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8
드워프 왕자의 말이었다. 그가 단언한 대로 붉은 공방은 더욱 훌륭한 곳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터였다.
일행이 지하 통로를 통과해 불타는 산 밖으로 나오자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던 드워프 병사들이 크게 환호했다. 세상이 흔들리고 하늘이 부서지는 듯 커다란 폭발까지 이어졌다. 그러고 나서 던전이 무너져 내렸으니 싸움이 끝났다는 것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왕자 브릭타가 무사한지가 중요했는데, 그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들고 당당히 돌아오니 모두가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밤이었다. 드래곤의 마력에 이끌린 몬스터들과 계속해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드래곤이 둘이나 나타나고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밀려왔다.
어쩌면 강철 모루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위험을 넘기고 무사히 아침을 맞이했다. 곧이어 용 사냥이 발표되고 대대적인 축제가 이어졌다.
그동안 출입이 봉쇄되고 전투가 계속되어 다소 가라앉아있던 왕국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들떴다. 붉은 공방이 부서진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으나 드래곤을 잡았다는 것이 그것을 뒤덮었다.
나라가 멸망할 수 있는 위험을 넘겼다는 것도 기쁘지만 드래곤을 사냥하고 얻게 된 부산물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용이었다.
피나 뼈, 비늘과 가죽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최고의 재료. 던전의 힘으로 부활한 용이니 원래의 드래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질이 떨어지겠지만 그게 어딘가? 이만큼이나 싱싱한 재료를 구할 수가 없는데. 원래 드래곤은 사냥의 대상이 될 수가 없었다. 드래곤의 피나 뼈를 얻겠다고 용과 싸우는 미친놈은 없으니까. 대부분은 오래전에 죽어버린 드래곤의 육신을 우연히 발견해서 수습하는 것이었다.
드래곤은 홀로 완벽한 오롯한 존재였고, 그래서 그들은 육신을 땅에 묻거나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례란 것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방법이다.
드래곤은 그런 것이 필요 없으니 그저 살아가다 죽을 뿐이었다.
“크으! 드래곤이라니! 벌써 손이 근질근질해서 망치질을 하고 싶군!”
난쟁이들을 쫓는 괴짜 드워프, 파라스가 맥주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자네 몫으로 좀 떨어지는 것 없나? 내가 그걸 좀 만져서 장비로 만들어줄까?”
“글쎄, 크사리오스는 완전히 마력으로 변해 사라졌고, 그 전에 잡은 드래곤의 육신도 남아있는 것이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아이반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덧붙였다.
“물론 내 몫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당신에게 맡기지는 않을 거요.”
“아니, 왜!”
“당신이 난쟁이보다 실력이 나으면 넘겨주겠소.”
그들은 곧 난쟁이의 흔적을 따라 대륙 남쪽의 마경으로 향할 터였다. 그는 난쟁이에게 장비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귀한 재료이니 최고의 장인에게 맡겨야지. 파라스 역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대단한 장인이었고, 강철 모루 전체를 통틀어도 훌륭한 실력을 갖춘 편이었다. 그러나 신들조차 감탄하게 만들던 난쟁이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걸 자신이 가장 잘 알았기에 파라스는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도 더는 묻지 않았다.
“쪼잔하기는. 가죽 조금만 주지.”
들릴 듯 말 듯 낮게 중얼거리던 파라스는 이내 델피노에게 다가가 그와 맥주를 홀짝였다. 앞으로 잠깐이나마 함께 행동할 사이니 동료들을 소개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파라스는 델피노와 죽이 잘 맞았다.
둘의 성격이 그리 닮은 것 같지 않은데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을 보면 좀 신기하기는 했다. 하긴, 아이반은 원래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인싸의 세계를 어떻게 알겠나? 왠지 씁쓸해진 아이반이 차가운 맥주를 들이켰다.
‘역시 드워프인가, 맥주 하나는 더럽게 맛있네.’
드워프들은 항상 광산을 파고 채굴을 많이 하므로 지하수가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을 그대로 마실 수가 없으니 술을 담가 마시는 거겠지. 물론 아이반이 그렇게 말하자 드워프들이 그를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물이 더러워지면 정수를 해서 마시면 되지 뭘 귀찮게 술을 담그냐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물을 깨끗하고 맛있게 만드는지 원리에 대해서 이리저리 읊어놓는데, 하나도 알 수 없는 말투성이라 아이반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주나 집어 먹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렇게 판을 집어넣으면 흡착이 되면서······.”
아이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위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미묘한 움직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다급히 방으로 올라가니 사나운 이빨이 침대에 앉아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나셨소?”
아이반이 묻자 사나운 이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긴 꿈을 꾼 것만 같다. 아직 현실감이 없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열흘 정도.”
“흐, 생각보다는 짧아. 나는 일 년쯤은 지났으리라 생각했다.”
지난 열흘간 그는 생사를 오가며 조금씩 몸이 바뀌었다. 전신에 단단하고 투명한, 붉은 비늘이 자라나고 이전보다 훨씬 뼈가 굵어지고 근육이 발달했다. 그는 분명 리자드맨이었으나 어딘가 드래곤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사나운 이빨이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박아 넣은 용의 심장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기분은 어떻소?”
“나쁘지 않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나운 이빨이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고동치는 용의 마력이 느껴졌다.
“용의 피를 뒤집어쓰면 용의 힘을 얻을 수 있다지. 당신은 용의 심장을 가졌으니 반쯤은 용이나 다름없게 변했군.”
드래곤의 피는 유형화된 용의 마력이나 다름없었다. 너무나 지독하여 사람을 죽게 만들지만, 그것을 견뎌낸다면 용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반 역시 용의 피를 한껏 뒤집어쓰고 이겨냈기에 이전보다 더욱 강인한 생명력을 얻었으나, 사나운 이빨은 거의 드래고니안에 가까웠다. 사나운 이빨이 껄껄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전보다 기운이 넘친다! 당장 싸우더라도 괜찮다!”
그가 소리칠 때마다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직 용의 마력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겠지. 아이반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사나운 이빨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몸을 신경 쓸 것은 없다. 그대의 계획대로 움직이면 된다.”
“···마경으로 갈 것이오. 대륙 남쪽의 그 마경. 위험할 수도 있소.”
“아무리 그래도 용과 싸우는 것보다 위험하지는 않겠지.”
화염 드래곤의 심장을 박아 넣고 가장 뜨거운 가슴을 가지게 된 리자드맨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준비가 되었다. 싸운다면 가까울수록 좋다!”
아이반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곳에 며칠 더 머물면서 그대의 몸 상태를 확인하겠소. 어차피 그대의 장비도 새로 제작해야 하니.”
용과 싸우면서 사나운 이빨의 검도 크게 상했다. 이왕 드워프의 왕국에 온 김에 장비를 싹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열흘을 굶었으니 배가 고프겠군. 식사를 준비하겠소.”
그러나 사나운 이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사보다는 샤워. 열흘을 누워있었다니 찝찝하다.”
과연 리자드맨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열흘 만에 깨어나서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목욕물이라니. 너무나 사나운 이빨다워서 아이반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딘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드워프에게 입욕제도 잔뜩 준비해달라고 부탁해야겠군.”
아이반이 주먹을 내밀었다. 사나운 이빨이 웃으며 손을 마주 뻗어 살짝 부딪쳤다.
“잘 살아 돌아왔소.”
“아직 죽으라고 그대가 명령하지 않았다!”
우걱우걱, 후루룩 쩝쩝. 그런 의성어가 현실이 된 듯 사나운 이빨이 자그마한 돼지 한 마리를 빠르게 뜯어먹었다. 그가 깨어난 지 벌써 며칠이 흘렀지만 왕성한 식욕은 줄어들지가 않았다. 용이 아닌 몸으로 용의 심장이 뿜어내는 막대한 마력을 유지하려니 식사량이 많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달그락.
“후우.”
한껏 배를 채운 사나운 이빨이 한숨을 내쉬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많이 먹어야 한다니, 효율적이지 못하다.”
리자드맨은 원래 미각이 크게 발달한 종족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나운 이빨의 식사 역시 맛을 즐긴다기보다는 그저 필요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입에 집어넣는 것 같은 전투적인 느낌이 강했다. 식사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하니 식사량이 늘어난 것이 그에게는 불편하게만 여겨지는 듯했다. 툴툴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이레인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먹는 양이 조금 늘어난 것으로 용의 마력을 사용할 수가 있다면 오히려 효율적인 거야.”
지난 며칠,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더니 단순히 마력이 늘어난 것 외에도 육신의 성능이 확연하게 좋아졌다. 단단한 비늘과 질긴 가죽, 튼튼한 뼈와 강인한 근육. 오감이 모두 날카로워졌고, 반응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그렇게 용에 가까워진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식사량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 겨우 그런 걸로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였다.
“그래도 매일 돼지 반 마리씩을 먹어야만 살아갈 수가 있는 몸이라니 너무 불편하다!”
“아직 바뀐 몸이 용의 심장에 적응하는 중이라 그럴 거요. 당신의 식사량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대꾸한 아이반이 갑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황금 멧돼지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은 무척이나 훌륭한 장비였지만 그동안 경험한 싸움이 너무나 험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부서지고 꿰뚫린 것을 간신히 고쳐가며 사용했는데, 이번에 용과 싸우면서 완전히 폐품이 되어버렸다. 도저히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라 눈물을 머금고 처분한 후 드워프제 갑옷을 새로 구했는데, 이게 썩 마음에 들었다. 용을 잡는데 크게 활약한 대가로 일반적으로는 구할 수가 없는 보물을 넘겨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어도 돈만으로는 살 수가 없는 드워프의 보물. 처음 만났을 때 파라스는 그런 물건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결국 이렇게 손에 들어왔다. 물론 아무리 좋은 갑옷이라도 자신의 몸에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아이반이 낯선 갑옷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풀고 있으니 바깥이 소란해진 것이 느껴졌다.
“하하하! 식사는 맛있게 하였는가!”
강철 모루의 왕자, 브릭타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나타났다. 놀랍지는 않았다. 요 며칠간 거의 매일 그러했기 때문이다.
“바쁘시다더니 이렇게 매일 찾아오고, 괜찮으시오?”
“바쁘지! 붉은 공방이 박살이 났으니 그걸 재건하는 일도 있고, 빌어먹을 드래곤의 마력에 이끌려 모여들었다가 흩어진 몬스터들도 정리해야 하고, 또 주변에서 문을 열고 무기를 팔아 달라고 찾아오는 자들도 상대해야 하니!”
한참이나 자신이 하는 일들을 읊어놓던 브릭타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전우들과 술 한잔을 할 시간은 있지 않겠나!”
처음 며칠간은 정말 눈코 뜰 사이가 없이 바빠서 찾아오지 못했지만, 그 이후로는 거의 매일 저녁에 찾아와 술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갔다. 하룻밤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드래곤과 싸웠다는 사실 때문에 심정적으로 크게 가까워진 듯했다. 아무래도 그는 왕자의 신분이라 이리저리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대할 상대가 부족했다. 골치 아픈 일들을 치워버리고 순수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를 찾은 셈이다. 아이반은 브릭타가 건네주는 술병을 받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왕자와 친구라니, 나도 출세했군.’
맨몸으로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져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북부 야만인이라고 더럽게 무시당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지금은 드워프의 왕자이자 영웅인 브릭타와 술잔을 나누고 있으니 아이반의 신세도 크게 바뀌었다. 그런 와중에도 하루하루 목숨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리 기쁘지도 않았다.
“그래, 이제 떠나려고 하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브릭타가 술을 크게 털어 넣고 말을 툭 내뱉었다.
“뭐, 그렇소.”
숨길 일이 아니었다. 언제 떠나겠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장비를 갖추고 여행 준비를 계속했으니 브릭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사나운 이빨의 몸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그래, 그렇군. 그대들은 모험가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