아 탄생한 용아병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저 놈이···!”
드워프들이 이를 악물었다. 용아병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 너희의 업이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용아병이 덤벼들고 하늘에서는 마력이 거칠게 요동쳤다. 금방이라도 태양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이반은 녀석을 노려보다 손을 뻗었다. 무쇠 장갑을 끼고 있는 손이었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다.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모든 이들이 매우 놀라며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드래곤의 영역, 녀석의 의지대로 조종되는 세계였다. 그런 곳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는 것은 녀석의 세계를 자신의 힘으로 덮어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의지만으로 세계의 법칙을 뒤흔드는 드래곤보다 아이반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욱 강해야만 가능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인 셈이다. 그러나 아이반의 상황은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대한 힘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으드득!
‘빌어먹을 토르!’
파라스가 건네준 무쇠 장갑을 믿고 묠니르를 소환하려던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힘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그가 불러오던 묠니르의 힘을 뛰어넘는 막대한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묠니르가 내뿜는 번개에 아이반이 타죽지 않겠다고 여긴 토르가 절제하지 않고 마음껏 힘을 불어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영역을 뒤흔들고 있는 것은 아이반의 의지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묠니르가 활약하는 것이 보고 싶은 천둥신의 의지였지. 아스가르드의 전사, 신의 챔피언으로서 천둥신의 의지를 지상에서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아이반만 죽을 지경이었다.
우웅- 피의 검 브리카가 아이반의 몸에서 나타나 바닥에 박혔다.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브리카가 흘러넘치는 신력을 삼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황금의 팔찌, 드라우프니르가 마력을 빨아들였다. 뱀신의 황금 방패가 펼쳐져 그의 앞을 가리고 허공에 떠올랐다.
막대한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천둥신의 기운은 더욱더 강하고 억세게 흘러들어왔다. 쾅! 하늘에서 굵은 번개가 내리친다.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이반의 손에서 번개의 망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의 신화를 대표하는 최강의 무기, 파괴의 상징. 묠니르(Mjolnir), 뜻은 박살 내는 자. 콰과광! 아이반의 주변으로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달려들던 용아병이 그 벼락에 맞아 쓰러진다. 그저 묠니르가 소환된 여파만으로 적들이 타들어갔다.
확실히 이전보다 강력했다. 이게 조금 더 원래의 모습에 가깝겠지. 우웅- 천둥신의 힘을 듬뿍 머금은 묠니르가 덜덜 떨렸다.
당장 아이반의 손에서 벗어나 적의 머리를 깨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맨손으로 잡았다면 벌써 아이반의 반신이 타들어 갔을 거다.
무쇠 장갑은 그런 묠니르의 힘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는 못 버티겠어.’
무쇠 장갑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틱틱 들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안했다. 사실 아이반 역시 그 힘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직 내 힘을 모두 받아내기엔 부족하군. 실망한 듯한 천둥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이 새버렸다는 것처럼 아이반의 몸에 들어차던 천둥신의 힘이 훌쩍 줄어들었다.
아이반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제야 몸을 움직일 수가 있게 된 아이반이 묠니르를 집어던졌다.
산을 밀어내듯, 바다를 가르듯, 땅을 누르고 하늘을 들어 올리듯. 필멸자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무거운, 불멸자에게는 한없이 가볍고 가벼운 힘으로 천둥신의 망치를 놓아주었다. 쉬이익! 천둥신의 망치는 순식간에 날아가 드래곤의 머리를 부수려고 했다.
– 어림없다! 용의 의지에 따라 수십, 수백 겹이나 되는 공간의 벽이 나타났다. 망치의 앞을 막고 시간을 멈췄다.
파괴하는 자, 묠니르는 그 시간과 공간의 속박마저 부쉈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드래곤조차 움찔할 수밖에 없는 힘, 초월적인 기운. 눈앞까지 다가온 천둥신의 망치를 바라보면서 드래곤은 오히려 자신을 시간의 벽으로 감싸 안았다. 자신의 시간을 빠르게 돌려 잠깐의 틈을 만들었다.
흐아아압 화염 드래곤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주변의 모든 마력을 가슴에 담았다.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이 그것을 순식간에 불꽃으로 바꾸어놓았다.
천둥신도 아니고 천둥신의 화신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하찮은 인간에게 쓰러져서는 안 된다.
심장을 뽑히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그런 비참한 최후는 인정할 수 없었다.
불을 머금은 용이 생존의 의지를 담아 뜨거운 화염을 토해냈다. 용이 가진 가장 순수한 형태의 권능, 용의 숨결이었다.
화아아아 천둥신의 망치와 용의 숨결이 마주쳤다. 그러나 그 장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불타서 죽을 것 같았다.
쿵!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주변의 땅이 솟아오르고 순식간에 성의 모습이 되어 일행을 감싸 안았다.
콰과광!
“으흠!”
강한 폭발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완전히 밀폐된 성 내부의 공기가 점차 달아올랐다. 용의 숨결이 두꺼운 흙과 바위를 뚫고 스며든 것이다.
마치 거대한 찜통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이 이럴 정도니, 바깥은 얼마나 끔찍한 불지옥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성을 후려치는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고, 살을 찌르는 듯한 살기도 사라졌다. 델피노가 모두에게 축복을 내리고 보호막을 씌웠다.
브릭타가 갈라로자를 휘둘러 성을 해체했다. 땅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흙과 바위가 녹아서 용암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독한 연기가 가득했다. 온 사방이 불꽃으로 가득했다.
모든 공기가 용의 불꽃을 머금고 타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마 델피노의 축복과 방어막이 없었다면 그대로 폐가 익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레인이 정령을 불러서 녹아내린 땅을 식혔다. 독한 연기를 몰아내고 신선한 공기를 채웠다.
숨을 참고 있던 일행들이 그제야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드래곤은? 녀석은 죽었나?”
누군가 그렇게 읊조리자 아이반이 움찔했다. 저런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영 불안해진 것이다.
묠니르를 소환한 여파로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상태였지만 검을 들어 올렸다. 어디선가 용이 들이닥쳐도 반응할 수 있게 날카롭게 감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