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28)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29)화(28/173)
29
화
* * *
해가 밝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나 연무장에서 검술 훈련을 한 브리튼은 하늘의 풍경이 환해진 후에야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 도착하자 아침부터 정무에 관한 보고서들을 읽고 있는 황제, 파르메스 아슬렛의 모습이 보였다.
아슬렛 황가의 상징, 은빛 머리카락과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차가운 분위기.
“폐하, 브리튼입니다.”
그는 브리튼이 온 것을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목소리가 들린 뒤에야 서류에서 눈을 떼었다.
파르메스의 붉은 눈에 피로함은 없었으나 그의 눈빛은 오늘따라 유독 건조해 보였다.
브리튼은 그에게서 흐르는 은은한 피 냄새를 알아차렸다.
제복의 깃에도 옅게 핏자국이 튀어 있었다.
간밤의 심문이 꽤나 길어졌던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황태자.”
파르메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간밤의 일은 정리되었느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제 브리튼이 보고할 차례였다.
심문을 받던 자들이 다 죽지 않았더라면, 브리튼의 보고는 심문의 참고 자료가 될 테니까 말이다.
“예, 황제 폐하. 지난밤의 일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거먼트 공작이 약식 보고했지만, 처음부터 그 상황 속에 있던 사람은 브리튼이었다.
“2황자의 잔당들은 연못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유력한 인사들이 밀회를 즐기기 위해 나오면 습격할 생각이었겠죠. 그들에게도 저의 등장은 반가운 수확이었을 것입니다.”
“아리넬을 노리지는 않은 건가?”
“눈치로 보아 아리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막기 위해 저와 함께 있는 아리넬을 함께 죽이려 했습니다.”
브리튼의 푸른 눈이 살기를 띠고 번뜩였다.
황태자와 함께 있었던 아리넬이 마일라 후작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이기는 했는데, 브리튼의 말로 진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 캐묻기 위해서 몇 놈을 기절시켰더라. 파르메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대기하고 있던 그들의 잔당들을 거먼트 공작이 모두 잡아들였다고는 하지만, 필시 그들이 들어오기 위해 도움을 주었던 내부의 첩자가 있을 것입니다. 연못의 깊이는 들쑥날쑥하여 그곳에 일정한 간격으로 잠복하려면 미리 지형을 알아야 합니다. 해당 장소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시종과 시녀들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좋은 지적이다.”
브리튼의 말대로 사전에 그들을 도왔던 자가 있을 테고,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지하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도회장의 바깥을 순회하던 거먼트 공작이 오기까지 아리넬과 시간을 벌었다고 했지.”
“…….”
“당시 검이 없었을 텐데, 저들은 무장하고 있었을 테고 말이야.”
브리튼은 잠시 파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속을 꿰뚫는 냉철하고 예리한 눈빛은 그의 앞에 서는 이들로 하여금 비밀을 숨기지 못하게끔 했다.
필시 어제 심문당하던 자들에게 답을 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브리튼에게 한 번 더 이 일에 대해 듣기를 원했다.
“저는 아리넬에게…… 목숨을 빚졌습니다.”
브리튼이 낮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푸른 눈이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어젯밤, 브리튼은 생전 처음으로 끔찍한 무력감을 맛보았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보다 두려웠던 것은, 아리넬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고, 가면무도회인지라 검을 소지하지 않았던 그릇된 판단은 적들의 위협을 목 아래까지 밀어 넣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순간, 아리넬이 정령술을 사용해 저들을 밀어 냈습니다.”
브리튼은 아리넬로 인해 위기의 상황에서 벗어났음을 파르메스에게 보고했다.
그 말을 듣는 파르메스의 붉은 눈동자가 놀란 듯 다소 격하게 흔들렸다.
‘아리넬이 정령의 힘을 각성한 건가! 그리고…….’
마일라가 자신을 수호했듯, 그의 딸인 아리넬이 다시 브리튼을 수호했다.
“…….”
브리튼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의 눈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을 배우면서도 확연한 목적을 가지지 못했다. 포식자 없는 연못에 사는 잉어처럼 무위험의 상황에 길들여진 것이다.
그런 브리튼에게 어제의 아찔한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동기를 주었다.
“제 무력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반성했습니다.”
주먹을 쥔 브리튼이 파르메스에게 말했다.
서늘한 파르메스의 눈은 브리튼을 책망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독려하고 있기도 했다.
“저는, 다시는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강해질 겁니다.”
브리튼이 푸른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 * *
“으차차!”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켠 나는 시장에 가기 위해 채비했다.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보다는 움직이기 편한 옷을 골라 입었다. 오늘은 많이 걸어야 할 테니 말이다.
‘알렌스 부인이 보면 내 패션 감각에 대해 뭐라고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지만.’
“준비 끝!”
이번에 애너스 백작가를 통해 구입한 밭에서 홍사탕무가 자라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싱싱한 홍사탕무를 구입해 재료로 써야 했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기 전에 시식 행사도 생각하고 있으니, 잔뜩 만들어 두어야지.’
가면무도회 이후 귀족들 사이에서 홍사탕무는 핫 트렌드로 떠올랐고, 몇몇은 내가 만들었던 셔벗을 재현해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 사업 개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알렌스 부인으로부터 들었다.
애덤은 내 곁에서 진행 사항에 대해 보고했다.
“꽤 많은 인력이 자원했습니다. 식품업에 종사했던 자들도 많아서, 경력자와 신입을 반씩 섞어서 뽑았습니다.”
“이번에 뽑은 사람들은 전부 가공 일을 할 사람들이죠?”
“예. 하지만 그들도 홍사탕무는 손질해 본 적 없으니, 아가씨께서 잘 알려 주십시오.”
“물론이죠!”
홍사탕무 손질 강의는 자신 있다. 갈넴에서도 이웃 주민 세 분에게 틈만 나면 해 줬었고, 이틀 전에는 황궁 가면무도회에서도 요리사들에게 시범을 보여 줬었다.
내 작고 야무진 손을 보며 수석 주방장이 눈을 엄청 빛냈었는데. 나중에 황궁을 방문하면 한번 들러 줄 수 없냐고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었지.
“탁월한 자질이 있으십니다!”
마차를 타고 후작가를 나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번화가 앞에 멈추어 섰다.
시장 골목에는 야채와 고기, 과자 등 다양한 물건을 좌판에 놓고 파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있었고, 가게 앞에서 저글링을 하면서 시선을 끄는 사람들도 보였다.
활기찬 시장의 모습에 나는 정말 시장 구경을 온 아이가 된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그럼 좋은 무를 골라 볼까요?”
“좋습니다, 아가씨.”
애덤이 기꺼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나는 보닛처럼 된 햇볕을 가리는 모자를 쓰고 시장을 돌며 가판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홍사탕무. 현대에도 비슷한 이름의 채소가 있는데 사실 현대의 그것과 이곳에서의 홍사탕무는 완전히 달랐다.
이곳의 홍사탕무는 과일에 가까웠고, 손질하지 않으면 떫은맛이 나지만 손질만 정교하게 하면 망고와 사과를 버무린 뒤 설탕을 잔뜩 뿌린 듯한 맛이 난다.
하지만 손질법을 모르는 이곳 사람들은 가치 없는 떫은 과일이라며 홍사탕무를 천대했고, 가판대에서도 팔지 않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여러 가게를 돌고 나서야 홍사탕무를 파는 가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가게는 시장 골목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었고, 심지어는 파리까지 날리고 있었다.
“얘야. 이걸 다 산다고?”
가게 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되물었다.
나는 해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축을 많이 키우나 보구나. 하지만 말에게 너무 많이 먹이면 배탈이 나니 조심하려무나.”
“아, 말이 먹을 게 아니라…….”
가판대에는 한 무더기의 홍사탕무가 있었는데 그걸 다 사 봤자 사과 한 바구니 정도의 가격이었다.
“사람이 먹을 거예요.”
내 반응에 가게 주인의 눈꼬리가 움찔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안타까운 빛을 눈에 띄고 나를 보기 시작했다.
“설마 너…… 홍사탕무를 먹는 거니?”
나는 별생각 없이 태연히 대답했다.
“네.”
그러자 조금 마른 편인 내 팔, 그리고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눈썹 끝을 세워서 애덤을 노려보았다.
“정말입니까? 이 아이의 말이…….”
애덤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애덤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굳힌 가게 주인은 손가락을 들어 애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아무리 쪼들려도 딸한테 이러면 안 되죠. 이런, 쯧쯧쯧.”
갑작스러운 반응에 나는 흠칫 놀랐다.
마치 그 눈빛은…… 천하의 나쁜 놈을 보는 듯했다.
“예, 예? 저요?”
졸지에 못된 애 아빠가 된 애덤은 조금 당황한 듯 손가락을 들어 저 스스로를 가리키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