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37)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38)화(37/173)
38
화
* * *
“저, 아내가…… 임신을 했습니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새벽, 잠들지 않고 먼 풍경을 바라보는 파르메스의 옆에 앉아 있던 하이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둑한 와중에도 그의 얼굴이 상당히 붉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르메스가 피식- 웃으며 하이젠을 보았다.
“축하하네, 하이젠.”
후작 하이젠 마체른 마일라의 아내는, 황제 직속의 근위 기사들 중 하나로 타국 출신이었으나 실력만으로 인정받고 있는 자였다.
“……자네와 헬레나는, 따로 짐을 챙기도록.”
그녀의 배 속에 든 아기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구를 닮았을까.
누굴 닮았어도 훌륭한 자질을 가졌을 것이다.
“수도로 돌아가 보았자 위험할 뿐이니, 인근 도시에 지낼 곳을 마련하도록 하겠다.”
갈넴은 산모가 기거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아니요, 대업에서 빼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아시잖습니까!”
하이젠은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와 그녀는, 전하의 곁에 머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쫓아내셔도 떠날 생각 없습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헬레나와 배 속의 아이 말입니다…….”
하이젠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귀가 빨개진 채로 머뭇대는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하이젠 마체른 마일라는 순진무구하면서도 놀랄 만큼 재능이 많고, 유약해 부러질 것 같으면서도 꿋꿋한 남자였다.
1황자와 2황자, 모두 대정령사인 하이젠을 원했지만 고난의 길을 자처해 자신의 곁을 지키는 충신이자, 가장 소중한 친구.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 속에서, 어쩌면 제가 만약 그것들을 피하지 못하고…….”
아직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산과 협곡을 몇 개는 지나가야 했다.
파르메스의 검에는 이미 많은 적들의 피가 묻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포기할 걸세.”
“……예? 전하?”
하이젠이 잘못 들은 것처럼 눈을 꿈뻑거렸다.
4황자 파르메스 아슬렛에게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포기일 테다.
“내가 원하던 세상, 혹은…….”
파르메스의 선명한 붉은 눈이 하이젠을 향하고 있었다.
“자네가 원하는 세상. 우리가 만들고자 하던 제국 전부를.”
“……전하!”
하이젠의 꼭 쥔 주먹이 흠칫 떨렸다.
그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파르메스는 입술을 비틀더니 상체를 약간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자네가 없는 세상의 황제가 된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포악한 폭군이 될 거야. 내 이름을 들으면 산천의 모든 초목이 벌벌 떨 만큼. 사람을 죽이고 죽여 산을 쌓을 것이고, 그 피로 제국의 밭을 적실 걸세.”
“……전하.”
“나는 본디 파멸의 별을 타고 태어났으니, 아슬렛, 알브레온,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파멸의 불길에 불타오르겠지. 그래, 유일하게 내 폭정을 막을 수 있는…….”
파르메스는 하이젠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그의 묵직한 손이 닿자 하이젠은 어깨를 움찔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 담긴 세상은 이미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자네가, 죽는다면 말이야.”
파르메스는 말을 끝내고, 싱긋,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는 결코 하이젠이 원하는 말을 해 줄 것 같지 않았다.
하이젠이 죽더라도 그의 부인과 배 속의 아이를 잘 돌봐 주겠다는.
대신 협박할 뿐이었다. 그가 죽으면 폭군이 되어 제국을 망하게 해 버리겠노라고.
“…….”
하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난 파르메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황자는 하이젠이 처음 그를 따르기로 한 날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쓸쓸한 미소가 하이젠의 입가에 고였다.
* * *
쿵- 쿵- 쿵
그의 발걸음에 맞춰 온 집 안이 흔들렸다.
군사부 재상의 등장에 긴장한 애덤이 어색하게 손을 올려 거먼트 공작을 향해 경례를 했다.
“애덤 로매드, 거먼트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자네가 아리넬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도다. 후작의 기사였을 때부터 자질 있는 청년이었지.”
거먼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쇳소리에 애덤의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알브레온 역사상 최강의 군사부 재상.
그의 거대한 몸과 살벌한 인상 자체가 극강의 최종 병기였다.
군복을 입어도 가려지지 않는 이두박근은 어지간한 단검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늘 들고 다니는 괴물 같은 묵직한 철편을 내려놓으며 엄중한 목소리로 애덤에게 경고했다.
“전쟁터로 따지자면 이곳은 가장 중요한 참모 기지! 눈이 달린 적들이라면 필시 이곳을 노릴 테니 자네의 책임이 막중하노라!”
애덤은 긴장한 와중에도 속으로 생각했다.
검이 오가고 탄약이 터지는 전쟁터……. 그리고 지휘관들이 치열하게 전쟁 전략을 세우는 참모 기지?
아니, 이곳은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리넬 아가씨가 기거하는 마일라 후작가일 뿐이다.
그러나 거먼트 공작은 이미 눈으로 사방의 벽을 둘러보며 집 안의 방비를 확인하고 있었다.
“튼튼하지 않은 저 창문은 이곳을 노리고 있을 무수한 암살자들이 드나들기 십상이다! 또 목재 가림막들은 화마의 공격에 취약할 터!”
‘무수한 암살자가 노릴 리가요. 아가씨가 그럴 만큼 누군가에게 원수질 일이…….’
애덤의 반박이 마음의 소리로 울렸지만, 그는 차마 입 밖으로 그것을 꺼내지 못했다.
“자네는 아리넬의 호위 기사로서 이러한 취약점을 두고 보았단 말인가! 본좌가 직접 이곳을 찾지 않았더라면 이 모래집 같은 기지가 얼마나 더 버텼겠는가!”
그는 그저 타이른 것이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애덤은 오금이 저려 왔다.
‘10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았지만, 아직 튼튼합니다. 공작 전하.’
그리고 역시 이 반박도 감히 애덤은 입 밖으로 내보내지 못했다.
거먼트 공작은 콧김을 내뿜으며, 아기 팔뚝만 한 손가락으로 자신이 지적했던 취약점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내 부하들을 보내 최강의 방비를 위한 강철 자재들을 보내 주도록 하겠노라.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한 치의 부족함도 없게 준비할지어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애덤은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어험, 그럼 이제 본좌를 아리넬에게로 안내하도록 하거라.”
고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튼튼한 마일라 저택에 대한 참견을 마친 거먼트 공작이 애덤에게 본론을 말했다.
애덤은 등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거먼트 공작에게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공작 전하. 사실은 아가씨께서 외출을 나가셔서…….”
“뭣이라!”
거먼트 공작이 내뿜는 입김에 애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아가씨……. 저는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자네는 아리넬을 호위하지 않았는가. 설마 아리넬을 적지에 혼자 보낸 것은…….”
“공작 전하, 아가씨께서는.”
애덤은 겨우 말을 끊었다. 거먼트 공작의 기세에 앞에서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온 기력이 빠지는 것 같았다.
“정령사 시험을 보러 가셨을 뿐입니다.”
애덤의 말에 거먼트 공작이 흠, 하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상시로 개최되는 정령사 시험은, 정령의 자질이 있는 자들을 선별하고 그들에게 등급에 따른 정령사 자격증을 배부한다.
꼭 정령사 자격증이 있어야만 정령술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 기관에 취업하거나 은행 대출을 받을 때 유용하게 쓰인다.
아리넬이 오늘 정령사 시험에 응시한 것은 당연하게도 그런 용도로 자격증을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부친이 정령사이고, 아리넬 또한 강력한 정령의 힘을 사용하였으니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 본좌로서는 오늘 아리넬은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거먼트 공작이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콧김을 내뿜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돌아가야겠도다.”
애덤으로서는 안도의 순간이었다.
* * *
아리넬 마일라-72번.
접수증을 꼬깃꼬깃 주머니에 넣은 나는 알브레온 정령사 협회 뒤에 위치한 인공 동굴 앞에 서 있었다.
여러 신규 정령사가 이곳에서 정령력을 측정받았고, 누군가는 신이 난 채, 누군가는 실망한 채 돌아갔다.
앞에 들어갔던 사람이 나오자 정령사 협회의 직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여신의 숨결’이 이상하네요. 힘의 강도는 측정이 되는데……. 오늘따라 응시자들이 가진 힘의 종류가 측정되지 않아요.”
“측정이 되지 않는다고요?”
“돌 표면에 물, 불, 바람, 땅, 넷 중 하나의 색이 뚜렷하게 나와야 하는데……. 마치 뭔가에 강력한 영향을 받은 것처럼 하얀빛만 뿜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