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17)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18)화(17/173)
18
화
그 낡은 책은 얼마나 자주 꺼내어 보았는지 굉장히 헐겁고 해져 있었다.
나는 낡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책의 내용은 거침없이 발달하고 있는 청소년의 호기심을 만족스럽게 충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인체에 대한 익숙한 그림과 함께, 정령이 남자와 여자의 신체에 다른 영향을 준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고 태교에 도움이 된다는 내용 등이 있었다.
‘또 낚였군.’
그럼 그렇지. 치.
나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리고 그때, 책 사이에 꽂혀 있던 어떤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건…….”
무언가를 적은 노트 종이였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읽어 보았다.
휘갈겨 쓴 필체는, 저택의 곳곳에 남아 있는 아빠의 필체와 같았다.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려 하지만, 누군가는 존중으로 사람을 얻으려고 한다. 나는 늘 후자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
나의 정령술은 사람과 자연을 위한 것이었으며 소생을 위한 것이었고 파괴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의 여정은 그것을 위한 길이다. 실패하건 성공하건 하나의 꽃을 틔운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는 일렁이는 눈으로 아빠의 글을 끝까지 읽었다.
그것은 짧은 두 문단의 글이었을 뿐이지만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의 정령은 사람과 자연, 소생을 위한 것.’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굳건한 자아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꽃을 틔우다……. 표현이 아름답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느낌을 알 것 같다.
그것을 읽고 또 읽고 한참 동안 가슴의 잔잔한 파동을 느끼던 나는 천천히 종이의 뒷면을 보았다.
빛의 정령-모든 정령의 근원, 빛의 정령사만이 흑반을 치료할 수 있다. 가로, 네 번째, 세로, 세로, 가로, 두 번째, 은색.
그곳에는 아까의 글과는 상관없는 듯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흑반을 치료할 수 있다?’
흑반이 뭐지?
같은 필체인 걸 보면 이것도 아빠가 쓴 것일 텐데,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건 내가 잘 보관해야겠어.’
* * *
후작가 밖이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곳을 기웃거리는 이들은 대부분 내 또래의 영애들을 데리고 다니는 귀족 부인들이었다.
“곧 그분이 오실 시간이야.”
왜냐면 이 시간대에 알렌스 부인이 나를 가르치러 온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알렌스 부인의 마차가 도착하자, 선망 어린 시선들이 그녀의 마차로 향했다.
“세상에나, 저 아름다운 깃털 장식을 보세요.”
“부인, 아름다우십니다!”
귀족가의 사교계를 피라미드 구조로 그린다면, 알렌스 부인이 가장 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들 자신의 딸을 위해 부인의 관심을 끌려고 애타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몇몇 아이들은 부럽다는 듯 후작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듣기로는 마체르트 공작가에서 드디어 알렌스 부인의 교육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그럼…… 라리엘은 내게 이를 갈고 있으려나?’
알렌스 부인은 자신을 위해 모여든 부인들에게 손을 잡아 주며 인사를 했고 잠시 후 후작가의 앞에 섰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서 알렌스 부인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부인!”
“홍홍홍! 저번보다 더욱 기품 있는 걸음걸이이구나.”
알렌스 부인은 자신의 통통한 볼에 양손을 올리며 나를 귀여운 동물을 보듯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사교계의 꽃이 될 자질이 있어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부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러니 정말 포기할 수 없다니까……. 아리넬을 포기하는 건 열심히 찾아낸 보물 상자의 보물을 꺼내지 않고 도로 묻는 것이나 다름없어.”
중얼거리는 부인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체하기로 했다.
우리는 삼 층에 올라갔고, 하녀가 곧 따뜻한 차를 내왔다.
오늘은 티타임 예절에 대해 배우는 날이었다.
사교계에서 부인들의 티 파티는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알렌스 부인은 찻잔을 드는 법, 시선의 위치, 차를 따를 때의 상황. 그리고 황족들의 차 예절 등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녀의 교육이 특별한 점은, 알브레온 제국의 방대하고 복잡한 황궁 예절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국의 어떤 예법 선생도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부인, 그런데 제가 저번에 부탁드린 것은 어떻게 되었나요?”
교육이 끝난 뒤 나는 알렌스 부인과 차를 마시며 얼음을 양 볼에 문 것처럼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부인은 내 작은 손동작을 고쳐 주며 웃음 지었다.
“글쎄, 어떻게 되었을 것 같니? 홍홍홍.”
내가 개발한 레시피로 만든 홍사탕무 절편은 차와 곁들여 먹을 만한 간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귀족들에게는 말이다.
갈넴 마을에 살던 내게는 사 년의 폭정과 기근을 버틸 식량이었지만.
“어렵지는 않았나요? 귀족들은 고급 입맛일 테니까요…….”
사실 알렌스 부인에게 내 계획을 말하면서도 완벽하게 자신이 있지는 않았다.
“티 파티를 열어 홍사탕무 절편을 대접했는데 재료가 홍사탕무라는 것은 아무도 몰라보더구나. 단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환상적인 맛이 난다고 나를 칭송했었지.”
알렌스 부인은 귀족 부인들의 유행을 선도한다.
그녀가 걸치고 신는 것들뿐 아니라, 어떤 가구를 선호하는지, 어떤 음식을 선호하는지조차 유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알렌스 부인이 귀족 부인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홍사탕무 절편을 선보인다면 그 여파는 뻔했다.
“내 디저트의 재료가 홍사탕무라는 것을 언제 밝힐지는 아리넬, 너의 결정에 달렸지만. 내가 장담하건대…….”
때에 따라 단발머리가 개그맨의 꽁트용 머리가 될 수도 있고 배우의 시상식 머리가 될 수도 있듯, 홍사탕무도 소개되고 소비되는 방식에 따라 기품있는 디저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귀족 부인들은 알렌스 부인이 하는 일이라면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이라도 따라 할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홍사탕무는 향후 몇 년간 알브레온의 가장 사랑받는 디저트가 될 것이란다! 홍홍홍!”
그 말에 나는 함박웃음을 활짝 지으며 좋아했다.
“잘하셨어요, 부인. 고마워요!”
역시 알렌스 부인의 영향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뭐, 이런 것쯤이야. 이렇게라도 내가 우리 아리넬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즐거울 일이지.”
나는 저번에 만난 라피올레 멤버들의 가문을 통해 착실히 사업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내 사업체에 필요한 직원도 뽑고 있었고.
‘잭팟을 터뜨릴 때는, 좀더 사교계의 호기심이 깊어질 때가 낫겠지.’
홍사탕무에 대한 귀족들의 인기는 흉년이 닥쳐올 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면 홍사탕무 식품은 만들기 쉬우면서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음식이니까.’
원작에서 흉년이 닥치자 귀족들은 평민들을 더욱 수탈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평민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제 아리넬의 홍사탕무 밭을 위해 토지를 개간해야겠구나. 생각한 곳은 있니?”
나는 애너스 백작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르덴 자작가를 통해 계약을 체결한 애덤은 오늘 애너스 백작가와도 면담하기로 했다.
모든 계획이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 * *
“저는 부인이 정말…… 좋거든요.”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갔다.
잠에 들 준비를 하며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황태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흐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에 대한 그 무조건적인 호의가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상하다.
그에게 난, 약혼자랍시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일 뿐일 텐데.
“…….”
문득 돌아서던 나는 발을 멈칫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어젯밤에 꾼 그 꿈.
만약…… 우리가 만난 것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다면?
브리튼이 오랫동안 나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브리튼과 비슷한 체구의 소년이 문득 떠올랐다.
“…….”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난 갈넴의 풍경, 질척질척 비가 오는 풍경 속에서 나와 함께 있어 주던 어떤 소년.
얼굴 전체를 뒤덮은 흰 가면 사이로 그 애의 검은 눈동자가 뇌리에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