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23)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24)화(23/173)
24
화
* * *
나는 잠시 파넬 아저씨, 아니, 파멜 거먼트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작은 바위에 앉았고, 그는 투구를 벗어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달빛에 그의 특징이었던 모히칸 헤어 스타일이 드러난다.
검은 피부와 그의 얼굴에 난 흉터들도 그대로였다.
그리웠던 얼굴을 보자, 갈넴 마을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파넬 아저씨가 내게 가장 감탄할 때는 우리가 체스를 둘 때였다.
나무로 얼기설기 이름만 써서 만든 낡은 체스판, 나는 종종 아저씨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체스를 두었다.
그리고 다섯 판을 하면 세 판은 내가 이기고는 했다.
체스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게임들 중 하나였으니까.
“이런 전술을 쓰다니……. 생각지도 못하는 허를 찌르는 방법이로다. 질레스와의 전쟁에서도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무혈입성할 수도 있었겠어. 허어.”
아저씨는 나와의 체스 수를 복기하며 혼자 떠들더니 쇳소리가 짙은 목소리로 나를 칭찬해 댔었다.
“아리넬. 너는 필시 본좌의 휘하에 들어와야겠노라.”
갈넴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가 특색이 있었기에, 스스로를 ‘본좌’라 칭하는 파넬 아저씨도 그저 개성이 풍부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몸집이 큰 아저씨가 큰 쇠스랑으로 두어 번만 밭을 갈아 주면 내가 반나절을 해야 하는 밭갈이를 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아저씨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홍사탕무 절편을 가져다주고는 했다.
“보존이 용이하니 군량미로서도 적절하겠도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아저씨는 내가 선물한 절편을 보며 영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이렇게 너와 다시 앉다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도다.”
“저는…… 상상도 못 했어요. 아저씨가 군사부 재상이시라니.”
확실히, 갈넴 마을 같은 작은 곳에서 농사일을 하기에 그 몸집과 기세가 엄청난 존재감을 뿜고 있기는 했다.
“허허, 놀랐더냐.”
2미터가 넘는 키에,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쪼그라들게 하는 형형한 기세.
투구를 쓰고 철편을 든 아저씨의 모습을 보니 본업이 따로 있었구나,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본좌의 가문 거먼트는 대대로 아슬렛 황가의 군대를 움직이는 명망 높은 군신 가문으로서, 폐하의 호위를 위해 함께 갈넴에 갔었노라.”
“역시…… 그러셨군요.”
피올렛 아주머니……. 아니, 알렌스 부인에 이어 두 번째이다.
갈넴에 파르메스 아슬렛과 함께 힘을 숨기고 있었던 이웃.
“그렇다면 아저씨와 피올렛 아주머니 말고도 또…… 다른 분들이 계신가요?”
갈넴은 일곱 가구였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 집, 하나는 짐머 아저씨…… 파르메스의 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사람들도.
쿵-
그가 바위에 손을 내려놓은 것뿐인데도 진동이 느껴졌다.
나 같은 꼬맹이는 퉁퉁 튀어 오를 것 같은 진동이 말이다.
“있어도 없는 것. 그들은 본좌와의 후계 전쟁에서 패할 것이니 오로지 이 파멜 거먼트만 있었노라 하게 될 것이다. 이어지지 않는 명성은 백지와도 같은 것!”
“아…….”
내 질문에 그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흥분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갈넴에서도 파넬 아저씨와의 대화는 썩 원활하지 않았다.
“아리넬.”
그가 중후한 쇳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본좌가 오늘 이 가면무도회를 찾은 것은, 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노라. 그리고 갈넴에서 너의 자질을 가장 분명하게 알아본 것은 이 파멜 거먼트뿐이었노라.”
“저…… 공작 전하.”
“거먼트에는 너처럼 자질 있는 재목이 없노니, 제국의 무궁한 평화와 번성을 위해 본좌는…….”
“죄송하지만, 저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먼 곳에서 다가오는 브리튼을 보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파넬 아저씨, 아니, 파멜 거먼트 공작과의 재회는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으나 오늘은 길게 이야기를 나누기는 적절치 않은 날이었다.
“아리넬에게는 무도회장이 가장 안전합니다. 무도회장 안에는 신원 확인을 마친 자만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스승님께서는 조용히 무도회장 밖에 매복한 불순한 무리들이 있는지 탐색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무도회장 내 귀족들의 신원 확인을 재차 끝내고, 다시 아리넬을 데리러 오겠습니다.”
브리튼이 나를 파멜에게 맡기고 들어가기 전에 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 브리튼이 무도회장 안 인원의 신원 확인을 끝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구나. 나의 후계자의 안전과, 불순한 놈들의 숙청을 위해서는.”
파멜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작은 한숨’이겠지만 진짜 작은 내가 느끼기엔 용트림만큼 큰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체구의 그가 내게 말했다.
“잘 들어가거라, 아리넬. 조만간 꼭 다시 보자꾸나.”
적들의 뼈를 부술 묵빛의 철편이 그의 곁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 * *
“파멜 거먼트 공작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브리튼의 말에 나는 볼에 살짝 바람을 넣고 대답했다.
“저한테 자꾸 군사부의 후계자라고 하세요.”
알렌스 부인과 재회했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갈넴 마을에서부터 나를 매우 자질 있는 아이로 평가한 듯했다.
“말도 안 돼요. 저는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다고요.”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브리튼이 내게 말했다.
“그분은 제 스승으로서도 검술을 가르쳐 주시기는 하지만, 군사부 재상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력이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직접 나가 적들을 때려잡는 일은 드무니까요.”
“…….”
“뭐, 역사적으로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군사부 재상이신 거먼트 공작께서는 다른 유형이신 듯싶지만요.”
그렇다면 군사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병력을 움직이는 두뇌입니다. 전투에서 어떻게 최선의 수를 쓸 수 있는지, 가장 적은 희생으로 어떻게 적의 허점을 공격할 수 있는지 치밀한 계산이 필요하죠.”
“그렇다면 저는 더더욱 아니겠네요. 그런 것과는 정말 거리가 멀거든요.”
“…….”
“사실 궁내부 재상이신 알렌스 부인도 제게 후계자가 되라고 제의하셨어요. 제게 예법과 사교계의 일에 자질이 있다면서.”
나는 내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전 이미 마체르트 공녀 쪽과 척진걸요. 그쪽 여자들은 저를 잘못 박힌 말뚝처럼 쳐다봐요.”
그런데 사교계의 일에 자질이 있어 보인다니, 그녀가 잘못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글쎄요……. 마체르트는, 잘한 일이십니다. 사교계의 중요한 자질은 적과 내 편을 분별하는 ‘감’이니, 오히려 부인의 야무진 모습에 알렌스 부인은 다시 한번 확신하셨을 겁니다.”
브리튼은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중해보이는 눈빛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크게 신뢰하는 것 같아 보였다.
브리튼이 싱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부인께서는 풍부한 자질이 있으십니다.”
“…….”
“그렇기에 모두가 부인을 욕심내고 있죠. 부인이 자신의 분야를 택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금수저 황태자 얼굴 천재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뭔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자질이라니…….
‘현대에서 나는 그저 평범하게 성장해 회사에 다니던 회사원1이었을 뿐인데…….’
이런 내가 그런 대단한 자질들이 있을 리가.
살짝 반박하려는 때,
“그래서 조금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부인에게 부족하지 않은 남편이 되어야 할 텐데.”
물을 마시던 것도 아닌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거칠게 기침이 나왔다.
마른 사레에 걸린 것이다.
콜록- 콜록-
남편이라니……. 갑자기 이런 공격은 반칙이잖아.
정작 그런 말을 한 브리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작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뒤편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니, 요리하며 뭔가 태웠나 봅니다.”
* * *
우리가 가면을 쓰고 다시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이런, 크래뮬 셔벗이 나가야 하는데 크래뮬이 전부 망가졌습니다…….”
“자일 소백작과 매튼 영애께서 창고에서 불장난을 하셨어요. 불은 꺼졌지만 타 버린 식품은 되돌릴 수 없어요.”
“이를 어쩌죠? 셔벗용 과일이 부족해요.”
문득 시종과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꽤 큰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자일 소백작과 매튼 영애라면…… 라리엘을 따라다니는 무리였던 것 같은데.’
“예비된 것이 없나요?”
“없습니다. 낭패네요.”
알브레온 초대 황제가 첫 무도회가 끝난 뒤 크래뮬 셔벗을 먹었다고 하여, 알브레온의 무도회 마지막에 귀족들은 관례적으로 그 셔벗을 찾는다.
그런데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니, 사고가 생겨 크래뮬을 더 구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황태자 전하.”
“부인……?”
나는 브리튼에게 대충 인사하고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가 보았다.
예상대로 이곳도 우왕좌왕 난리가 나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든 크래뮬을 구해 와야 해.”
“가면무도회를 망쳤다간 우리 목이 전부 떨어질 거라고!”
요리사들 중 몇몇은 겁에 질려 있기도 했다.
‘그깟 크래뮬 셔벗 좀 못 먹었다고 사람 목숨 걱정까지 해야 하는 황궁이라니…….’
내가 이들을 도와줘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목숨이 간당간당하다는데 두고 볼 수는 없지.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알렌스 부인을 중심으로 사교계의 화제가 된 디저트의 정체를 밝힐 좋은 타이밍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