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하지만 내가 말을 이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기사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수상한 기척을 보고받은지라, 문 좀 열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브리튼의 방문을 열었다.
문틈 새로 빛이 들어오는 순간 브리튼은 나를 제 이불 속으로 끌어당겨 눕혔고, 내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무슨 일이지?”
브리튼은 막 일어난 듯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며 기사를 보았다.
으으, 위기이다. 들키면 엄청 부끄러울 거야.
“누군가가 황태자궁으로 몰래 들어왔다고 합니다. 혹시 수상한 사람을 보지는 않으셨습니까? 시종들의 말로는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없었다.”
“그렇다면 주변을 더 수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 앞을 더 확실히 방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리튼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했고, 보고를 마친 기사는 방 밖으로 물러나서 문을 닫았다.
나는 어둑한 이불 속에서 브리튼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브리튼은 자신의 은발을 뒤로 쓸어 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쩔 수 없네, 동이 틀 때까지 쉬고 가, 그때가 경비 교대 시간이니까.”
어디에서……?
이 침대 위에서……?
* * *
“……무방비하네.”
새벽녘, 브리튼은 곤히 잠들어 있는 아리넬을 바라보았다.
둥근 이마와 오뚝한 코, 잘 앙물린 입술. 긴 속눈썹은 귀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성인 남녀가 한 침대에서 잘 수는 없다고 반발하던 아리넬은, 곧 죽어도 깨어 있다가 동이 트자마자 나가겠다고 자신의 뜻을 확실히 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몇 분 가지 못했고, 지금 아리넬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다.
피식-
브리튼의 아름다운 입매에 웃음기가 서렸다.
오늘도 잠은 자지 못할 거 같지만, 퍽 즐거웠다.
브리튼은 긴 손가락을 들어 아리넬의 볼을 스르르 쓸어내렸다.
* * *
새벽녘, 브리튼은 언제나 그랬듯 검술 수련을 위해 방을 나섰다.
아리넬은 제 방 안에서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피식.
갈넴에서 별을 보다 잠들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은 한숨을 쉬며 아리넬을 안아 들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가벼워서 놀랐었지.
“…….”
지금은 당연히 그때보다 튼튼해지기는 했는데, 그래도 제게 기댈 때면 여전히 가벼워서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것을 잔뜩 먹이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한다.
‘조만간 번화가 구경을 가자고 할까?’
한참을 걸어 회랑의 기둥이 있는 코너를 지났을 때였다.
음지에 불쑥 드리운 그림자에 브리튼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경비 인력이 없는 그곳은 브리튼과, 긴 그림자의 주인만이 있었다.
“…….”
탁, 탁, 탁.
그 발의 형태는 브리튼보다 작고 얄쌍했지만 굽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등에 찬 거대한 장검 때문일 것이다.
전신을 감싼 검은 경갑옷과 포니테일의 금발 머리.
겨울을 연상하게 하는 그 형형한 녹안은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녀와 눈을 맞춘 브리튼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초면인 것처럼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겁니다. 황태자 전하.”
퀘사 마일라. 북부 대공의 딸이자 화이트 베어를 일결에 무찌르는 제국 최강의 여전사.
그녀는 마치 제집에서 소중한 물건을 훔쳐 간 도둑을 보는 듯한 눈으로 브리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등장에도 브리튼은 태연한 표정으로 퀘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리넬과는…….”
퀘사 마일라의 눈동자에 형형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아무 일 없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모님.”
자신의 적들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을 풍기던 브리튼은, 퀘사에게는 단정하고 다정한 웃음기를 띠며 대답했다.
마치 아리넬이 알던, 어린 시절의 황태자 브리튼 같은 태도로 말이다.
그런 브리튼의 미소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퀘사의 눈가가 실룩 움직였다.
“…….”
이른 아침의 희미한 햇살이 회랑을 비추고, 브리튼의 은발은 더욱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북부의 사내들과는 차원이 다를 만큼 고왔고, 높은 콧대와 유려한 턱선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날 처음으로 브리튼을 본 순간 퀘사는 생각했었다.
‘아리넬이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긴 했군.’
뭐, 개인적으로 자신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북부 전사 아리넬의 전리품 목록에 끼워 넣을 만했다.
낯설긴 하지만 공손하며 반듯한 저 태도는 조카사윗감으로 나쁘지 않…….
“흠흠.”
퀘사는 살기를 거두고 팔짱을 낀 채 브리튼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브리튼의 태도에, 숨기는 것은 없어 보였다.
“……정말입니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냐는 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물었다.
아리넬이 간밤에 브리튼의 방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브리튼이 제 본능도 주체하지 못하는 그런 못난 놈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네. 그저 피곤해하길래 침대를 내어 줘 재웠을 뿐입니다.”
“……흠.”
“고모님도 아실 텐데요. 아리넬이 한 번 잠들면 쉽게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퀘사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브리튼이 미소를 띤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브리튼의 미성이 들렸다.
“고모님.”
“…….”
“저는 아리넬을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브리튼의 목소리가 이어 들리자, 퀘사는 손끝을 움찔 움직였다.
그건 알고 있었다.
브리튼을 처음 만난 장소는 마녀족의 마을 안이었다.
아리넬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몸을 숨기고 있던 퀘사를 감으로 알아챈 브리튼은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공손히 인사했었지.
그리고 아리넬의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따라다닐 거라는 자신의 으름장도 받아 주었다.
꽤 반듯한 녀석 같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아리넬을 지키지 못했던 녀석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는데…….
마녀족의 마을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구를 들고 달리는 모습에서 퀘사는 브리튼에게 꽤 큰 감명을 얻었었다.
어쩌면 저런 녀석이면 아리넬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었지.
“그러니 저를 믿어 주세요.”
브리튼은 눈을 녹이는 햇살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퀘사에게 말했다.
퀘사는 그 미모에 위축되어 알았다고 말할 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황태자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전히 아리넬이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현존하는 놈들 가운데에서는 아리넬의 짝으로 제일 괜찮기는 한 것 같고…….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퀘사는 산뜻한 대답 대신 무거운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아리넬을 상처입히기라도 한다면…….”
분명한 협박의 뜻이 깃들어 있었다.
“……필시 다시 데려갈 겁니다.”
퀘사는 브리튼에게서 훅 돌아섰다.
등의 장검이 덜컹거리며 퀘사와 함께 천천히 멀어져 갔다.
여전히 여유로운 웃음기를 띤 채 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브리튼은 입술을 벌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옅은 미소와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상처입히지도 않고, 돌려보내지도 않을 겁니다.”
* * *
깨어 보니 브리튼은 침실에 없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편이 훨씬 나았다.
있었다면 민망해서 더 오랫동안 자는 척을 해야 했을 거야.
다행히 경비병을 치워 두었는지 사람이 없어서 눈에 안 띄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살금살금.
겨우겨우 빠져나와서 황궁 앞에 세워진 삯마차를 타려는 때,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아가씨.”
제기랄, 누구야?
슬쩍 몸을 돌리자 황태자궁에서 얼핏 본 시종이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댁까지 모셔다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 괜찮은데…….”
“어서 타시죠.”
척 봐도 눈에 엄청나게 띄는 황궁 마차의 문이 열려 있었다.
이걸 타고 들어갔다가는 눈치 빠른 애덤이 내가 브리튼과 밤을 새우고 왔다는 걸 눈치채고 말 것 같다.
물론 아무 일 없긴 했지만……. 그래도 부끄럽다고.
어쩌지.
“저 그러면, 저희 집 몇 블록 전에 세워 주세요.”
바로 집 앞이 아닌 다른 곳에 내리면 되겠지. 생각하며 나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어제 브리튼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머릿속에 떠돈다.
“가면을 쓴 마스건, 브리튼이건……. 이제는 황태자 전하가…….”
다시 만나면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까.
볼에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달각거리는 마차는 우리 집 몇 블록 전 극장 앞에 세워 주었다.
“고마워요.”
그곳에서 나는 이제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누군가가 뭘 떨어뜨리는 소리를 냈다.
우연이겠지, 했지만 어김없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아리넬?”
으윽.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는데, 그 형형한 눈빛에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어제 외박했지?”
그녀는 다름 아닌 라리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