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6
녀석의 상처는 이내 아물어 사라졌지만, 자존심은 회복할 수가 없었다. 크사리오스가 분노를 담아 울부짖었다.
– 영혼까지 불태워주마! 세 개의 심장이 맹렬히 달아올랐다. 하나만으로도 대용광로를 능히 끓일 수가 있는 용의 심장이 동시에 마력을 토해냈다.
지옥불보다 뜨거운 용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드워프 병사 하나가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델피노의 방어막이 있었음에도 견디지 못할 만큼 지독한 불길이었다.
“흐아압!”
브릭타가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땅에서부터 거대한 창이 솟아나 크사리오스의 배를 찔렀다.
비록 창은 녀석을 꿰뚫지 못했으나 크사리오스를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녀석이 내뿜는 불길도 이내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차르륵-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창이 모습을 바꿔 굵은 쇠사슬이 되었다. 커다란 쇠사슬이 크사리오스를 감싸고 그대로 바닥에 박혀 들었다.
크사리오스가 몸을 뒤틀 때마다 쇠사슬이 터져나갔지만, 그 속도보다 빠르게 새로운 쇠사슬이 나타나 녀석의 몸을 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으로 사나운 이빨이 뛰어올랐다.
“용의 피가 고프다!”
사나운 이빨의 덩치가 평소보다 컸다. 뱀신 모르나의 축복을 받아 한층 강력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검을 내리쳤다. 온 힘을 담아 크사리오스의 목을 베었다.
스걱! 단단한 비늘이 잘리고 질긴 가죽이 쩍 벌어졌다. 두꺼운 용의 근육마저 베어내고 피를 뿌렸다.
화염 드래곤의 피는 그들이 내뿜는 불꽃만큼이나 뜨거웠다. 용의 핏물을 온통 뒤집어쓴 사나운 이빨은 고통을 참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 벌레 같은 놈이, 감히···!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크사리오스가 앞발을 뻗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리찍어 사나운 이빨의 등을 가르고, 꼬리를 끊어냈다.
“으윽!”
사나운 이빨이 지독한 고통에 쓰러졌다. 상처 틈으로 온몸을 적신 용의 피가 스며들어 그를 괴롭혔다.
어느새 목에 난 상처를 회복한 크사리오스가 사나운 이빨을 마무리하려는 것을 이레인이 방해했다. 피우웅- 쾅! 그녀의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와 폭발했다.
대부분은 드래곤의 강력한 항마력을 뚫을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레인의 몸에서 사대 속성의 정령이 나타나 위력을 증폭했기 때문이다.
이레인의 화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일곱 번이나 꺾이며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화살이 용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쾅! – 으아아아!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에게서 마침내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눈동자 하나를 완전히 터트리고 뇌를 뒤흔들어서 녀석이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치명적인 틈. 녀석을 마무리하기 위해 뛰어오르려던 브릭타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날카로운 전사의 본능이 그를 말렸기 때문이다. 그는 녀석에게 달려드는 대신 오히려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소리쳤다.
“조심하라! 뭔가 있다!”
브릭타의 외침과 함께 크사리오스의 몸에서 막대한 마력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용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세 개의 심장이 내뿜는 마력을 통해 실체를 얻어 앞을 막아섰다.
섀도우 드래곤. 무형의 육신을 가진 용의 그림자. – 하찮은 자들아! 너희의 죄에 짓눌려 사라져라! 섀도우 드래곤이 일행을 덮쳤다. 그들의 그림자에 스며들어 일행의 의식을 아득히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완전한 어둠. 전후좌우 모두 시커먼 공간에서 아이반이 표정을 굳혔다. 이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아마도 무의식과 같은 정신세계, 아니면 그림자가 살아가는 이차원 속일지도 모르지.
“델피노! 이레인! 사나운 이빨!”
그가 소리쳐 불렀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시커멓고 고요한 공간 속에는 오직 그만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으나, 또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마력을 끌어올리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달려보고, 소리치고, 주먹질을 해보아도 이 시커먼 공간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이대로 고독 속에서 죽으라는 건가? 아니면 바깥세상에서는 용이 이미 육신을 찢어발겼나?’
아이반의 의지는 강했으나 이 고요하고 시커먼 공간에서는 절로 힘이 빠졌다. 점점 의욕이 사라지고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있으니 이 시커먼 공간을 뚫고 누군가 나타났다.
덥수룩한 잿빛 턱수염을 기르고, 더러운 로브를 두르고 있었으며, 챙이 넓은 모자로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노인. 처음 보는 모습이었으나 또 너무나 익숙했다. 아이반은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오딘. 잔인하고 위대한, 빌어먹을 아스가르드의 주인.
“···당신이 이런 누추한 곳에 나타나다니, 놀랍군. 비웃으려고 찾아오셨소?”
얼마나 오랫동안 말을 내뱉지 않았는지 아이반의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그런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을 하자 오딘이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 그래, 하찮은 전사야. 멍청한 꼴이로구나.
“그래, 멍청한 일이지. 이게 무슨 꼴이오? 우습지도 않아.”
아이반은 끌끌 웃음을 터트리다가 오딘에게 물었다.
“또 내 목숨을 가져가려고 찾아오셨소? 이대로 끝이라고?”
– 너는 끝을 생각하느냐? 발할라로 올라와 에인헤리가 되고 싶으냐?
“그럴 리가. 아직 내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소.”
아이반의 눈동자가 빛을 뿜었다. 이 고요하고 시커먼, 외로운 공간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생존 열망, 투쟁의 의지. 전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위대한 주신은 친히 길을 보여주려 나타났다.
스윽- 오딘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반이 따로 건네준 적도 없건만, 오딘은 자연스럽게 피의 검 브리카를 들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자라나 거대한 고목이 되었다.
오딘은 그 나무에 친히 검을 박아 넣었다. – 너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오딘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뻗었다. 나무에 박힌 피의 검 브리카를 붙잡았다.
검이 심장을 울리듯 두근거렸다. 검에 잠들어있는 힘이 느껴졌다.
봉인된 검은 자격이 있는 자만이 뽑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는 것을 아이반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뽑을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나무에 박혀있던 검은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아이반이 지금껏 해낸 일들이 그의 자격을 증명했다. 우웅- 시커멓고 고요한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온 사방에 끓어 넘치는 불꽃과 피 냄새, 피부에 달라붙는 살기와 짙은 마력. 어둠의 공간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현실은 조금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아주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아이반은 깨달았다.
스윽 아이반이 굳게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길고 폭이 넓은 검, 뱀이 똬리를 튼 듯한 무늬, 차갑고 또 뜨거운 힘. 이 검은 피의 검 브리카가 아니었다.
예전 프레이의 검, 거인을 베는 검이 피의 검 브리카를 매개로 나타났던 것처럼, 그저 모습을 빌려 현신했을 뿐이다 아이반은 이 검의 이름을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람(Gram), 뜻은 분노. 위대한 영웅 시구르드가 악룡 파프니르를 쓰러뜨릴 때 사용한 용살검. 아이반이 검을 휘둘렀다. 언젠가 위대한 영웅이 용을 베었을 때처럼 힘차게.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는 아이반의 검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저것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자신에게 해로운 무기인지 알아차렸다.
날카로운 용의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했다. 세상의 창조주로서 세계의 기록과 연결된 용의 직감은 그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미래 예지나 다름없었다.
– 짓눌려 죽어라! 세 개나 되는 용의 심장이 막대한 마력을 내뿜었다. 강력한 용의 의지가 세상에 전달되고 곧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반의 전후좌우, 온 사방의 공간이 쪼그라들었다. 그를 그대로 쥐어 터트릴 듯 붙잡아 조였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왕국에서 너의 말은 거짓이 되리라!”
어느새 정신을 차린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수천 년간 드워프가 가꿔온 대지가 호응하여 용언을 거부했다.
아이반을 쥐어 터트리려던 공간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용살검 그람은 수월하게 용을 베고 지나갔다.
스걱! 질기고 단단한 용의 가죽이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아이반은 온갖 내성을 다 가지고 있었지만, 용의 피는 웬만한 독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지독했다.
언젠가 경험한 히드라의 독을 떠올릴 만큼 고통스러웠다. 화르륵! 로키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이반은 자신이 뒤집어쓴 용의 피를 태우고 독성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녀석의 가슴에 그람을 박아 넣었다. – 으윽! 이 녀석이! 녀석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아이반은 재빨리 뱀신의 황금 방패를 펼쳐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뱀신의 황금 방패가 찢어지고 아이반이 허공을 날아 멀찍이 밀려났다.
몇 바퀴나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의 몸에 델피노의 신성력이 스며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이반은 그렇게 묻는 델피노의 얼굴을 힐끗 살피고는 되물었다.
“나보다 당신의 표정이 더 좋지 않군. 괜찮소?”
델피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핏기가 없었다. 섀도우 드래곤의 정신 공격이 상당히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다.
“아주 끔찍했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그는 꼬리가 잘리고 등이 갈라지는 큰 부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델피노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에 새겨진 성흔으로 끊임없이 신성력을 쏟아냈다. 생명의 구슬이 활력을 불어넣고 재생력을 끌어올렸다.
상처는 이미 거의 아물고 있었으나 사나운 이빨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상처를 통해 스며든 용의 피가 문제였다.
지독하고 오만한 용의 피가 그의 몸을 내부에서부터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용의 피가 지독하긴 하군요. 하지만 그는 이겨낼 것입니다.”
델피노의 말을 들은 아이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긴말을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는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화염 드래곤 크사리오스는 이전과 달리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검붉은 피를 계속 흘리고 있었다.
용살검 그람의 기운이 녀석이 회복하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사리오스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그람을 뽑기 위해 노력했고, 브릭타는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갈라로자를 휘둘렀다.
쾅! 크사리오스의 앞발이 짓뭉개졌다. 브릭타가 용의 손을 부수고 녀석을 도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