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5
탁! 어느새 발에 닿는 느낌이 달라졌다. 온 사방에 가득하던 열기가 사라지고 붉은 공방의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왔다.
“드래곤의 영역이 사라졌다! 왕자님! 녀석이 쓰러졌습니다!”
“아직 방심하지 마라!”
시야를 가리던 독한 연기가 모두 빠져나가자 드래곤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화염 드래곤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끝내 묠니르가 용의 숨결을 뚫고 녀석의 머리를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그 반동으로 아이반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곤했고, 마력 회로와 신성의 그릇이 과부하가 되어 더는 싸울 수가 없었지만 드래곤을 해치운 대가로는 정말 가볍기 그지없었다.
툭! 자신의 역할을 다한 무쇠 장갑이 그야말로 고철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비록 천둥신의 마음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파라스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 수 있을까?’
아이반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드래곤의 시체를 뒤적거리던 드워프가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없습니다!”
“뭐?”
“녀석의 심장이 사라졌습니다!”
전투가 끝났다고 반쯤 풀어져 있던 일행들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불타는 산이 던전으로 변한 것은 모두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 때문이었다. 그런데 화염 드래곤에게 심장이 없다니, 그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혹시 부서진 것이 아니오? 오랜 세월이 흘렀고, 급하게 용의 숨결을 내뱉었으니 혹시 파괴되었을지도 모르지.”
아이반이 물었으나 드워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이 겨우 그런 불꽃 한 번 내뱉었다고 부서진다니!”
물론 화염 드래곤의 숨결은 겨우 그런 불꽃이라고 폄하 당할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수천 년간 불타는 산의 용광로를 데우던 용의 심장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강한 모양이다.
“아무리 강한 용의 심장이라고 해도 수천 년쯤 굴리면 부서질 것 같은데······.”
사나운 이빨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아이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리고 브릭타에게 물었다.
“심장은 하나요?”
“뭐?”
“강철 모루가 가진 화룡의 심장이 하나가 확실하냐는 말이오!”
사나운 이빨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강한 용의 심장이라고 해도 수천 년쯤 사용하면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산 하나를 통째로 용광로로 사용하던 거대한 규모의 공방이었다. 이런 크기의 공방을 유지하려면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물론 용의 심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 세월이 수천 년이라면 용의 심장이 품은 무한한 마력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부서지기 충분한 세월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강철 모루가 가진 용의 심장은 하나일까? 그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정말 하나의 심장으로만 유지되었을까? 수천 년간 쇠약하지 않은 화력을 본 사람들이 가장 뜨거운 화룡의 심장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하나가 아닌 것이 아닐까? 아이반의 물음에 브릭타가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낮게 대답했다.
“···셋.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는 화룡의 심장 세 개가 번갈아 가며 달군다.”
화룡의 심장은 실로 막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 에너지원이지만 하나만으로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오십 년에 한 번씩 교대하면서 용의 심장에 백 년의 휴식기를 주기 때문에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는 것이다.
강철 모루가 화룡의 심장으로 불을 지핀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었으나 그 수가 셋이나 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강철 모루의 왕가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보물을 만들어내는 드워프의 나라이기에 보물이 지닌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용의 심장이라는 보물이 세 개나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아이만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젠장, 그러면 그렇지.’
브릭타는 드워프라는 종족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영웅이었다.
그에게 힘의 망치 갈라로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곳이 강철 모루의 중심부라면 드래곤 하나 정도야 뚝딱 해치울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결국 드래곤이 던전을 벗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그래서 강철 모루가 개판으로 변하고 드래곤과 한참이나 전쟁을 벌이게 된다고? 애초에 드래곤이 하나가 아니었던 거다. 브릭타와 강철 모루 병사들이 힘을 합쳐 드래곤을 쓰러뜨렸지만 남은 하나를 붙잡지 못하고 놓쳤던 모양이지. 지금 브릭타의 표정을 보면 드래곤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긴, 이미 한참이나 옛날에 죽어버린 드래곤의 심장이 던전의 핵이 되어 부활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게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찌 예상할 수가 있을까.
“다른 용의 심장은 어디에 있소? 녀석이 이놈의 심장을 삼키고 던전을 벗어나려고 하는 거요!”
그 말에 브릭타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붉은 공방 가장 깊은 곳,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의 중심. 조금 전까지 화염 드래곤이 깔고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의 아래. 두두두두! 땅이 갈라진다.
흉포한 용의 마력이 터져 나오고 불타는 산이 떨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에 얽매여있던 녀석이 드디어 기지개를 켜고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것이다. 완전한 드래곤의 부활이다.
“던전이 무너진다! 그 전에 녀석을 붙잡아야 해!”
던전은 이계였다. 이 안에서 벌어진 일은 던전을 해결하고 나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오지만, 만약 녀석이 빠져나간다면 재앙이 현신하는 셈이었다.
불타는 산은 강철 모루의 중심에 있었다. 그곳에서 화염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내고 불을 뿜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될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레인이 얼른 정령들을 불러 결계를 만들어 펼쳤지만,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그녀는 무척이나 훌륭한 정령사였으나, 그렇다고 날뛰는 드래곤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붉은 비늘과 억센 발톱, 날카로운 이빨과 거대한 날개, 분노로 번뜩이는 짙은 눈동자와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 대용광로의 바닥을 뚫고 녀석이 나타났다. 조금 전에 쓰러뜨린 놈보다 더욱 강렬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온몸이 굳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듯 농밀한 살기, 폭력적인 용의 마력. 지상 최강의 생명체다운 위엄에 일행이 마른 침을 삼켰다. 강력한 포식자를 만난 피식자처럼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고쳐 잡으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이 진짜로군.”
녀석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가슴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숨을 들이켜 부풀어 오른 가슴에서는 세 개의 심장이 짙은 마력을 내뿜으며 녀석에게 힘을 불어넣는 것이 보였다.
이놈이 결국 세 개의 심장을 모두 가지게 된 모양이다. 한 마리 더 상대하지 않아서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세 개의 심장이 저 녀석에게 집중되어서 두려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르르르 새롭게 나타난 화염 드래곤이 낮은 짐승의 소리를 흘렸다. 녀석의 커다란 눈동자가 일행을 살펴보는데, 어찌 반응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망했는데?’
수천 년간 번갈아 가며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를 끓게 만든 용의 심장은 살아있는 용의 심장에 비하면 아무래도 출력이 좀 부족했다. 그 정도 힘으로는 던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그것을 세 개의 심장을 모두 삼키는 것으로 극복했다. 효율이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단순 출력으로는 진짜 드래곤만큼이나, 어쩌면 그것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던전의 마력에 의해 부활한 녀석이라고 하기에는 한없이 원본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던전을 깨부수고 날아갈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 나는 태초의 불꽃에서 태어난 드래곤, 크사리오스. 부활한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가 강력한 정신파로 말을 내뱉었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일행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선언하는 것에 가까웠다.
– 내가 오랜 죽음에서 돌아왔다. 녀석이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세상이 출렁거렸다.
세계가 경청하고 역사에 새겨졌다. 용언. 그저 의지만으로 세상의 법칙을 움직이는 용의 권능. 이 세상을 만들었던 태초의 드래곤에게, 그들이 남긴 분신에게 주어진 권한. 드래곤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진다.
세상이 자신의 창조자를 위해 그렇게 움직인다. – 이 좁은 우리를 부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겠노라! 한없이 진짜 드래곤에 가까운, 아니 진짜로 부활한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의 말 역시 현실이 되었다.
그의 말을 이루어주기 위해 세상이 스스로 움직였다.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공간이 찢어지고 던전이 부서졌다. 아직은 다른 차원에 있던 던전이 현실을 덮어쓰고 진실이 되려 했다.
그것을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막아섰다.
“···누구 맘대로 벗어나려 하느냐!”
쾅!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공간이 찢어지는 것을 멈추고 부서지던 던전이 다시 회복되었다. 아이반의 활약 덕에 힘을 아꼈던 그는 만전의 상태로 드래곤 앞에 섰다.
“여기는 강철 모루, 드워프의 땅이다!”
쿵! 아득한 옛날, 대지가 스스로 만들었던 힘의 망치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 땅이 드래곤을 거부했다. 용언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따르지 않았다.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는 그 사실에 몹시 분노했다. – 감히 하찮은 자들이 나의 말을 거부하느냐! 던전을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하던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의 시선이 돌아갔다.
비로소 일행을 적으로 인식하고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사나운 이빨!”
“녀석의 공격은 나를 넘지 못한다!”
델피노가 사나운 이빨을 부르고 그가 커다란 검을 휘둘렀다.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가 날려 보낸 불꽃이 사나운 이빨의 검에 갈라지고 옆으로 흩어졌다.
이레인이 재빨리 화살을 쏘아 보냈다. 정령의 힘이 듬뿍 담긴 화살은 드래곤이 펼친 보호막을 뚫고 녀석의 몸을 때렸다.
팅! 화살이 단단한 비늘에 막혀 튕겨 나갔다. 그러나 이레인은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한 번의 틈을 만들기 위해 의미 없는 공격을 계속했다. 아니, 의미가 없지 않았다.
쉬이이- 화염 드래곤이 날려 보낸 불꽃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흩어진다. 이레인이 화살에 담은 정령력이 드래곤의 주위를 돌며 불꽃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물의 정령이 벽을 만들어 가리고 바람의 정령이 공기를 빼앗아 진공으로 만들었다. 불꽃이 자라날 공간을 없애고 녀석의 공격을 막아섰다.
– 하찮은 수작이로다! 화르륵! 드래곤이 마력을 내뿜자 이레인이 만들어낸 정령의 벽이 그대로 깨져나간다.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변한 불길이 사방으로 번졌다.
그걸 보면서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묠니르를 아꼈어야 했나?’
사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일행의 힘이 빠지기 전, 묠니르를 사용해 화염 드래곤의 머리를 터트렸으니 훌륭한 업적이었다. 지금 일행이 선전하는 것은 모두 힘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은 힘이 모두 빠져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과열된 몸을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꽈아악! 어찌나 힘을 줬는지 피의 검 브리카를 쥐고 있는 손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걸 본 델피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기회는 올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지요.”
화아아- 델피노의 몸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다. 빛의 신 아룬의 신성력이 솟아나 온 사방을 비추었다. 아이반의 몸에서 활력이 솟아오른다.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던 체력이 차오르고 지쳐버린 정신이 서서히 회복되었다.
“틈을 노리십시오. 당신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사이에도 전투는 한참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용감한 드워프 병사 하나가 도끼를 들어 녀석의 발등을 내리찍었다.
곧이어 몸이 찢어져 흩어지고, 분노한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러 크사리오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크사리오스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비늘이 깨지고 이빨이 부러졌다. 용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