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뭐?”
“이 눌린 머리와 입가에 옅은 침 자국. 분명…….”
붉은 머리카락을 높게 올린 라리엘은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 고풍스러운 초상화에서 튀어나온 듯 우아한 모습이었다.
“……라리엘…….”
저번에 무도회 때 라리엘이 나를 꾸며 준 이후로는 첫 만남이다.
그리고 방금 그녀가 떨어뜨린 부채는……. 꼬맹이 때 가면무도회에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일부러 떨어뜨렸던 그 부채와 동일했다.
“…….”
“황태자 전하야? 방금 마차.”
“그게, 라리엘…….”
화가 났는지 모를 표정으로 얼굴이 굳은 채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어쩐지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저번에도……. 브리튼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까 라리엘, 어렸을 때 브리튼을 좋아했었는데. 혹시 아직도…….
거기까지 다다르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나는.”
먼 시간을 돌아서 결국 친구가 되었는데 사랑 때문에 다투고 싶지는 않다.
탁-
라리엘이 고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눈썹은 굳어 있었다.
“너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 * *
“잘 들어, 아리넬. 그러니까 피임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음…….”
라리엘이 아직 브리튼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브리튼에 대한 관심은커녕 나에 대한 걱정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원하지 않는데 그런 짓을 하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무릎에 힘을 실어서 고간을 퍽 하고…….”
라리엘은 나를 앉혀 두고 열심히 제 나름의 성교육에 열중이었다.
마치 물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교육하듯,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말이다.
“그러니까, 라리엘.”
“자, 따라 해 봐.”
“저……. 진짜로 아무 일 없었다고. 우리는 뽀뽀조차 안 했는걸.”
라리엘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눈을 보며 똑똑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자 흠칫한 라리엘이 진짜냐는 듯 다시 물었다.
“뽀뽀……도 안 했다고?”
“응.”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재회한 나와 브리튼에게 여러 사건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리고……. 꽤 어제는 꽤 민망한 상황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딱히 진도를 나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그럼 다행이네. 하지만 만약에 뽀뽀를 하게 되면 키스까진 가지 않게 조심해. 키스를 한 뒤 손을 잡고 자게 되면 임신할 수도 있으니까. 아까 내가 말한 대로 꼭 피임을…….”
라리엘의 말을 듣는 내내 거슬렸지만, 그녀가 너무 흥분한지라 지적하지 못했던 점을 나는 지적해 주었다.
“키스로 임신할 수는 없어.”
“뭐?”
라리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나를 임신하셨다고 했는걸.”
“아니. 완전히 잘못 알고 있어, 라리엘. 그러니까 아기를 만들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해.”
그러고는 아까 라리엘이 한 말도 정정해 주었다.
“무엇보다 왼쪽으로 귀를 세 번 털고 다섯 번째 손가락을 두 번 접는다고 피임이 되지는 않고 말이야.”
라리엘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리넬.”
나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다시 묻고 싶어, 정말 모르는 거야? 그럼 고간을 왜 차라고 한 건데.”
“당연히 급소니까 그렇지. 차면 힘이 풀리는.”
“……아…….”
우리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라 성년인데, 아직도 그걸 모른다는 말이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라리엘은 사교계의 꽃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화려한 외모에 나이보다 성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것쯤은 진작에 졸업한 줄 알았는데.
“……있잖아, 라리엘.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어?”
뭐, 라리엘이 왜 그런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성장했는지는 알 것 같다.
어린 나이부터 연극단 배우 생활을 하며 순회공연을 다녔으니, 부모님께서 그런 걸 정식으로 가르칠 기회가 없었겠지.
무엇보다도 내가 없는 동안 사교계가 멈추어 버려, 또래들과 제대로 된 교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인들의 교육도 받지 못해 춤을 출 줄 모르는 영애들이 많다고 했지.
“……세상의 진실이라니?”
크크 웃는 내 표정에 라리엘이 으슬으슬한지 제 어깨를 손으로 감싸며 경계하는 눈으로 물었다.
피식.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아기는 말이야…….”
* * *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가씨.”
애덤은 차를 내오며 내게 물었다.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요.”
“어젯밤에 라리엘 아가씨와 수다를 많이 떠셨나 보군요. 조금 피곤해 보이십니다.”
라리엘의 극장에 들른 덕에, 나는 어제 외박을 외박한 핑계를 둘러댈 수 있었다.
황궁에 들렀다가 라리엘을 만났는데 밤새는 줄 모르고 놀다 잠들었다고 말이다.
“그…… 그……. 말도 안 돼!”
얼굴이 붉어진 라리엘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니.
라리엘은 아무튼 아침부터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더듬더듬,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를 놀랍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리넬, 넌……. 정말로 모르는 게 없구나. 네가 존경스러워. 대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정보를…….”
그러니까 우리 나이에 모르는 게 이상한 거라고!
아무튼 얼마 전부터 알렌스 부인의 귀환으로 사교계가 재가동되며 숙녀들의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니까 이제 라리엘 같은 케이스가 더 나오진 않겠지.
“혹시 황태자 전하는 만나 보셨습니까?”
애덤의 목소리에 나는 찻잔을 잡은 손을 움찔했다.
“……아, 아니요.”
그리고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어젯밤에 같이 있었다는 말까지 나와 버릴 것 같아서였다.
“듣기로는 폐하께서 퀸넬의 신전에 택일을 요청하셨다고 합니다.”
“택일이요?”
“네. 이제 황태자 전하의 약혼자이신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으니. 혼인날을 정해야겠죠.”
푸흐.
그 말에 나는 입 안의 차를 조금 뿜어 버렸다.
“……아가씨?”
애덤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 택일이라니.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뭐 이른 시일 내로 정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신탁 절차도 있을 테고, 보통은 일이 년 뒤이니 당장 급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성년이 되면 약혼자와 결혼을 하는 것이 제국의 당연한 관례였다.
실종되었던 세월이 길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브리튼의 약혼자였고 말이다.
하지만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바로 결혼 택일 절차라니.
‘한때는 브리튼과 결혼하게 될 리 없다고 장담했던 때도 있었는데.’
저렇게 예쁘고 잘난 애가 변치 않고 나를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고 브리튼은 아직도 나를…….
“나의 첫 순간을 그대에게 바칠 생각을 하니, 역시 방비하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문득 내가 라리엘에게 알려 줬던 세상의 진실과 연관된 뭔가……. 그러니까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해야 할 것이 떠올라 얼굴에 열이 올랐다.
‘으으…….’
“저, 아가씨.”
그런데 문득 나를 부르는 애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 보였다.
나는 흠칫 애덤을 보았다.
그는 어쩐지 슬픈 빛으로 눈을 일렁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향후의 일이겠지만 아가씨께서는 황태자 전하와 결혼하시면, 이 후작저를 떠나게 되시겠죠?”
“아…….”
아무래도 황태자비가 되면 원래 살던 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될 것이다.
이 정도면 후작가를 멋지게 재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내 본가이자 친정으로 남아 있을 테지만 보금자리는 옮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실 테니 아가씨께서는 제국의 가장 고귀한 분이 되시겠지요.”
“…….”
“향후의 일이지만 벌써부터 아가씨가 그리워지려 합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안 계셨던 순간이 아쉽고요. 조금 더 아가씨를 오래 모실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애덤은 나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담아 아쉬움을 전했다.
“애덤. 벌써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요. 결혼은 식장 들어가는 순간까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리고 황위라니, 아직 폐하께서 한창때인데 그런 말을 하면…….”
“아……. 모르고 계셨습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애덤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폐하께서는 황태자 전하께서 혼인하시면 황위를 선위하실 생각이라고, 전부터 말씀해 오셨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라 멍하니 애덤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들은 말이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고요?”
“사실 제가 갈넴에서 아가씨를 찾기 전부터, 그럴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뭐 성년이 되려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황제위를 선위하고 싶으시다고요.”
쿵쾅, 쿵쾅,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폐하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모두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뭐. 그분의 뜻을 말릴 수 있는 분은 없으니까요. 설령 황태자 전하라도요.”
“하지만, 이제 흑반도 사라졌고……. 건강하시잖아요. 선위하실 이유가…….”
중얼대던 나는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곧장 다시 황궁에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선위라니, 누구 마음대로!
나를 며느리랍시고 여기에 데려다 놓고 자기 혼자 떠날 준비를 하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고.
“폐하를 만나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