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21)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22)화(21/173)
22
화
인파의 물결이 내 어깨 쪽을 스쳐 갔다.
툭-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고, 바닥에 부채가 떨어진 것이 보였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으차, 하며 몸을 숙여 그 부채를 주워 주려고 했다.
하지만 부채를 흘린 사람의 발이, 내가 잡은 부채를 밟았다.
나는 흠칫해 고개를 들어 그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
나와 비슷한 체구의 여자아이.
화려한 보라색 가면 속, 오만한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아름답게 손질한 붉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레이스 드레스까지.
그녀는 내가 주우려는 부채를 발로 꾹 밟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잠시 멈칫했지만, 마체르트 공녀가 분명했다.
‘아저씨한테 나를 괴롭힐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했는데.’
나를 괴롭힐 사람……. 하나 있긴 하구나.
“촌스러운 볏짚 색의 머리카락에 녹색 눈이라. 손등은 사포처럼 거칠고…….”
나를 알아본 그녀의 입술 끝이 올라간 채 달싹였다.
“……시골에서 막 올라오셨나 보네요? 영애는?”
그녀의 뒤에 있던 마체르트 패거리가 킬킬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나는 천천히 부채에서 손을 뗀 뒤 일어서서 마체르트 공녀를 마주 보았다.
“혹시 그 가면은.”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말의 편자로 만든 것은 아니겠지요?”
마체르트 패거리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나는 눈에 힘을 훅 주고 마체르트 공녀를 바라보았다.
“과한 것은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는 거 아세요? 그런 의미에서 말의 편자로 만든 가면이 그쪽의 얼굴을 가린 보라색 보석 부메랑보다는 나을 것 같네요.”
그러자 마체르트 공녀도 똑같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향해 손을 올렸다.
가면까지 써서 더 무서울 게 없는 듯, 그녀는 입을 열었다.
“하, 촌스러운 시골 계집애 주제에…….”
“…….”
그리고 그 손으로 나를 밀치려는데, 누군가 내 몸을 감싸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나의 허리를 받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놀라서 움찔하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마스……?”
그리고 천천히 소년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샹들리에 아래의 소년은 얼굴 전체를 가린 흰 가면이 아니라 눈만 가린 검은 가면이었고, 가면의 눈 부분에는 검은 눈동자가 아닌 찬란한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마스와 겹쳐 보였을 뿐이지, 마스는 아니었다.
이 은발은 분명…… 브리튼 황태자.
‘왜 또, 마스 생각이 난 거지?’
갑작스러운 브리튼과의 재회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브리튼은 몇 초간 나를 기대게 하고 있다가, 내가 똑바로 설 수 있도록 잡아 주었다.
“전하……?!”
나를 보호한 소년의 정체를 알아챈 마체르트 공녀의 눈썹 끝이 놀란 듯 올라가 있었다.
공녀도 역시 브리튼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무도회에서 낯선 사람에게 손찌검이라니, 예의에 맞지 않군요.”
브리튼은 눈썹을 굳힌 채 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멍하니 브리튼을 바라보던 마체르트 공녀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전하, 제 어깨를 쳐서 부채를 떨어뜨리게 한 건 저 애예요. 그리고 제 앞에서 어떻게 저 애의 편을 들 수가 있나요. 제가 얼마나 전하를…….”
하지만 브리튼은 원망 어린 공녀의 말을 잘랐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말에 마체르트 공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면을 썼기는 하나 공녀를 몰라볼 리 없는데도, 브리튼은 모른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내 약혼자에게 다시 한번 함부로 대한다면, 후회하게 될 겁니다.”
서릿발이 날리듯 차가운 경고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마체르트 공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자, 뒤에 있던 패거리들이 눈치를 보았다.
공녀에게 할 말을 마친 브리튼은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검은 가면 속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다정했다.
“괜찮으세요, 부인?”
마체르트 공녀를 대했던 딱딱함은 눈 녹듯 사라지고, 소년의 목소리는 봄날 벚꽃이 날리듯 다정했다.
* * *
내 손을 잡은 브리튼은 나를 무도회장 바깥으로 이끌었다.
돌로 만든 오솔길이 정원을 가로질러 나 있었는데, 그 손을 잡고 한참을 걷다 보니 작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의 중앙에는 하늘에 뜬 달이 비추어 보이고 있었다.
긴 의자 모양의 바위에 도착하고 나서야 브리튼은 내 손을 놓았다.
그 바위는 어른들이 앉기에는 낮았지만, 우리같은 어린아이들이 앉기에는 적당한 높이였다.
브리튼은 나를 바위에 앉힌 뒤 조금 몸을 숙여 나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가면 속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걱정하듯 일렁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께서 때맞게 도와주셔서…… 별일 없었어요.”
내 말에 브리튼은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어 제 가면을 벗었다.
어린 소년의 얼굴이지만 서늘하고 아름다운 눈매와 높은 콧대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나도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린 가면을 벗었다.
솔직히 이 가면으로 라리엘의 정수리를 딱콩 해 주지 못해서 한이다.
‘사실은 그때 나를 밀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홍사탕무를 훅훅 뽑던 근력의 내가 그 어린 손에 끄떡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부들거리며 화를 내는 그 모습은 조금 속 시원했지.
“전하께서는, 괜찮으시겠어요?”
그 말에 브리튼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인?”
“마체르트 공녀요. 전하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고…… 꽤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아서요.”
브리튼의 입술 끝이 차갑게 비틀렸다.
눈매는 언제나처럼 다정한데, 어쩐지 주변에서는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체르트 공녀와의 친분은, 여타 귀족들과의 친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제 모르는 행동은 권위로 다스리면 되는 군신 간의 친분일 뿐이니…….”
브리튼의 목소리는 얼핏 듣기에 달콤한 우유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등골을 타고 시원한 기운이 흐르고, 몸의 솜털이 나도 모르게 쭈뼛 섰다.
“역시 부인께서 신경 쓰이신다면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처, 처리요? 그럴 것까지는…….”
브리튼 아슬렛, 정말 마냥 다정하고 착한 아이가 맞을까?
내게는 언제나 다정한 태도이지만 가끔 이렇게 보이는 냉혈한 모습에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고는 했다.
나는 어쩐지 목이 메 한참 뒤에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게 참 친절하신 것 같아요. 분명 우리는 황궁에서 처음 만났는데……. 마치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것처럼.”
내 말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늘 저를 돕고 싶어 하시구요.”
그 말에 브리튼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런가요.”
나는 브리튼을 바라보았다.
브리튼의 푸른 눈동자에는 밤 호수가 담겨 있었다.
“저는 부인을…….”
소년이 입을 열었을 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호수의 물결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잔잔히 일어나는 물결의 가운데서 숨어 있던 사람 넷이 갑작스레 솟아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푸르스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양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입술을 떼었던 브리튼의 눈썹이 크게 굳었다.
“습격입니다!”
브리튼은 황급히 나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그들의 앞에 섰다.
“도망치세요, 부인.”
긴장한 브리튼의 목소리로부터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 앞에 나타난 이들이 아군은 아니라는 사실을.
달빛에 비춘 칼날을 보자 간담이 서늘했다.
나는 전투 신을 소설 속에서 질리게도 많이 보았지만, 막상 이렇게 나를 향해 적의를 드러낸 칼을 보니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싫어요! 같이 도망쳐요.”
하지만 이 와중에도 브리튼을 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도 앤데 어떻게 두고 도망쳐!’
그리고 브리튼을 두고 도망쳐도, 넷이나 되는 사람들 중 한둘이 나를 따라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들이 점점 우리에게 포위망을 좁혀 왔다.
칼날은 잘 벼려진 듯 달밤에 서늘하게 빛났고,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곳은 인적이 드문 호수.
‘대체 우리를 공격하는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일까?
굳은 표정을 한 브리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피 흘려 황좌에 앉은 파르메스의 혈통을…….”
그때, 한 남자가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더니 외쳤다.
“이 손으로 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