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36)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37)화(36/173)
37
화
히이이익!!
스윽-
둔중한 몸체에 날카로운 끝을 가진 검이 돌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 무서워!!
어둠 속이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입술의 달싹임만은 선명하게 보인다.
“하이젠.”
그가 다시 아빠의 이름을 불렀다.
소설에서도 이랬다. 하이젠의 이름을 부르다가 갑자기 검을 들어서 살육을 시작했고, 종내에는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내가 내 손으로 폭군의 발작 버튼을 누르다니……!’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 아리넬이에요.”
그러나 파르메스는 멈추지 않았고, 검날이 끌리는 소리는 심장을 멎게 할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폐하?”
내 목소리의 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 나 이렇게 죽는 건가!
이윽고 그가 내 바로 앞에 다가왔을 때,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느껴진 것은 그의 잔혹한 검날이 아닌, 묵직한 손.
‘내 목, 잘 붙어 있는 거 맞지?’
나는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는 파르메스를 올려다보았다.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던 그의 표정이 제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
그 표정은 폭군 파르메스가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짙은 붉은색 눈동자에 물기가 가득 차서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처럼.
‘이건 소설의 전개와…… 다르잖아?’
그는 그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입술이 천천히 달싹인다.
“아리넬은…… 정말 하이젠의 딸이구나.”
마치 감격한 것과 같은, 다정한 목소리가 파르메스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는 대답하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잘생긴 얼굴이 이런 표정을 지으니, 천사가 눈물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
나는 한참 동안 파르메스를 마주 보다가 그에게 말했다.
“저희 아빠를…… 많이 소중히 생각하셨나 봐요.”
그러자 파르메스가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머리에 얹은 손을 내려 조금 오동통한 내 볼을 감쌌다.
“하이젠은…….”
파르메스는 내 눈동자 속 아빠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우리 아빠가, 파르메스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고?
아빠가 파르메스를 따르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것은 아는데,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의 관계여야 말이 되기는 한다. 원작에서 하이젠을 파르메스의 전 여친으로 의심했을 정도이니까.
“아리넬의 아빠는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었어. 나 때문에.”
목소리를 내는 파르메스의 눈망울이 일렁였다. 그때를 회상하는 것처럼.
“폐하…….”
엄마가 나를 낳기도 전에 아빠는 죽었다고 했다. 파르메스의 은인이라고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파르메스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아빠는 후회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고 말해 주는 폐하를 지키기 위해 한 일을요.”
그 말에 파르메스의 눈동자가 짙게 흔들렸다.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파르메스가 무릎을 살짝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붉고 짙은 눈동자가 더는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마워, 아리넬.”
파르메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에게 이런 위로를 받다니.”
나는 일렁이는 눈으로 파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잔혹하고 파괴적인 성격을 숨기고 짐머 아저씨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을 차가운 외양과 태도로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그가 파르메스이건 짐머 아저씨이건, 내게는 언제나 이런 다정한 모습일 테니까.
“…….”
나는 파르메스를 안아 주며 그의 단단한 등을 작은 손으로 토닥거렸다.
* * *
마차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비가 뚝 그쳤다.
“……아가씨.”
그리고 내 옷차림을 보고 2차로 놀라는 애덤의 얼굴.
“……아가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큰 파도가 밀려듭니다. 이건 분명…….”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감격하는 애덤을 지나치며 고개를 저었다.
“뒷북이에요. 이미 아빠를 그리워하는 분을 만나고 왔다고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정령사의 옷을 입으신 아가씨를 보니까 후작께서 살아 돌아오신 것처럼 감격이…….”
아빠를 따르는 기사였던 애덤의 눈에도 내가 아빠와 썩 닮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있잖아요,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정말 아가씨께서는 그분의 따님답게…….”
애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서 손뼉을 짝짝 쳤다.
그제야 애덤은 내 말에 집중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상황이 궁금해요.”
그 말을 듣자 애덤의 손이 흠칫 움직였다.
“아가씨…….”
그리고 애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어 들린 애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침울했다.
“저도 당시의 참사를 보지 못하고 들어서만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 갈넴으로 향하시던 때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습격이요?”
“아슬렛 황가의 황위 다툼은 전통적으로 치열했으니, 당시에 폐하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시던 1황자나 2황자 중 하나였겠죠. 어쩌면 3황자셨을지도요.”
파르메스 아슬렛은 4황자였고, 1황자, 2황자와는 어머니가 달랐다.
3황자는 어머니가 같았으나 동생인 파르메스를 배척하고 이복형들 편에 붙었다고 알고 있다.
“독뇌라고, 맞으면 금세 독이 올라 죽게 되는 지독한 화살이 있습니다. 갈넴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고 했어요. 그리고 폐하를 호위하던 엄청난 덩치의 기사가 그것을 전부 걷어 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덤은 눈썹을 굳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먼트 공작 전하시겠군요.”
그 커다란 철편을 휘두르며, 날아오는 화살은 전부 부수어 버리는 파넬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르자 수긍이 갔다.
“아무튼 위험한 상황이기에 마일라 후작께서 폐하를 모시고 뒤쪽으로 갔는데 함정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죠. 놈들 중 몇 놈이 우리 병사 사이에 첩자로 잠입해 있었던 겁니다.”
애덤의 눈빛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리고 폐하를 향해 달려드는 놈을 막으러 몸을 던지신 후작께서는…….”
“…….”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셨습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악몽 같았을 그때의 풍경이 상상이 갔다.
“……그랬군요.”
처음 후작가에 들어왔을 때, 아빠를 황제 폐하의 은인이라고 소개하던 애덤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아까 나를 바라보던 파르메스는 분명,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친구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었으리라.
“아빠를 만난 적 없지만, 아빠는 분명 엄청 좋은 분이셨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내 말에 애덤의 눈이 일렁였다.
그리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분이셨으니까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게 올바른 길을 가시는 분이었어요.”
애덤의 눈에는 죽은 아빠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아가씨는 그분과 많이 닮으셨습니다.”
* * *
감기 환자에게 좋은 밤비 나무 조각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브리튼은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작은 조각들을, 소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집어 올려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창문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하.”
황태자가 일어난 것을 감지한 기사가 들어와 한쪽 무릎을 숙였다.
브리튼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옷깃을 가다듬었다.
은사 같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눈매 속 푸른 눈동자, 높은 콧대와 미소가 어울리는 다정한 입술.
“쾌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오후의 일정은 전부 연무장에서 보낼 것이다. 거먼트 공작에게 전달하거라.”
“하지만 이제 막 회복하셨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소년은 그저 서늘한 눈빛으로 옷깃을 마저 정리하며 말했다.
“그 애의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다정함만으로는 부족해.”
아쉬워서 하나도 먹지 못한 사탕 병은 그의 협탁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마 밤비 조각들도 그 옆에 놓이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조금의 게으름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