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99
브릭타의 시선이 일행을 하나씩 스치고 지나갔다. 유독 사나운 이빨에게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던 것은 아마 그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용의 심장 때문이겠지. 사나운 이빨에게 용의 심장이 깃들었다는 사실은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강철 모루를 구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용의 심장이 유출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괜히 시끄러워질 게 뻔하니 모두 입을 다물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 불타는 산의 대용광로를 끓이는 것이 용의 심장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 수가 셋이나 된다는 것은 강철 모루 왕가의 비밀이었다. 마침 나타난 드래곤도 둘이었고, 용의 심장은 두 개만 있었던 것으로 조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나인 줄 알았던 용의 심장이 사실은 두 개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테고, 하나가 리자드맨의 가슴에 들어갔다는 것은 상상치도 못할 거다. 강철 모루의 왕가와 용의 심장에 대한 비밀을 공유한 극소수의 사람들은 용의 심장 하나가 난리 중에 파괴된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싸움이었다.
“언제라도 편할 때 이곳을 또다시 찾아오라. 강철 모루는 친구를 잊지 않는다.”
“그때까지 술독을 넉넉히 채워두시오. 다 비워버릴 테니까.”
“크하하! 기대하지!”
그리고 일행은 강철 모루를 떠나 길을 나섰다. 마르지 않는 황금을 가지고 있다는 강철 모루답게 은인에 대한 보상을 섭섭지 않게 챙겨주었기에 다들 주머니가 묵직해진 상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족하다 싶은 장비는 죄다 드워프제 명품으로 교체를 했고, 심지어 그들이 지금 타고 있는 마차마저도 드워프가 만든 최고급품이었다. 티 하나 없이 매끈한 털빛을 자랑하는 명마 네 마리가 이끄는 마차는 흔들림이 거의 없어서 안에서 티타임을 가져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동안 쿠션감이 전혀 없는 싸구려 개조 짐마차를 타고 엉덩이가 얼마나 고생했던가. 아이반은 감격에 차서 중얼거렸다.
“역시 돈이 최고야.”
옆에 앉은 델피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은 크게 불편해졌다. 왠지 자신이 그를 타락시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온갖 악마의 유혹에도 멀쩡하던 구마사제를 물들이다니, 어쩌면 아이반의 재능은 그런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행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향했다.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었다. 강철 모루는 대륙 북부에 있었고, 그들의 목적지는 대륙 남부의 마경이었다. 대륙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셈이니 마차를 타고 몇 달은 족히 달려야 할 터였다. 그것도 인적이 드물 때는 상관이 없었으나 점차 사람이 많아지면서 진행이 더욱 더뎌졌다.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산적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원래 이랬나?”
새로 일행에 합류하게 된 파라스가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내가 한동안 물건 팔던 사이에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최근 이십여 년은 강철 모루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그는 난쟁이의 흔적을 찾아 대륙 전역을 돌아다녔었다. 그때도 이러지는 않았다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글쎄, 요즘 세상이 많이 변하긴 했지. 그래도 내 생각보다 더 개판이 되었군.”
아이반이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화려하게 치장된 사두마차는 평범한 여행객이 타고 다닐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의 지체 높은 귀족들이나 겨우 가지고 있겠지. 그런 화려한 마차가 호위도 없이 혼자서 움직이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당연했다. 혹여 귀족과 시비가 붙을까 후다닥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놈들처럼 덤벼드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호위대도 없는데 다 칼로 쑤시고 죽여 버리면 귀족이라고 한들 자신들을 어떻게 잡겠느냐고 여긴 것이다. 숫자가 많으니 자신감이 있었겠지. 물론 그런 생각 없는 놈들은 마차를 몰고 있던 아이반을 넘지 못하고 머리가 뎅강 잘려 나갔다. 옛 해신의 화신, 원시 거인, 부활한 드래곤 따위와 싸우던 그에게 평범한 강도나 산적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사람 써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몸에서 피 냄새가 빠지지 않아. 괜히 기분만 더럽군.”
아이반이 녀석들의 시체를 길가로 치우면서 중얼거리자 이레인이 곰방대를 뻐끔 피우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난세가 시작되었어. 대륙 역사의 변곡점이 찾아온 셈이지.”
세계수가 자신의 파멸을 예언한 시점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심란하게 만드는 듯했다. 요정의 숲은 차원 좌표를 바꾸기 위해 지금도 폐쇄되어 있었다. 세계수의 존재도 아득하게 멀어졌으니 대륙에 남아있는 엘프들이 모두 불안에 떨고 있겠지. 다시 마차를 몰고 얼마쯤 지나자 높이 솟은 성벽이 보였다. 꽤 오랜 시간 만에 맞이하는 도시의 풍경. 그러나 아이반은 기뻐하기보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적을 만난 곳이 성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녀석들이 날뛰고 있었다는 것은 저 성의 치안 유지 능력이 아주 바닥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상태를 보니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멈추십시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마차가 다가오자 잔뜩 풀어져 있던 병사들이 바짝 긴장하며 소리쳤다.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병사는 마부석에 앉아있는 아이반을 보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무리 봐도 귀족 집안의 마부는 아닌 것 같은데 마차는 화려하니 감을 잡지 못하는 모양이다.
“용병들이오. 남쪽으로 가고 있지.”
아이반이 신분증을 내밀자 병사들이 한층 더 당황스러워했다.
“용병?”
이런 화려한 마차를 타고 다니는 용병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대체 어떤 용병이 이런다는 말인가? 몹시 수상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차마 그들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도적을 썰고 온 아이반의 전신에서는 피 냄새가 물씬 흘러나왔고, 마차의 창문으로는 사나운 이빨이 삐죽 머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무에 성실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찔끔 겁을 먹은 표정으로 얼른 소리쳤다.
“통과!”
그 말에 오히려 델피노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통과? 괜찮은 겁니까?”
그제야 그를 발견한 병사들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아룬 교단의 사제복을 입고 있으니 변명할 것이 생겼다는 눈빛이었다.
“사제님이 들어오는 것을 어찌 막겠습니까? 통과하십시오.”
물론 아룬 교단의 힘이 강하긴 했다. 그동안 성문을 통과하는 데 불편함을 느낀 적도 없고. 그러나 이건 좀 심했다. 성문을 통과하면서도 찝찝한 기분이 들 정도로. 일행은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아룬 신전으로 향했다. 영 불안하니 신전을 숙소로 삼아서 머물려는 것이다. 갑자기 화려한 마차가 들어오자 빗자루로 신전 앞마당을 쓸고 있던 사제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델피노가 봉성의 목걸이를 꺼내 보이자 말없이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임무를 수행 중인 구마사제에게는 함부로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예의. 조용히 방을 안내하고 떠나려는 사제를 아이반이 붙잡았다.
“도시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사제는 델피노의 눈치를 힐끔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이곳을 다스리던 귀족 가문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귀족 가문이 통째로? 무슨 암살이라도 당한 거요?”
“모르겠습니다. 시름시름 앓다가 모두 숨을 거뒀습니다. 신성력으로 치료를 했음에도 잠깐 나아지는 것 같더니 이내 생명이 끊어지더군요.”
“직접 치료하셨소?”
“한 손 거들기는 했지요.”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수행이 그리 얕아 보이지도 않은데······.’
물론 신성력은 만병통치약이 아니었다. 모든 질병을 신성력으로만 낫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귀족 가문 전체가 그랬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제는 구마사제 앞에서 하기는 껄끄럽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최근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질병이 늘었습니다. 덕분에 불경스럽게도 신이 이곳을 버린 것이 아니냐는 헛소리도 나오는 실정이죠. 얼마 전 그 이야기를 교단에 올렸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사제의 이야기를 들은 델피노가 아이반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러야겠습니다.”
갈 길이 바쁘지만,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못 들었다면 모르되, 들었다면 한 번쯤 조사해볼 이유는 충분했다. 새로 합류한 파라스는 이런 것에는 영 흥미가 없어서 숙소에 남았고, 사나운 이빨은 얼른 가서 날뛰고 싶은 눈치였으나 아직 용의 마력을 완벽히 다루지 못해서 일행이 억지로 숙소에 머물게 했다.
“나도 잘 할 수 있다!”
“헛소리 말고 변한 몸에 적응이나 하시오. 필요하면 그때 부를 테니까.”
사나운 이빨이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가고, 이레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남았다. 아무리 봐도 내키지 않는 표정이라 아이반은 그녀도 쉴 것을 제안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신이 움직인다면 나도 움직여야지.”
아이반은 세계수가 스스로 예언한 파멸의 운명을 비틀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이 이레인의 임무니 물러설 수가 없었다. 결국 셋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물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사건 현장, 이 도시를 다스리던 귀족 가문이 모두 죽어 나간 바로 그 장소였다. 평소라면 가장 엄격하게 보호받고 통제되었을 영주의 거주지. 그러나 상황이 엉망이기는 한지 그곳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조차 잔뜩 군기가 빠져있었다. 그래도 임무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일행이 가까이 다가가자 창을 세우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영주관은 폐쇄되었소!”
“이곳 담당자가 누구입니까?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데······.”
“이곳이 들어가고 싶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인 줄 아시오?”
“아룬 신전에서 나왔습니다. 최근 일어난 비극에 대해 조사를 하고자 합니다.”
입구가 소란스러우니 척 보기에도 높아 보이는 사람 하나가 나타나 기웃거렸다. 그는 무슨 일인지 지켜보다가 헛기침과 함께 끼어들었다.
“흠흠! 그래, 신전에서 나오셨다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계속 이레인을 힐끔거렸다. 이레인은 마법으로 엘프의 외형을 가리고 인간으로 변해있었으나 그러고도 놀랄만한 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봄에도 더위를 많이 타는 듯한 의상을 하고 있으니 시선이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그래도 자기 눈빛 하나 제어하지 못한다니, 영 가벼운 자로군.’ 아이반이 그를 판단하는 것처럼 그 남자도 일행을 훑어보았다. 아룬 신전의 사제와 건장한 노르드 전사, 화려한 미녀의 조합이 조금 특이하긴 했는지 의문을 섞어서 되물었다.
“신전에서 나온 것이 맞기는 맞소?”
“그런 것을 숨길 리가 없지요.”
아이반이 신성력을 짧게 흘리며 자신을 증명하자 남자의 눈에서 의심이 옅어졌다. 그러나 태도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신전에서 이제 무슨 일이오? 정작 필요할 때는 도움도 되지 않았으면서.”
그는 영주 가문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 때문에 신전을 크게 불신하고 있는 듯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연신 쏘아붙였다.
“아니, 그동안 신전에 기부한 것이 얼마인데! 이럴 때 목숨도 구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델피노는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봉성의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혹시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
그러자 남자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두려움을 담아 되물었다.
“그, 성황청에서 오신···?”
“더는 말할 수 없습니다.”
대놓고 알려졌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봉성의 목걸이는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죄다 알아봤다. 그도 그럴 것이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 아닌가. 성황청의 영향력은 대륙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나타나 혹시 악마의 주구라거나 이단이라고 소리치면 귀족이라고 해도 멀쩡할 수가 없었다. 치매에 걸린 아흔 살 늙은이도 일단 잡혀가면 어렸을 때 먹은 이유식의 맛까지 떠올리게 만든다는 성황청 이단심문관의 악명은 대단했다. 방금 전까지 건들건들 불만스러워하던 남자가 얼른 자세를 가다듬고 저자세로 나왔다.
“크흠! 성황청에서 조사를 하고자 한다면 협조해야지요. 저희도 그 빌어먹을 질병의 원인을 알고 싶으니.”
그렇게 입구가 열리고 일행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가문 하나가 떼죽음을 당한 곳이라 그런지 서늘하군.”
원래라면 많은 사람이 오갔을 영주관에는 인기척이 하나 없이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다. 영주관이 폐쇄되었다는 말처럼 관리하는 인원은 있었으나 머무는 인원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청소하고 정리하는 하인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고, 그들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들을 붙잡고 물어보니 하인들 사이에서는 이곳이 저주받았다는 소문이 잔뜩 퍼져있다고 했다.
“건강하던 분들이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리가 없죠. 분명히 무언가 있습니다.”
그렇게 떠들어대던 하인들은 자세한 것은 모른다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일행의 의심만 강해졌다.
“저들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군. 조금 더 강하게 심문해야 하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수록 헛된 이야기만 가득해지는 법이죠.”
가장 최근에 숨이 끊어졌다는 아가씨의 방을 돌아보던 델피노가 턱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신성력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질병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페론스 병, 말라키움, 알릭 증후군······.”
아이반이 평생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질병들을 늘어놓던 그는 그러다가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것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