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60)
160화
이내 그는 마른 입술을 달싹여 서늘한 목소리로 브리튼을 문책했다.
“도망치겠다는 말이냐.”
“…….”
“널 그리 약하게 가르친 적은 없는데.”
잠시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던 브리튼이 입을 열었다.
“흑반이…… 시작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파르메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제 앞에 선 브리튼이 천천히 시선을 올려 파르메스의 붉은 눈과 눈을 맞추었다.
둘 사이에 한참 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알아챘구나.”
파르메스의 자조 어린 목소리가 브리튼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아슬렛 황가의 영원한 저주. 흑반.
그것이 파르메스의 심장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퀸넬산은 바하무트와 먼 거리가 아니고 지름길이 있으니, 거먼트 공작과 함께 저녁에 그곳에서 생명초를 채취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흑반에 치료법은 없지만, 최대한 진행을 늦추게 하는 방법은 있었는데 그것은 꽃을 섭취하는 것이었고, 그 꽃은 오로지 바하무트에서만 자랐다.
이미 바하무트에는 파멜 거먼트의 기지가 있었다.
하지만 바하무트에 들어가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거먼트 공작밖에 없어서, 꽃 채취의 효율성이 낮았다.
그러니 황태자 브리튼이 이 일을 돕는다면 꽃을 더 원활하게 수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필요 없다.”
파르메스의 말에 브리튼의 손이 움찔했다.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 아버지의 붉은 눈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담겨 있었다.
하이젠의 딸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혐오, 광기, 살기, 그리고 지금까지 하이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제법 성군 흉내를 내며 살아왔던 것이 대한 허무함.
아버지에게 아리넬은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귀히 여기던 이가 남기던 유일한 유품이자, 피를 뿌리지 않기 위한 검집 같은 역할이라는 것을 브리튼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기약 없이 잃어버린 후였고.
“…….”
브리튼에게도 역시, 아리넬은 제 자신을 뿌리부터 바뀌게 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그리하여 브리튼은 말을 이었다.
“낮에는 정보들을 취합해 아리넬의 거취를 수색하려 합니다. 신전은 정보가 모이는 요지이기도 하니, 쓸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죠.”
브리튼의 푸른 눈이 얼음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저야말로, 절대 아리넬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움직임 없던 파르메스의 광폭한 붉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브리튼은 결연한 의지를 심장에 품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
“폐하의 건강도, 그리고 제국도, 대정령사와 그 딸이 지키기를 원했던 이상도.”
브리튼은 파르메스가 반쯤 미쳐 버릴 정도로 지쳐서, 놓을까 말까 고민했던 것들을 또렷한 목소리로 꼬집었다.
그 말에 눈썹을 다시 꿈틀 움직인 파르메스는 한참 동안 브리튼을 보다가 입술을 비릿하게 비틀었다.
짜증과 광기가 끓고 있던 그 눈이 용암이 식어 가듯 차츰 차가워졌다.
“알았다, 브리튼.”
* * *
집무실에서 나온 브리튼은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걸었다.
아리넬이 그렇게 된 이후 하루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지만 정신은 언제나 고통스러울 만큼 또렷했다.
이 또한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광룡의 핏줄 때문이겠지.
“…….”
마치 불 위를 걸어가듯 발이 뜨거웠다. 심장과 폐는 이미 몇 갈래로 찢긴 듯 숨을 내쉴 때마다 고통스럽고, 혈구가 온 혈관을 공격하는 듯 몸이 따끔거렸다.
어쩌면 아리넬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차라리 불에 타서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고대의 용은 누군가에게 한 번 각인되면 평생 그 사람을 위해서 살며, 삶과 죽음, 그 이후조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한다는 오랜 전설이 있었다.
이렇게 미쳐 버릴 것 같은 이유 역시 광룡의 혈통이어서일까. 어쩌면 자신의 영혼은 아리넬에게 각인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리넬, 아리넬,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입이 마르다.
목구멍이 활활 타는 것 같고, 가시가 박힌 것 같으며, 세상을 찢어서라도 어느 틈바구니에 있을 그 애를 꺼낼 수만 있다면…….
“…….”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
브리튼은 멈추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는 소년의 몸과 어울리지 않는, 세상을 집어삼켜 버릴 만큼 강렬한 푸른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널 좋아해, 아리넬.’
푸른 하늘 아래, 흙 냄새가 나는 어느 초라한 땅에서 브리튼의 마음은 시작되었다.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큼 좋아해.’
아리넬은 브리튼에게 장차 다른 여자를 만나면 변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소년의 마음을 별거 아닌 듯 웃어넘기려 했지만.
아리넬은 모르고 있었다.
그 마음의 끝은 브리튼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으며, 심장의 기저에 뿌리박혀 그 누구도 뽑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거야.’
하늘을 바라보던 브리튼이 시선을 내려 정면을 보았다.
아리넬을 다시 만나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울 테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 이 순간조차 화상을 입은듯 쓰라리고 따갑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살아 내며 아리넬을 향해 걸어가리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난 아리넬이 이 손에 닿는다면.
“…….”
이번에는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다.
* * *
달콤하고 감미로운 입맞춤.
갈구하는 듯한 입술.
브리튼의 숨결이 입 안으로 전해져 왔다. 그의 키스는 부드러우면서도 거셌으며, 마치 파도가 밀려드는 것처럼 정신을 일깨웠다.
등이 빳빳이 굳는 것 같고 손가락 끝이 절로 움찔거렸다.
그런데, 숨 쉬기가 힘들어…….!
파르르-
내가 어깨를 떨고서야 브리튼은 천천히 나를 놓아주었다.
“……하아……. 하아…….”
나는 조금 헐떡이며 내 앞에 마주 선 브리튼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아래 그 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쿵, 쿵, 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방금 나…….
방금 나, 브리튼이랑 키스를…….
첫 키스를 했어!
브리튼의 볼에도 희미한 열기가 보였다.
그는 다정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좋아해. 아리넬.”
* * *
“…….”
말에서 나를 내려 준 브리튼은 내 손등에 옅게 입술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넋 나간 듯 있던 나의 어깨를 뒤로 돌려 우리 집 입구를 마주 보게 해 주고 등을 살짝 밀며 고개를 내 뒤통수 가까이 대어 속삭였다.
“잘 들어가. 오늘……. 즐거웠어.”
그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흠칫 정신을 차린 나는 브리튼을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황급히 끄덕이고는 빠른 속도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벌써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문을 열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애덤이 벌떡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오늘은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걱정했습니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아가씨 얼굴이……!”
“…….”
나는 곧바로 양손을 들어 터져 버릴 것 같은 볼을 감쌌다.
“술이라도 드신 겁니까?”
나는 아마도 활활 끓어오르고 있을 볼을 가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몸을 움츠린 채 애덤을 지나쳐 걸었다.
“아가씨, 어디 아프신 건……. 열을 재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피곤하니까 잘게요.”
“그래도 아가씨!”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내 방에 겨우 세이프한 뒤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문에 등을 대고 한숨을 쉬며 아래로 액체처럼 내려앉았다.
뜨거운 볼에 손을 대고 있어서인지 손바닥마저 따끈따끈해진 것 같다.
내 방 안은 어둑했고, 머릿속에는 아직도 브리튼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좋아해, 아리넬.”
진정 어린 그 목소리는 가슴 속 심장을 휘감는 것 같았다.
뭔가 펑 터져 버릴 정도로 설레고 떨렸으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
나는 내 손을 들어 두근두근 뛰는 왼쪽 가슴 위로 올렸다.
그래,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래서 아주 모기만 한 목소리로 브리튼에게 대답했다.
“저도……. 저도요.”
한참의 정적 끝에 브리튼이 다시 입을 맞추어 왔을 때, 나는 발끝을 들었다.
브리튼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 버릴 만큼 좋은 향기가.
마치 꽃밭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 허리를 감은 그의 손이 기분 좋아서, 그리고 그와 숨결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했다.
“…….”
키스가 끝난 뒤 나는 한참을 일렁이는 눈으로 브리튼을 바라보았다.
이미 브리튼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마녀족의 마을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조금 늦은 걸음으로 왔지만, 어쨌든 우리는 결국 만나서 서로를 보고 서 있었다.
나는 브리튼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안기며 붉어진 얼굴을 숨겼고.
브리튼은 내 등을 토닥이며 안아 주었다.
그리고 나를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아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거겠지?’
나 분명 전생에서도 연애를 해 본 적 있는데, 그런 경험은 전부 사라진 것처럼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건가?’
심장은 운명적인 인연을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으아아.”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아도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두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브리튼이고 마스고 내가 훨씬 누나라고 생각했는데.
몸의 나이와 상관없이 영혼의 나이가 있으니 꼬마 친구로 보였단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여유로운 생각 따위는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