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ed as the Tyrant’s Daughter-in-law RAW novel - Chapter (82)
폭군의며느리로점찍혔습니다 (16)화(82/173)
16
화
“부인!”
선명하게 들리는 그 호칭은…… 설마.
“생각보다 일찍 나오셨군요.”
찬란하게 미소 짓는 미소년, 브리튼 아슬렛이 백작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사실 오늘 브리튼에게서 만나러 온다는 연락이 왔는데,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꼭 부인과…….”
생각을 흐려지게 만드는, 브리튼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나고 싶었거든요.”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게 된 나는 석양이 지는 거리를 브리튼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브리튼 아슬렛.
짐머 아저씨……. 그러니까 파르메스의 아들. 적응되지 않는 나의 약혼자이다.
“후작가의 일은 잘 정리되고 계십니까?”
“네. 애덤이 헌신적으로 나서주고 있어요. 은행 잔고와 수익 구조도 확인하고 복원했고, 새로운 수익 사업도 시작할 예정이에요. 그리고 마일라 대공가의 전서구도 기다리고 있어요. 눈 폭풍에 유실된 것은 아닌지 애덤이 걱정하기는 하지만요.”
마일라 대공가는 제국의 북부에 위치하는 마일라 공국의 주인으로, 제국의 소속이라고는 하나 일종의 자치구나 다름없었다.
그곳에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고, 엄청나게 큰 방벽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마일라 대공은 엄격하신 분이겠지만, 부인께서는 잘 해내실 겁니다.”
브리튼이 힘내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분은 심지가 굳건한 사람을 좋아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언젠가 마체르트 공녀로부터 알렌스 부인을 쟁취해 냈던 부인처럼요.”
이어지는 브리튼의 말에 나는 사레가 걸릴 뻔했다.
‘마체르트 공녀의 생일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거야?’
“에이! 쟁취라니요. 그냥……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그렇게 되었을 뿐이에요.”
괜시리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의연히 대답하는데, 싱긋 웃는 브리튼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브리튼이 내게 호의를 내보이는 것은 맞는데, 그 호의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더욱 수상했다.
‘어쩌면 이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몽실몽실한 호의가 맞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런데…… 마체르트 공녀는 전하와 친한 사이 아닌가요?”
“아……. 친분이 있는 사이이죠.”
내 물음에 브리튼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마체르트 공녀는 성격이 더럽기는 해도 예쁘고, 무엇보다 배경이 좋았다.
‘듣기로는 마체르트 공작가는 보석 광산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부인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답니다. 아주 많이요.”
한마디를 덧붙이며 브리튼은 생글거렸다.
“그러니 조신한 햇살 남……편을 선호하는 부인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리고 방금 뭘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거야?
햇살……? 그건 내 로판 남주 취향인데?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리는데, 멈춰 선 브리튼이 말했다.
“부인…….”
나는 걸음을 멈추어 그를 마주 보았다.
석양을 등진 소년의 푸른 눈이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꼭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눈빛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을 단념한 듯 브리튼은 바닥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인께 첫 정식 데이트 신청을 해도 될까요?”
“……네?”
“사실 그게, 오늘 부인을 찾은 용건이었거든요.”
노을 때문인지 조금 볼가가 붉은 듯한 브리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 황위 일 주년을 기념한 불꽃놀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꼭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거구나.’
“…….”
“……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광장이라는 말에, 마스와의 하루가 곧바로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갈넴 마을에서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냈었다.
내일 열리는 유리 꽃 축제……. 도시의 축제들은 화려하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꼭 가 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불꽃놀이를 같이 보고 싶은 친구가 있어서요.”
황태자의 제안을 이런 식으로 거절하는 것이 예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먹을 꾹 쥔 내 말에 브리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황태자 전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그 친구와 약속한 게 있거든요. 하하, 그 애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브리튼의 푸른 눈의 표면에 내가 맺혀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소년이 입을 열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네요. 부인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조하는 듯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슬퍼 보이기도, 복잡해 보이기도, 그러면서도 웃음이 섞여 애잔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브리튼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황태자 전하. 하지만 그날이 아닌 다른 날이라면…….”
해가 넘어가며 그림자가 더욱 길어졌다.
나는 브리튼에게 옅게 미소 지었다.
“하루쯤 같이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아요.”
‘속을 잘 모를 뿐이지 브리튼도 나쁜 애는 아닌 것 같고…….’
마냥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엔 브리튼이 거절할 확률도 크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제안한 날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고 하고, 다른 날로 약속을 미루는 내 제안 자체가 자존심 상할 수도 있으니까.
“좋습니다, 부인.”
하지만 브리튼은 옅게 미소 지으며 내 제안에 화답했다.
“부인의 두 번째라도 좋아요.”
* * *
가정 교습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알렌스 부인에게 해러스티아 약환을 주었더니 펄쩍 뛰며 기뻐했다.
갈넴에서도 어깨나 등이 아프다던 그녀에게 내가 종종 빻아 주었던 약초였다.
직접 캔 것이 아니라, 애덤을 시켜 시장에서 사 온 약초여서 효능은 장담치 못하지만 복용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내가 사교계의 꽃이 될 소질을 가졌다고 좋아하시지만…… 온종일 학춤을 추며 걸어 다니고 싶지는 않다고.”
물론 이런 말을 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알렌스 부인의 말대로 학춤에 꽤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꼬맹이다운 좁은 보폭이지만 내가 너무 잘 따라와서 다음에는 진도를 훅 넘어가겠다고 했지’
“후우…….”
사교계의 꽃, 후작가의 재건과 사업, 그리고 브리튼의 약혼자.
‘나 잘 해내고 있는 거겠지?’
마일라의 후계자로서 내 영향력이 커지게 되면, 대기근으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나를 지킬 수 있을까?
생각에 빠져 있는데, 창밖에서 툭툭-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훌쩍 열린 창문.
나는 반가운 손님에 손을 들어 인사했다.
“마스!”
그리고 침대에서 폴짝 내려와 마스의 앞에 섰다.
검은 로브와 흰 가면, 소중한 내 친구였다.
가면 속, 마스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
나는 마스를 보며 아까 브리튼 황태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불꽃놀이 데이트를 거절한 이유.
“마스, 아머스 아저씨가 그랬는데 도시에는 불꽃놀이가 있대. 불꽃놀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어느 날, 마스와 나란히 앉아 반딧불이를 보던 나는 불꽃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난 사실 아리넬로 태어나기 전에 다른 곳에서 살았는데, 내가 살던 곳에서는 축제 때마다 불꽃놀이를 했어. 하늘에 불꽃이 퍼지면 알록달록한데…… 항상 설렜거든. 그런데 뭐야, 그 사기꾼 보는 듯한 눈빛은? 나 정말 본 적 있다고!”
흥미롭지 않은 듯 일어서는 마스의 뒤에서, 나는 말했었다.
“언젠가 도시에 가면, 꼭 같이 보자.”
“있잖아. 내일 저녁.”
그 순간, 마스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괜찮으면 저녁에 우리 불꽃놀이 보러 갈까?”
“…….”
오자마자 다음 약속 신청을 들은 마스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어서 대답할 뻔도 한데, 마치 발에 못이 박힌 듯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일 분쯤 지났을까, 마스가 몇 발짝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멈추어서…….
“……?”
고개를 숙여 이마를 내 어깨에 툭 기댄다.
고민이라도 있었던 건지 묵직한 소년의 머리가 느껴졌다.
이거…… 긍정의 대답 맞겠지?
‘그런데 뭐야, 방금 눈빛은……?’
안도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나는 내게 기댄 마스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데리러 와. 기다리고 있을게.”
* * *
자신의 화려한 방에 들어와 가면을 벗은 브리튼은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의 입꼬리가 옅게 올라간 채로, 푸른 눈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괜찮으면 저녁에 우리 불꽃놀이 보러 갈까?”
아리넬의 수줍은 목소리가 뇌리에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꽃놀이를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아리넬의 말에 눈썹을 찡그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아리넬은 금방 친구를 만드는 스타일이고, 제가 보지 않은 사이 다른 친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이야, 아리넬.’
가지런히 놓인 사탕 병을 바라보는 브리튼의 미소에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
달콤한 색과 향의 사탕들은 아리넬과 꼭 닮아 있었다.
‘내가 너의 첫 번째인 누군가를 끝장내지 않아도 되어서.’
창밖에서 독수리가 푸드덕대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산새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얼핏 일렁거리는 눈동자에는 서늘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파르메스 아슬렛과 매우 닮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숨기고 다정한 황태자 브리튼으로서 다가간 이유.
“이상형? 모름지기 로판 남주는 조신다정햇살남이 최고지. 항상 여주를 향해 따뜻하게 말하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주고, 조신한 성격으로 다른 여자한테는 철벽을 세우고…….”
‘난 네가 원하는 유일한 남자로 자랄 거야.’
이내 그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도 어느덧 푸르게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