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아리넬…….”
바람을 타고,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 말에, 얼핏 굳어 있던 것 같던 할아버지의 입술 새가 조금 벌어졌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튀어나올 듯 뛰고 있었다.
이윽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도.”
“…….”
“너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느냐.”
그 말에 시선을 낮춘 채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대해서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네, 어쩌면 자기 목숨보다도요.”
마녀족의 마을에서 독구를 들고 달리던 브리튼의 모습이 생생했다.
브리튼은 언제나 그랬다.
그런 남자였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올려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할아버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미소 짓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그 미소는 쓸쓸함, 그리움, 안도 등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아리넬. 너의 뜻을 알겠다.”
할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 * *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눈길이 있다.
늘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솜털 같은 아기 새가 작은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가는 모습이 언제나 못 미더웠던 그였다.
하지만 아리넬의 확신 어린 눈빛은 언젠가 제가 보았던 아들 하이젠의 눈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하이젠은, 죽기 전까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
일렁이는 아리넬의 눈망울을 보던 마일라 대공은 말했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아리넬은, 할아버지가 말을 잇기도 전에 그 뒷말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뒤에 할아버지와 마일라 대공가가 있음을…….”
아리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리고 제 집이 마일라 대공가임을 항상 기억할게요.”
아리넬은 마일라 대공에게 다가가 그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애덤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따뜻한 계절이었다.
* * *
3년 뒤, 벚꽃이 거리를 뒤덮던 날, 화려하고 아름답게 조성한 화원에서 나는 브리튼에게 어떤 선물을 받았다.
“……이건…….”
브리튼이 내민 반지에는, 내가 언젠가 받은 사파이어 목걸이와 같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보석 주변을 작은 다이아몬드가 둘러싸고 있었다.
“바하무트에서 찾았어.”
그럼 요즘 내 말도 안 듣고 위험한 바하무트에 몇 번이나 다녀온 이유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브리튼이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띤 채 나를 제 몸에 가까이 붙였다.
“좋아해, 아리넬.”
그 말에 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를 바라보는 청록색 눈 안에, 그의 짙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전하…….”
뭐, 우리는 연인 사이이기는 하다.
3년이나 만났으니, 좋아한다는 말 정도는 서스럼 없이 할 수 있는.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멈칫한 내 손에, 브리튼이 비스듬히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들려 오는 나직한 목소리.
“……나와 결혼해 줘.”
그 말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겨…… 겨…… 결혼?
“…….”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바싹 굳어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브리튼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아리넬이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고, 아리넬을 만나려 하는 사람들도 많고…….”
“…….”
“그래서 애가 타.”
어쩐지 괴로운 듯한 브리튼의 푸른 눈에 나는 심장이 덜컹거렸다.
생각해 보니, 요즘은 데이트를 거의 사흘에 한 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도 브리튼이 찾아와서만 했지.
조금 서운했을 수도……. 하지만 결혼은…….
“매일 함께 있고 싶어.”
브리튼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약해진 심장을 푹 파고들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을 자고.”
그의 볼이, 평소와는 달리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하다.
내 심장도 두근두근, 뛰쳐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대와 함께 살고 싶어. 아리넬.”
나는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사랑해. 아주 많이.”
브리튼은 자신의 진심을 뱉어 낸 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은발과 호수처럼 청명한 푸른 눈동자, 그리고 조각한 듯한 얼굴.
이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브리튼과 진짜로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믿지 않았고, 브리튼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브리튼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좋아하는 내 마음도,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대가 황태자비로서 나와 함께 살면서도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었어. 그러니……. 부디 고려해 줘. 나와의 결혼을.”
조금 예상하지 못했던 프러포즈였지만, 언젠가 그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황태자 전하.”
나는 브리튼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 입술에 닿은 그의 푸른 시선은 조금 긴장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브리튼답지 않게도.
“저는…….”
“…….”
“결혼하고 싶어요.”
브리튼의 프로포즈에 대답한 나는 발꿈치를 들어 올린 뒤 그의 볼에 짧게 키스했다.
두근, 두근,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었다.
브리튼 아슬렛, 알브레온 제국의 황태자, 그리고 이제는 사랑하는 나의 남자 친구이자…….
남편이 될 사람.
“…….”
잠시 멈추어 있던 브리튼이 손을 뻗어 머리를 감싸 왔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곧장 입을 맞추었다.
짙은 키스에 머릿속의 온갖 상념들이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내게 키스한 브리튼은 입술을 떼고 내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게.”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 브리튼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뭐, 우리가 원래부터 짐머 아저씨에 의해 약혼된 사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혼 전에 양가의 인정은 받아야 하는 법이다.
참고로 지난 주에는 마일라 대공가에 다녀왔었다.
그곳에서 퀘사 고모와 함께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화이트 베어를 사냥하던 거먼트 공작도 만났었고.
할아버지는 조금 무서운 분위기로 브리튼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헬리오 삼촌도 그러긴 했지만…….
아무튼 우리는 결혼 허락을 받아 냈다.
헬리오 삼촌이 브리튼에게 무슨 협박을 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브리튼은 싱긋 웃으며 그 내용에 대해 말해 주지는 않았다.
“…….”
아무튼 지금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 테이블 맞은편의 파르메스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결혼을 한다고?”
파르메스의 입술이 달싹이며 언뜻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갈넴의 짐머 아저씨였을 때처럼 여전히 친밀하고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정말로 며느리가 되겠다고 허락받는 셈이니까 말이다.
“……예, 저희, 결혼하겠습니다.”
브리튼은 단단한 목소리로 파르메스에게 대답했다.
후우. 떨려라.
이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는, 내가 최근에 실수한 게 없나 되짚어 보게 된다.
‘너무 버릇없게 굴긴 했었지. 그래도 황제 폐하인데.’
며칠 전에는 반찬 투정을 한다며 파르메스에게 잔뜩 잔소리를 하기도 했던 나였다.
그래서 이 침묵은 유달리 길고 무겁게 느껴졌다.
왜……. 아무런 말씀도 안 하시는 걸까?
뭔가 대답을 할 만도 하건만, 파르메스는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흠칫해 파르메스를 올려다보았는데,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였다.
“잠시만 기다려라.”
그런 말을 한 파르메스가 갑자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브리튼을 보았다.
“……저, 아무래도 탈락인가 봐요.”
내 말에 브리튼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내 접시에 담긴 고기를 썰어 주었다.
파르메스의 장난 아니게 살벌한 표정을 봤으면서도 브리튼은 걱정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응?
나는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어디에선가 엄청난 환호성 같은 게 들렸는데?
잘못 들었나?
“명색이 황제이신데, 시아버지로서의 체통을 지키셔야 했겠지.”
내 접시의 고기는 어느새 반듯하게 썰려 있었다.
“걱정하지 마, 아리넬.”
브리튼은 싱긋 미소 지으며 포크로 고기를 찍어 주었다.
나는 육즙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부드러운 고기를 입 안에 넣고 냠냠 씹었다.
한참 뒤에야 문이 열리고, 파르메스가 들어왔다.
아까 굳은 그의 얼굴은 조금 풀려 있었는데, 안색이 어쩐지 상기되어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고기를 씹는 것도 잊고 멍하니 파르메스를 바라보았다.
파르메스는 조금 볼이 붉어진 채, 나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리넬. 드디어…….”
두근, 두근.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었구나.”
파르메스의 그 말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밝은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띤 채 파르메스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버님.”
내 말에 파르메스의 입꼬리가 하늘 끝까지 치솟을 듯 올라갔다.
혹시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지 잠시나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내가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이 매우 기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