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히이익!”
어둑한 노을을 뒤로한 푸른 눈이 유달리 선명해 보여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표정에 브리튼은, 입술 끝을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몇 발짝 걸어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릴 때는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는데 지금의 브리튼은 훨씬 내 위에 있었다.
내가 작은 건 아니다. 난 보통 키라고!
브리튼이 너무……. 큰 거다.
“놀랐어, 아리넬?”
그림 같은 배경에 아득하게 잠긴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을 꾸는 듯 감미로웠다.
두근, 두근, 그 밤의 일이 떠올라 가슴이 작게 뛰어 왔다.
나는 조금 경직된 채 고개를 끄덕이며 브리튼을 보았다.
브리튼은 손을 들어 조금 흐트러진 내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미안해.”
그런 말을 달싹이는 브리튼의 입술이 유독 붉어 보였다.
높은 콧대 아래로 떨어지는 예쁜 모양의 입술.
왜 갑자기 라리엘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걸까?
“뽀뽀……도 안 했다고?”
문득 얼굴에 화악,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마스와 같은 냉정하고 위험한 느낌과 어린 브리튼의 다정하면서도 유들유들한 느낌을 반씩 섞은 것 같은 지금의 브리튼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늪 같았다.
발을 헛디뎌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심연을 가진, 그런 위험하고 다정한 늪.
“데이트하려고 왔어.”
브리튼의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런 말은 없…….
하지만 뭔가 묻기도 전에 브리튼은 손을 뻗어 나를 공주님 안듯 들어 안았다.
으아앗!
나 엄청 배부르게 먹어서 무거운데!
문득 어릴 적 불꽃놀이를 보러 갈 때 나를 이렇게 안았던 마스가 떠올랐다.
“…….”
브리튼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볼이 터져 버릴 것 같아. 내려 줘.
바동거리려는데 브리튼이 조금은 엄한 말투로 내게 속삭였다.
“납치할 거야.”
잠깐만, 아까는 데이트하자며.
브리튼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서 귓가로 흘러들었다.
“지금 질투심에 눈이 멀었거든.”
흠칫. 얼어붙은 나를 안은 채 그는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 * *
“저기, 황태자 전하?”
나는 어딘지도 모를 길을 그의 말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등 뒤로 단단한 브리튼의 가슴이 느껴졌다.
그는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가 떨어지지 않게 내 허리 부근을 감고 있었다.
“우, 우리 어디 가요오…….”
내 말은 바람에 흩어 사라져서, 브리튼에게 닿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혹시 오해가 있다면 말로 푸는 게 어떨까요?”
브리튼은 아까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고 했다.
누굴 향한 질투일까, 생각해 보니 대상은 뻔한 것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 파르메스 아슬렛. 내가 열심히 케이크를 가르쳐 주고 온 우리 짐머 아저씨.
“폐하는…….”
“알아.”
브리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를 귀여워하고 딸처럼 소중히 여긴다는 거, 그리고 그대는…….”
“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나 다름없어요. 짐머 아저씨는.”
말은 긴 밤을 뚫고 날쌔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짐머 아저씨를 질투하는 건 그만…….”
“아리넬.”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문득 말은 평탄한 길이 아닌 절벽 쪽의 위험한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길이 아닌 거 같은데?
무서워서 바싹 얼어붙은 나를 꽉 잡은 채 브리튼이 입술을 달싹였다.
“언젠가 그대에게 거짓말을 한 적 있어.”
거짓말이라고?
“그대의 두 번째라도 좋다고.”
그 순간,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같이 보러 가자던 브리튼의 말을 거절했던 때가 떠올랐다.
“부인의 두 번째라도 좋아요.”
브리튼이 웃음기를 띤 채 그렇게 말했었지.
“그런데 사실 전혀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대와 같이 불꽃놀이를 본 아이가 여자든 남자든, 아니면 그대가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이건……. 재상이건, 성주이건.”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온 소름에 온몸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보다 앞자리에 두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느껴지는 엄청난 독점욕.
“폐하일지라도.”
그는 나를 좋아하는 그 누구에게도 결코 뒤로 밀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를 온전히 차지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지금껏 숨겨 왔던 욕심이, 말을 타느라 조금 거칠어진 숨 사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에게 허리를 붙들린 채 나는 빳빳이 굳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말이 우뚝 멈추었다.
쌩쌩 지나가던 바람이 멎고, 우리는 멈춘 말 위에 서로의 몸이 닿은 채 앉아 있었다.
“…….”
두근, 두근.
심장이 튀어나와 버릴 것처럼 뛰고 있었다.
어떡해.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스윽-
그 순간, 내 허리를 놓아준 그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움찔하는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치 제게 뛰어내리라는 듯.
나는 내 눈높이 아래에 서 있는 브리튼을 보았다.
달빛 아래 호수처럼 잠긴 푸른 눈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꾹 닫혀 있는 입술.
단정한 검은 제복에는 금사로 황실의 문양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나를 향해 펼친 손의 흰 장갑에는 조금의 구김도 없었다.
“…….”
반면 그의 눈동자 속에 있는 나는 머리카락부터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얼굴빛은 잘 보이지 않겠지만, 분명 조금 경직되어 있겠지.
“이리 와.”
나직한 목소리에 나는 홀리듯 브리튼을 향해 뛰어내렸다.
브리튼은 온 무게로 안겨 오는 나를 붙잡아 껴안았다. 내 머릿속에서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폭 안긴 그의 가슴은 단단하고, 따스했다.
하지만 다시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
“…….”
그래서 우물쭈물 계속 품에 안겨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갈넴이 있어.”
……갈넴?
익숙한 지명에 나는 그의 가슴에 묻은 채 꾹 감은 눈을 뜨고 천천히 브리튼에게서 몸을 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절벽 아래 먼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나는 눈썹을 올리고 놀란 얼굴로 눈망울을 일렁였다.
“……!”
저 멀리,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할 만큼 먼 거리에, 반딧불이처럼 작은 불들이 오밀조밀 켜진 마을이 보였다.
내가 살던 때와는 오밀조밀한 빛의 간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소중한 마을이 저기 있음을.
파르메스는 갈넴을 재건했고, 카인과 마녀족이 저곳으로 이주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살았던 집과, 짐머 아저씨, 아머스 아저씨, 파넬 아저씨, 피올렛 아주머니, 애니 이모와 버넬 삼촌이 살던 집도.
그리고 애드가 씨의 정원도 모두…….
저곳에 있는 걸까?
긴장해서 쿵쾅쿵쾅 뛰던 가슴이 차차 잔잔해지며 그리움에 찬 감동 같은 것이 밀려들었을 때, 나는 브리튼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브리튼, 그와도 단둘이 1년을 저기에서 지냈었다.
그때는 소중한 친구였었는데.
“정말……. 갈넴이에…….”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브리튼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 * *
7년 전.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브리튼은 황제의 집무실로 나아갔다.
육중한 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텅 빈 집무실에 앉아 있는 파르메스가 보였다.
찬란한 은발 아래 그의 눈매는 더할 나위 없이 싸늘했고, 감도는 분위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으나 브리튼은 내색 없이 파르메스의 앞에 섰다.
[황명으로 비상 체제를 발동하여 전 황군을 대상으로 수색 명령하였으나, 정령성주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지금 파르메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은 근위 기사단장의 보고서였다.
아, 쓸모없는 인간들. 그냥 다 죽여 버릴까.
파르메스의 눈매에 흐르던 위협적이고 사나운 기운은 천천히 제 앞에 선 아들에게 향했다.
“…….”
소년 브리튼은 반듯한 자세로, 파르메스를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드리운 절망이, 자신의 아버지도 함께 뒤덮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더냐.”
파르메스는 브리튼을 문책하고 있지 않았다.
아리넬을 잃은 것이, 브리튼에게도 불가항력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카르힌의 흑마법이 담긴 그림자는 마차를 호위하는 호위 병력까지 단숨에 무력화시켰으니, 거먼트 공작이나 파르메스급이 아니면 대응하기 불가능한 힘이었다.
아직 힘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한 브리튼에게는 당연히 무리인 일이고.
브리튼이 보통의 기사들 이상의 실력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불편한 심기를 숨길 수는 없었지만, 브리튼도 파르메스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지 않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신전으로 가겠습니다.”
잠시 후 브리튼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파르메스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