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25)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26)화(25/173)
26
화
“…….”
한편, 라리엘 마체르트는 제게 셔벗을 권하는 시종을 노려보았다.
아까 주방으로 들어서던 아리넬의 뒷모습을 봤던 그녀였다.
그 애가 뭔가 망쳐 놓기를 바랐는데, 망쳐 놓기는커녕 또 이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드레스와 가면이 저 애의 것보다 훨씬 예쁜데 말이다.
“이런 싸구려 셔벗 따위는 너나 먹어!”
라리엘의 독기 어린 목소리에 시종의 손이 멈추었다.
키가 큰 갈색 머리의 잘생긴 시종은 시종답지 않게 유독 서늘한 인상이었다.
“말이…… 상당히 거슬리는군.”
라리엘은 나직한 목소리에 다시 천천히 얼굴을 돌려 시종을 보았다.
아버지를 따라 황궁에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었지만, 이런 얼굴의 시종은 본 적 없다.
무도회장에서 시중이나 들고 있으니 황족의 신임을 받는 시종도 아닐 터.
“뭐라고?”
시종은 자신의 말실수에 당황한 빛도 없이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뻔뻔한 태도에 라리엘의 입술 끝이 비틀리며 파르르 떨렸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분노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 너, 방금 나한테 말한 거야? 내 말이 거슬린다고?”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쏠렸다.
시종은 라리엘의 화난 목소리에도 태연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라리엘은 삿대질을 하며 시종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시종 따위가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리고 시종의 트레이에서 셔벗 잔을 홱 뺏어 들고는 그것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바닥에 홍사탕무 셔벗이 유리와 섞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의 눈썹이 꿈틀 움직이더니, 눈동자에 일순간 차가운 냉기가 차올랐다.
라리엘은 셔벗이 망가지자 시종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한낱 시종에게서 풍기는 이 으슬으슬한 기운은 뭐지?
휙-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마체르트 공작은 갑자기 느껴지는 싸늘한 살기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제 딸을 발견했다.
그 손가락을 따라간 그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라리엘? 감히 누가 우리 라리엘을!”
공작 부인도 그 장면을 보았는지 눈썹을 찌푸리며 그쪽으로 가려는 모습이 보였다.
마체르트 공작은 황급히 부인의 팔목을 꽉 잡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젠장할. 당신, 잘 들어. 당신은 오늘 라리엘에게 뭔가 잘못 먹인 거야. 알아들었어?”
“뭐……. 뭐라고요? 저기, 저 천한 시종이 지금.”
“명심해. 우리 가족 다 목 날아가기 싫으면.”
공작의 말에 공작 부인의 얼굴이 굳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마체르트 공작이 공녀의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선 라리엘은 아버지의 모습에 반가운 듯 사나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이죽거리며 시종에게 말했다.
“넌 이제 죽었어. 우리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하지만 라리엘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마체르트 공작이 손을 뻗어 대뜸 자신의 머리를 아래로 푹 눌렀기 때문이다.
성인이 힘을 실어 누르자 라리엘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윽, 아버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뒤에서 제 머리를 눌러 무릎을 꿇게 한 마체르트 공작은 시종에게 허리를 숙였다.
평민들이나 할 법한 자세였다.
라리엘은 아버지가 한낱 시종 따위에게 자신을 무릎 꿇게 하고 사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귀까지 빨갛게 변했다.
“…….”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몇몇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시종의 머리카락 색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끝부터 뿌리까지, 마법을 부린 듯 황홀한 은색으로 말이다.
시종의 흔하디흔한 갈색 눈동자도 점점 붉은 빛을 띠더니 선명한 루비색이 되었다.
“아버지! 대체 왜 시종 따위에게……. 헉!”
제 머리를 누르는 마체르트 공작의 손을 떨쳐 내고 신경질적으로 시종을 올려다본 라리엘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슬렛 황가의 상징인 은발. 그리고 심장을 조여들게 만드는, 싸늘한 기운의 저 붉은 눈.
언젠가 건국제에서 본 적 있던 알브레온의 주인, 위대한 황제 파르메스 아슬렛의 얼굴이었다.
“화…… 황제 폐하?”
순간, 눈이 핑- 돌았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상황은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되었다.
생존 본능이 작용한 것이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라리엘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시종인 줄 알았다. 시종이 저깟 맛없는 셔벗을 먹으라고 해서 짜증을 부렸을 뿐인데…….
마체르트 공작이 목에 핏발을 세우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에 아이가 상한 음식을 먹었다고 하더군요. 혼미한 정신으로 이곳에 내보내었더니, 이렇게 불경한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폐하.”
“호, 혼미요? ……으읍!”
마체르트 공작은 라리엘의 입을 막았다.
“황제 폐하, 다 제 잘못입니다. 오늘 가면무도회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시종이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공작 부인도 덜덜 떠는 목소리로 조아렸다.
황제에게 불경한 언행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파르메스가 얼마나 잔혹한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 * *
나는 살얼음판이 되어 가는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라리엘, 불쌍하게 되었구나.
시종에게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을 미리 말해 줘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뭐 자업자득이지.
“나를 욕하는 것은…….”
파르메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에 섞인 싸늘한 한기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용서할 수 있다.”
귀족들이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귀족들의 표정을 보니……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군기가 잡혀 있을 수는 없지 않나.
“폐하……. 제발 자비를…….”
마체르트 공녀의 생일 파티에서 본 공작 부인의 고고한 위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기세는 어디로 가고, 지금은 겁에 질린 얼굴로 파르메스에게 조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파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굴러 엉망이 되어 버린 셔벗 잔과 내용물로 향했다.
라리엘은 그것을 주워 담고 싶은 듯한 눈빛으로 떨고 있었다.
“홍사탕무 셔벗을 함부로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지.”
파르메스의 말에 귀족들이 모두 얼어 붙었다.
“……!!”
“그것도, 아리넬이 만든.”
파르메스의 다음 말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나에게 쏠렸다.
두려워 질린 와중에도 ‘과연 엄청나게 맛있긴 했었지’ 하는 듯한 눈빛.
그리고 파르메스조차 그 셔벗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에 대한 감탄.
‘……너무 주접 같잖아요!’
하지만 나의 내적 비명과는 다르게 파르메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래, 넌 감히 아리넬이 정성 들여 만든 셔벗을 저렇게 내팽개쳤어, 꼬마야.”
그 형형한 기운에 사람들은 오싹하다는 듯 제 팔을 움츠렸다.
‘아저씨, 그만해요. 사람들 다 체하겠잖아요. 찬 거 먹고 체하면 오래가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내가 끼어들기에 너무 무시무시했고, 파르메스는 아무래도 용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라리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드레스 자락을 쥐고 덜덜 떨고 있었다.
“폐, 폐하. 용서해 주십시오.”
“다 저희의 잘못입니다. 앞으로는 잘 교육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라리엘을 잘못 교육했다는 죄로 그들의 부모도 어찌할 바 모르고 조아리고 있었다.
그때, 파르메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라리엘을 바라보던 얼음 같은 시선과는 달리 나에게는 한없는 온기가 담긴 눈빛이 닿았다.
그가 장난스럽게 입 모양으로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