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usiness RAW novel - Chapter 22
CHAPTER 22. 신의 뜻
하나, 둘. 가신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자코브는 계속해서 달렸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치욕스러움에 이를 악물었다. 그가 언제 이렇게 쫓겨 본 적이 있던가?
그는 언제나 쫓는 쪽이었다. 왕좌도, 비앙카도…. 얻기 위해 달려드는 쪽이었던 그가 일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패배자가 되어 도망치기만 하고 있으니 그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코브를 앞질러 온 아르노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자코브가 바로 말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그쪽 또한 이미 가로막혀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자코브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큿!”
“도망은 이제 끝났습니다, 왕자님.”
병사들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자카리의 삼익 중 하나인 소뵈르였다.
평민 출신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용도 없는 자. 토너먼트에서도 별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자코브가 저런 놈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줄이야. 굴욕적이기 그지없었다.
자코브는 도망칠 구석을 찾아 눈을 굴렸지만, 아르노군은 그를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다.
소뵈르는 넉살 좋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왕자님께서 전쟁에 몇 번 나가 본 적 있으시다고는 하지만, 저는 반평생 전쟁터를 전전했습니다. 도망치는 군사를 쫓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왕자님이라 하여 그다지 창의적으로 달아나시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어차피 왕가의 혈통. 네가 여기서 날 잡아간다 하여도 아르노 백작은 날 놓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내 이 수모를 잊지 않을 것이다. 반면 날 놓아준다면, 내 나중에 크게 사례하마. 작위와 영토를 주겠어.”
자코브는 되레 뻣뻣이 고개를 치켜들며 허세 어린 협박을 건넸다. 뻔뻔한 그의 낯과 달리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자코브 또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먹힐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자코브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글쎄요…. 저는 평민 출신이라 그런지, 머리가 좀 나빠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소뵈르는 평소와 같은 경박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비아냥대는 것이 노골적일 정도라서 자코브는 잇새를 악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뵈르는 방심하지 않은 채 바로 병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주인이 쏘아 올린 화살에 맞은 토끼를 제대로 물어 가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 아니겠는가. 토끼로 가장한 독사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매가 발톱으로 움켜쥔 먹이를 놓지 않듯이, 소뵈르는 자코브를 철저히 사로잡았다.
* * *
자코브가 끌려온 곳은 아르노 성의 한가운데 있는 널찍한 공터 위에 세워진 단상이었다. 갑옷이 벗겨진 채 밧줄로 꽁꽁 묶인 그는 누가 보아도 포로의 꼴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왕족으로서, 이런 곳에 굴하지 않으리라는 기개. 하지만 병사 둘이 강제로 꿇어앉히니, 어찌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헝클어진 황금빛 머리칼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듯 흘러내렸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푸르른 눈동자가 반짝이는 호수의 조약돌처럼 빛났다. 전쟁을 하며 고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미모였지만, 아르노 영지의 영지민들에게는 그저 염치 모르고 명예를 모르는 왕자일 뿐이었다.
몰려든 영지민들은 다들 수군수군 욕설을 뇌까리며 자코브를 손가락질했다. 성난 군중 속에서, 자코브는 구경거리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더니, 돌연 누군가가 자코브에게 돌을 던졌다. 돌은 자코브의 머리에 맞고, 그의 금발에 선연한 붉은 피가 흘렀다. 누군가가 물꼬를 튼 뒤는 쉬웠다. 다들 하나, 둘,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자코브에게 던졌다.
자코브는 그 와중에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이었다. 되레 너무 조용하니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은 술렁이며, 저도 모르게 자코브를 향해 휘두르려던 돌을 조용히 내렸다.
그러던 와중, 웅성거리며 군중이 갈라졌다. 등장한 것은 바로 자카리와 비앙카였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에스코트하며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추종자가 여신을 숭배하는 것 같았다.
자코브 앞에 비앙카와 자카리가 섰다. 그제야 자코브의 눈에 감정이 서렸다. 자코브는 굴욕과 갈망,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비앙카와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아냥거리듯 이죽였다.
“너희는 날 죽일 수 없어. 세브랑 왕가에 한 충성 맹세를 잊은 건 아니겠지?”
“가신의 성에 칼을 들이민 왕에게 충성을 지킬 가신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카리가 차갑게 되물었다. 지금껏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 존대를 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존대는 없었다.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는 불씨가 잠들어 있는 숯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자네가 왕족이라 귀족의 영지 내에서 처벌 불가능함은 나 또한 익히 알고 있고, 내 사랑스러운 아내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네.”
갑자기 비앙카의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자코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카리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설마 그대가 영지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가 승리의 이 순간을 위해 아무런 대책도 세워 두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카리는 비앙카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듯 거들먹거리며, 전서를 펼쳐 들었다. 오델리 왕녀가 보낸 전서였다.
자카리의 옆에서 비앙카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녀의 전령이 언제쯤 오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자카리가 귀환하는 길에 마주쳤을 줄이야. 시기를 맞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카리가 목소리를 높여 전서의 내용을 읽었다.
“자코브 드 세브랑. 왕자로서의 명예를 잊고 유부녀인 아르노 백작 부인을 취하기 위해 아르노 영지를 침략한 죄, 성인인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죄.”
자코브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 정도로는 아직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낯이었다. 하지만 전서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위 후계자이자 형이었던 고티에 왕자를 암살한 죄, 그리고 조카인 알베르 왕세손의 암살을 사주한 죄.”
영지민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고티에 왕자의 죽음은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것이 바로 자코브의 사주였다니….
한낱 귀족 집안의 후계 문제도 왕왕 칼부림이 나곤 했다. 왕위 다툼 또한 치열하니 자코브가 그런 수를 쓴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자신들의 왕가에 그런 암투가 있었다 하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카리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라곤과 협력하여 세브랑의 주요 정보를 팔고 그들의 침략을 도운 죄.”
고티에의 암살이 들켰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자코브의 얼굴이 그제야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람 빠지는 듯한 쇳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카리가 받은 오델리 왕녀의 전서에는 자코브가 지금껏 저지른 일에 대한 증거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오델리 왕녀는 비앙카의 전서를 받기가 무섭게 자코브의 숙소를 비롯하여 세브랑 성 내를 탈탈 털었다.
그녀는 자코브가 알베르 왕세손을 암살하려 세워 둔 암살자를 발견하여 증언을 받아내었으며, 기어코 아라곤과의 협력 관계에 대한 밀서까지도 발견해냈다. 비앙카가 구체적으로 자코브의 행적에 대해 알려준 덕분에 찾는 범위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증거로 들이밀며 왕을 설득했다.
자코브의 친족 살해에 왕 또한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고티에의 죽음 이후로 쇠약해진 왕은 자리에 드러누운 뒤 도통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아들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적당히 유배를 보내는 정도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라곤과 협력은 친족 살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다. 왕은 결국 자코브를 왕적에서 박탈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등의 이유로 인하여, 빅토르 드 세브랑의 대리인, 오델리 드 세브랑이 해당 죄인의 죄를 인정하고, 그에게서 왕족의 지위를 박탈하겠노라.”
“말도 안 돼! 그건 날조된 서류다…!”
자코브가 바락 외쳤다. 전서 속 내용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기 충분했다.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면 자코브는 그저 귀족, 아니, 영지와 작위가 없으니 일반 기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아르노 영지를 침략한 것 또한 귀족법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영지가 있고 보석금을 준비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당 영지와 협상을 하는 것이 관례이나, 상황에 따라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기도 했다. 하물며 자코브는 영지가 없으니, 그의 처분은 온전히 자카리와 비앙카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왕의 직인이 찍혀져 있소. 당신이야말로 왕을 의심함으로써 왕의 명예를 능멸하는 것이오?”
“오델리가 왕의 대리인이라고? 그 계집애가?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자코브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해당 전서가 그의 아버지이자 세브랑의 왕인 빅토르 드 세브랑이 아닌, 그의 누이 오델리에 의해 작성된 것이 그러했다.
자코브의 얼굴이 좌절로 무너져 내렸다. 고작 그런 계집애 때문에, 내가….
자카리는 물끄러미 자코브를 바라보았다. 마치 벌레의 찌르륵 소리에 누가 신경이라도 쓰겠느냐는 듯한 건조한 눈빛. 자코브의 주장을 의미 없는, 쓸모없는 저항일 뿐이라 치부해 넘기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자코브가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오델리가 대리인이라는 건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왕이 허락하였으며, 혈통상으로도 적법했다.
더군다나 오델리를 반대할 만한 2왕자파의 귀족들 모두가 이번 전쟁에 나왔다. 그 덕에 큰 소란 없이 오델리는 대리자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자코브의 덕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자코브의 실책은 바로, 오델리를 우습게 본 것이었다.
어린 알베르에게는 암살자를 붙였으면서, 오델리에 대해 견제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리도 쉽게 성을 비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저 여자라고, 왕의 돈으로 사치만을 즐기는 철없는 왕녀라고 생각한 것이 그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자코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찰나, 비앙카가 나서며 말했다.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왕자. 아니, 자코브.”
“비앙카.”
자코브의 얼굴에 돌연 화색이 돌았다. 아까 전 절망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는 비앙카를 향해 사르르 눈을 휘어 웃었다.
비앙카의 뒤에 서 있던 자카리의 몸이 뻣뻣이 굳으며 표정에 여유가 싹 사라졌다.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노골적인 불쾌감. 자카리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비앙카를 제 뒤에 숨길 듯 움찔거렸다.
비앙카는 두 남자의 신경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는 무표정으로 자코브를 비난했다.
“당신은 형제를 죽인 패륜에, 나라마저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닙니까?”
“그대는 왜 그렇게 나에게 매정한가? 나는 그대에게 많은 걸 줄 수 있었어. 아르노 백작이 주는 것보다 더한 명예, 사치, 권력! 그리고 사랑까지도.”
자코브의 외침에 영지민들이 수군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비앙카에게 치근대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자코브는 단단히 돌아 있었다.
비앙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질색했다. 그녀의 연록빛 눈동자가 경멸로 물들었다.
“당신은 여전히 오만하군요. 제가 그걸 원한 적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저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제시하는 화대가 아닙니까?”
“그게 아니야. 나는….”
“당신이 라호즈 성의 정원에서 저에게 치근댔을 때.”
화대라는 말에 당황한 자코브가 변명하려 했으나 비앙카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자코브의 말을 딱 잘라 낸 비앙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때 다짐한 게 있어요.”
“비앙카.”
“기필코 당신만큼은 죽여 버리겠다고.”
“믿어줘. 난 그대를 사랑해.”
비앙카의 적개심에도 자코브는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사랑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코브의 푸르른 눈동자는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 표면처럼 빛났다. 영지를 침략한 자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가슴 설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콤한 시선이었다.
“당신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이지요. 그것은 저에게 필요 없는 사랑이로군요.”
하지만 비앙카에게는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정말 끔찍한 사내다. 이미 비앙카의 마음은 단단히 굳은 암석과도 같았다.
“잘 가요, 자코브.”
“비앙카! 비앙카!!”
비앙카가 그리 말하며 뒤돌아섰다. 자코브는 비앙카의 등에 대고 거듭해서 그녀를 부르짖었지만, 비앙카가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멀어져 가는 비앙카의 등은 자코브에게 더 이상의 분노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냉정했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에스코트해서 단상을 내려왔다. 그들이 물러서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자코브의 목을 잡아 눌렀다.
자코브가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며 저항했지만, 온몸을 단단히 감은 밧줄과 내리누르는 병사들의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상에서 내려간 비앙카가 영지민들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아르노에서는 영지를 침략하고 성인을 위협한 매국노 자코브에게 참수형을 내린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본디라면 자카리가 자코브의 처우에 대해 전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번은 예외였다.
전쟁을 끝낸 것이 자카리이기는 하지만, 비앙카가 버텨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승리였다. 실질적으로 따지면 비앙카가 칼자루를 잡는 것이 맞았다.
영지민들 또한 비앙카가 자카리를 대신하여 앞에 나선 것을 일말의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이제 비앙카는 믿고 따라야 할 마님이었다.
함성 속에서, 가스파르가 도끼를 잡은 채 나섰다.
본디라면 사형 집행자가 도끼를 잡았겠지만, 그래도 한때 왕자였던 것을 참작하여 기사인 가스파르가 대신 나섰다.
가스파르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한쪽 팔이 아직 낫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다. 로베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대신할까?”
“아니.”
가스파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겐, 아직 남은 숙원이 있었다. 가스파르의 굵은 손이 단단히 도끼를 잡았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비앙카는 자연스레 그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참수라는 것이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더군다나 비앙카는 임신 중이 아니던가. 혹여나 하는 걱정에 자카리가 우려의 기색을 내비쳤다.
“보지 마시오.”
“볼 거예요.”
하지만 비앙카는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자코브를 바라보았다.
자코브와 비앙카의 눈이 마주쳤다. 자코브는 꿇려진 채 참수대에 목을 내놓고 있는 상태에서도 비앙카를 응시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비앙카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코브의 죽음을 자카리에게 간청했을 당시에는 비앙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자카리의 보호 속의, 새장 속 작은 새가 아니었다.
그녀는 케케묵은 원한을 씹어뱉듯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최후를, 똑똑히. 그래야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앙카의 오기 어린 중얼거림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만류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강경한 눈빛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준비가 끝나고, 시간이 되었다. 비앙카가 손을 들었다. 그에 따라 가스파르의 도끼가 하늘 위로 번쩍 치켜 들렸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도끼의 시퍼런 날이 유난히도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코브는 눈을 부릅뜨고 비앙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비앙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눈에 담으려는 듯. 하지만 그의 눈에 담긴 비앙카는 싸늘할 뿐이었다.
자코브는 억울했다. 세상은 너무나 그에게 불공평했다. 신도 너무하시지. 그가 갖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눈에 띄게 하지도 마시지….
자코브는 손에 쥐지 못한 왕관보다도, 비앙카를 자카리의 곁에 두고 가는 것이 아쉬웠다. 그것은 이미 손에 넣지 못할 것에 대한 집착을 넘어섰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자코브는 자신이 다른 것 이상으로, 상상 이상으로 비앙카를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으로만 외치던 사랑 타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자각하였다 하여 달라질 것은 없었다. 지금은 이미 늦었고, 과거로 돌아간다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자코브는 강요하고, 기어코 손에 넣어야 하는 사랑밖에 몰랐다. 사랑을 어찌 표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신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이라는 비앙카의 말에 자코브 또한 동의했다.
그의 사랑은 비앙카에게 닿지 못하고, 결국 비앙카는 한 번도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자코브의 가슴에 썰물이 빠져나가듯, 기묘한 상실감만이 남았다.
자코브의 입술이 기이하게 올라갔다. 자코브는 무어라고 입을 뻐끔거리며 비앙카에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영지민들의 함성 소리에 가려, 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마지막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던 비앙카만이 자코브의 입술을 읽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주저 없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치켜든 손을 내렸고, 그에 따라 가스파르의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 쉬이이익!
뎅강. 몇 번 더 내려쳐야 할 줄 알았건만, 자코브의 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떨어져 나갔다. 지금껏 끈질기게 그들을 괴롭혀 왔던 이의 죽음이라기엔 너무나도 허무했다.
비앙카는 단상을 올라, 자코브의 시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꿈에 이어, 현실까지도.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이가 드디어 사라졌다.
자코브의 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푸슛, 푸슛 뿜어져 나왔다. 비앙카는 그의 몸에서 떨어진 곳으로 굴러간 자코브의 목을 향해 발을 옮겼다.
비앙카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자코브의 금발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구두와 치맛단, 손과 소매가 피로 얼룩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비앙카는 손을 높이 들며 외쳤다.
“역적, 자코브 드 세브랑의 목을 베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지금껏 비앙카와 함께 영지를 지켜 온 영지민들이 모두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목이 갈라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지금 이 순간의 승리에 고취되어 소리를 높였다.
비앙카는 별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함성 속에서 고개를 치켜든 채 눈을 감았다.
드디어.
비앙카의 뒤로 자카리가 다가왔다. 그는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비앙카는 자연스레 그에게 의지했다. 그의 따듯한 품이, 내리쬐는 봄 햇살의 부드러움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불안은 끝났다. 이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속 편하게 그 순간을 즐기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그런.
그녀의 남편, 자카리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인생이.
* * *
자코브의 죽음을 알게 된 아라곤은 바로 군을 물렸다. 세브랑에서도 그들의 뒤를 쫓을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변경에 좀 더 단단히 방어를 세우는 정도로 전쟁을 중단했고, 세세한 종전 협상은 자코브의 장례 후 진행하기로 했다.
자코브의 시신은 라호즈로 보내졌다. 왕은 고통스러운 신음 끝에 혼절했고, 오델리는 차갑고 푸르른 시선으로 제 이복 오라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자코브의 장례는 비밀리에, 무척 단출하게 치러졌다. 그저 단 한 사람, 왕의 마음을 위로할 뿐인, 그런 장례였다.
자코브의 장례 이후, 왕은 급격하게 쇠약해졌다. 왕은 마지막 남은 기력을 긁어모아 자카리를 불러들였다.
어떻게 보면 자카리는 그의 마지막 남은 아들의 목숨을 앗아 간 자였다. 왕이 그를 원망해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혹시 이번에 백작님을 불러서 처리하려 하시는 건….”
“설마요. 자코브의 죄가 그렇게 큰데….”
“하지만 그런 놈이라도 아들 아닙니까.”
아르노가의 가신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비앙카 또한 바로 찾아온 위험에 쉽게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미래를 그린 것이 바로 몇 주 전인데….
자카리는 그들을 위로하듯, 별거 아니라며 가볍게 대꾸했다.
“왕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지. 걱정 마라. 아직 수도에는 블랑쉐포르 백작 또한 머물러 계시지 않던가. 여차하면 백작께서 날 도와주실 것이다.”
“하지만.”
“그리고 나는 내 아내가 성인으로 선택되면서까지 신이 지키려 한 자가 아니던가. 왕께서도 교황청과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으실 것이다.”
실제로, 현재 세브랑은 자코브가 저질러 둔 일들로 인해 국격이 급격히 약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대들보인 자카리를 암살한다는 건, 왕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이 자카리를 죽이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십 가지도 더 열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카리를 죽여야만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가 너무나도 강력했다. 가신들과 비앙카는 계속해서 자카리를 만류했다.
자카리는 그저 고지식하고 책임감이 강했을 뿐, 충성스러운 신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십여 년간 그는 왕을 모셔 왔고, 왕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이 있었다. 왕이 비록 우유부단한 면모가 있다고는 하나, 왕으로서 그렇게 무책임한 자는 아니었다.
간신히 가신들을 설득한 자카리는 바로 수도로 향했다.
수도에 도착한 그가 안내된 곳은 바로 왕의 침실이었다. 왕은 침대에 누워 거동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왕의 주름진 얼굴 위에는 검버섯이 부쩍 늘어 있었다. 그의 퀴퀴해진 얼굴 위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 한때의 잘생겼던 외모는 세월과 함께 비쩍 말라 있었다. 왕은 몇 번이고 기침을 하느라 말 한 마디 제대로 잇지 못했다.
왕은 한참 만에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내가 그대를 불러들인 것은, 내 죽기 전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네.”
“아직 정정하십니다. 그런 약한 말씀은 마십시오.”
“아니야. 나이가 들면 가야 할 때가 얼추 짐작 가는 법이네.”
무뚝뚝한 자카리의 위로에도 왕은 냉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푸른 눈은 이제 하얗게 흐려져 제대로 초점조차 맞추지 못했다.
“내, 그대 덕에 세브랑을 무탈히 지킬 수 있었네. 아라곤의 침략과 자코브의 반란까지…. 공을 많이 쌓았으니, 응당 그를 치하해야지.”
“전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상입니다.”
“아니야.”
왕이 주름진 손을 뻗어 자카리의 팔을 와락 움켜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에는 힘이 없었지만, 필사적이었다. 왕은 초조한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에겐 시간이 없네, 아르노 백작. 나는 그저 말장난을 하기 위해 그대를 부른 것이 아니야.”
왕은 어떻게든 자카리에게 상을 쥐여 줄 기세였다. 왕의 상태가 안 좋은 만큼, 그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던 자카리는 가만히 왕의 말을 들었다.
왕은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힘겹게 자카리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왕국을 지배하는,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카리가 처음 왕을 만났을 때는 왕이 한창 정정했었다. 커다란 목소리. 화통한 태도. 자신감에 차 있던 큼직한 몸짓….
그때와 지금의 노쇠한 모습이 자연스레 비교되어, 자카리의 가슴이 술렁이듯 파도쳤다.
하지만 겉으로 그런 심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자카리는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모습으로 왕의 말을 기다렸다.
“내 그대에게 공작 위를 수여할 걸세.”
“네?”
무덤덤함을 가장하였다 하나, 왕의 발언은 청천벽력이었다. 뜬금없는 왕의 제안에 깜짝 놀란 자카리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공작 위라니.
보통 공작 위를 받는 이는 직계 왕족이거나, 개국 공신에 한했다. 세브랑의 개국 공신 가문은 전부 이전 시대에 숙청당했고, 남아 있는 공작들은 전부 왕가의 직계 가족뿐이었다.
그리고 현 왕이 아들이 둘, 딸이 셋인 것이 예외일 정도로 세브랑의 왕실은 손이 귀한 편이었다. 덕분에 세브랑에 남은 공작은 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유명무실한 편인지라 중앙 정치에는 잘 참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이번 자코브의 음모에 그들이 개입하지 않은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자카리는 경우가 달랐다. 그는 왕족과 결혼한 것도 아니었고, 영웅이라 불릴지언정 개국 공신은 아니었다.
반면 지금 아라곤을 물리친 일로 인해 제일 인기가 많았다. 세브랑의 몰락을 막아내었다며 모두가 그를 치켜세웠고, 현존하는 기사 중 자카리에 대적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미 명예와 무력을 전부 갖춘 자카리가 더 높은 신분까지 얻게 된다? 그것은 늑대에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격이었다.
한마디로 자격은 안 되는데, 막상 공작이 되고 나면 제일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자카리가 조금이라도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그대로 세브랑을 집어삼킬 정도로.
자카리 또한 공작이라는 작위가 부담스러웠다. 그는 작위를 고사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전하, 물러주십시오. 저는 아직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내 아무리 자식 놈 보는 눈조차 없다고는 하지만, 그대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네.”
왕은 자카리의 말을 잘랐다. 왕은 이미 마음을 단단히 다진 듯 단호했다.
“나는 우유부단했고, 아비로서 그럴듯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어. 그래서 결국 아들 둘을 잃었지. 하지만 남은 자식들까지 잃을 수는 없어.”
왕의 안색 어딘가가 불안해 보였다. 몇 달 사이에 아들 둘을 잃었을뿐더러, 그것이 왕위 다툼으로 인한 것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자카리의 팔을 쥐고 있던 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왕은 자카리에게 중대한 결심을 고백하듯, 크게 숨을 들이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는 오델리를 왕위에 올릴 생각이야.”
자카리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오델리가 왕이 되는 것도, 왕이 그 사실을 그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도.
남들이 보기엔 전심전력으로 나라를 지키며 항상 전쟁과 함께하는 자카리만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었다. 그러나 왕은 자카리가 그렇게까지 세브랑 왕가에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카리 또한 알았다.
그러니만큼 그를 따로 불러 이런 중대 사항을 전하는 것이 얼떨떨했다. 그의 공작 위와 오델리의 왕위, 그것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애를 알아. 그 애는 결혼도, 자식에게도 관심이 없어. 그렇다 하여 그 애가 수도원에 가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아. 그 다른 누가 왕이 되더라도, 그 아이는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 거야….”
왕의 목소리가 먹먹히 잦아들었다. 본디 정통성을 따지자면, 차기 왕은 고티에 왕자의 아들인 알베르 왕세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알베르 왕세손은 이제 막 열 살이 되었고, 그 결혼 상대는 카스티야의 공주다.
알베르의 어머니인 1왕자비는 성격이 유순하고 심약하기에, 섭정이 된다 하여도 주도권을 제대로 쥐지 못한 채 카스티야에 끌려갈 것이 우려되었다.
알베르가 왕위에 오르는 건, 스스로 카스티야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델리는 아무도 챙겨 주는 이 없이 이리저리 치이게 될 게 분명했다. 남편이, 아버지가 없는 여자의 삶이란 으레 그런 것이니까…. 오델리가 권력을, 힘을 쥐지 않으면….
오델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다들 오델리가 사치스럽고 예쁘기만 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녀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왕은 알고 있었다.
오델리라면 세브랑을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 적어도 고티에나 자코브보다는 훨씬, 더.
하지만 마냥 오델리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하여 불안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뜬금없는 여왕의 등장에 귀족들은 모두 반발할 것이다. 오델리에겐 방패가 필요했다.
“그대는 공작이 되어, 다음 대 여왕의 측근으로서, 내 딸의 신변을 보호해주게. 백작으로는 안 돼. 딸아이에겐 좀 더 강력한 지원이 필요해.”
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약해졌기에 충동적으로 생긴 변덕이 아니었다. 왕의 생각이 그렇게까지 확고하다는 사실에 자카리는 한참을 침묵하다 되물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자네는 아직 젊으니 오래 버틸 수 있고, 주변 귀족들을 충분히 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며, 그렇다 하여 권력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설령 그대가 왕위를 욕심낸다 하여도 그대의 장인인 블랑쉐포르 백작이 그 꼴을 가만 보지는 않을 걸세.”
자카리가 공작 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줄줄 말한 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오델리에게 별 관심이 없지. 그 아이에겐 그런 이가 필요해.”
자카리는 침묵했다. 세브랑의 난다 긴다 하는 결혼 적령기 남자 귀족들 대부분은 오델리에게 구애해 본 전적이 있었다. 왕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이것이 최선이라고는 하나, 왕위는 마냥 사치스럽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부인을 똑 빼어 닮은 첫째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아이에게 이런 가시밭길을 넘겨주는 것이 마음 아팠다.
현 왕비의 소생인 두 왕녀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델리를 왕위에 올리면 그녀들까지도 자연스레 오델리가 챙겨 줄 테니, 상대적으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오델리에게 많은 책임을 떠넘기게 된 왕은 씁쓸히 웃었다.
“이건 내가 해야 해. 오델리가 막 왕이 되고 나서는, 자네를 공작 위에 올리고 싶어도 반대에 부딪혀 올리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늙어서 자식을 잃고 미친 왕의 고집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테지.”
왕은 자카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살 거죽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그는 자카리의 단단하고 강인한 손등을 꽉 쥐었다.
“이건 내 마지막 임무야. 알겠나? 난 어떻게든 자네를 공작 위에 올릴 것이고, 그대에겐 거부권이 없네….”
한평생을 남에게 명령만 내리며 살아온 왕이었지만, 죽은 뒤의 일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기필코 그리하겠다는 듯 강경했지만, 그의 희뿌연 눈동자는 처절할 정도로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 또한 숙연해졌다.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늙은 왕을 모욕 주는 것이었다. 결심한 자카리는 진중하게 왕을 바라보며, 처음 기사 서약을 했을 때처럼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꼭, 차기 왕을 전심전력으로 지키겠나이다.”
자카리의 결연한 맹세를 들은 왕이 활짝 웃었다. 주름진 입꼬리 가득 배어 있는 안도감. 이제 세상에 남은 미련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 같은 미소였다.
* * *
그렇게 자카리가 공작이 되고, 왕녀는 왕위 후계자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생각지도 못한 일에 오델리는 얼떨떨해했다.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 계승을 위한 준비를 부랴부랴 마쳐야 했기에, 오델리는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오델리를 차기 왕으로 세울 거라는 말에 신료들은 반발했다. 왕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마땅한 후계가 없는 것은 그들 또한 동의했다.
알베르를 지지하는 귀족이 강경하게 밀고 나가야 했는데, 그것이 블랑쉐포르가인 만큼 마땅한 협력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귀족들은 오델리를 받아들였다. 대신 노선을 바꾸어, 미혼인 귀족 자제를 오델리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 대공이 되어 오델리를 꼭두각시 삼아 세브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내들의 속셈에 휘둘릴 오델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알베르를 양자 삼아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리고 알베르의 어머니인 1왕자비 또한 여전히 성에 머물게 하여, 알베르를 교육하고 오델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할 내궁의 일을 맡겼다.
그에 반발하는 이는 아직 왕위에 머물러 있는 왕이 강제로 억제시켰고, 이제 공작이 된 자카리 또한 오델리의 편을 들어주었다.
자카리가 공작 위를 서임 받은 것은 아주 속전속결이었다. 왕이 공작 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서임식의 날짜를 잡았고, 자카리 또한 부랴부랴 아르노 영지로 전령을 보냈다.
자카리가 공작 위에 서임된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그의 세 부장이 라호즈로 날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한가득 넘쳐흘렀다.
비앙카 또한 자카리의 서임식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임신 때문에 요양해야 하는지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신 사랑이 가득 담긴 서신으로 자카리를 축복했다.
그리고 오델리의 왕위 계승 또한 기쁜 일이었다. 비앙카는 친구로서, 그리고 자코브의 일로 인한 동맹자로서 오델리를 축하하는 서신을 함께 동봉했다.
그 서신을 건네주기 위해, 자카리가 오델리를 찾아갔다. 일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한숨 내돌리고 있던 오델리가 자카리를 반겼다.
자카리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든 오델리는 한참 동안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서신을 정독한 그녀는 서신이 구겨지지 않게 도로 잘 접었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손끝이 양피지 끝을 슬슬 매만졌다.
침묵하던 오델리가 넌지시 운을 떼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라호즈에 오래 머물려니 좌불안석이겠군. 자네도 이제 영지로 돌아가야지, 아르노 공작.”
“예. 안 그래도 며칠 뒤 떠날 계획입니다.”
“내가 임신에 좋은 것들을 좀 챙겼으니, 공작 부인에게 전해 주도록 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오델리의 앞에 서 있던 자카리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예전 고티에를 대할 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중한 태도였다.
오델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서신을 무릎 위에 내려 두었다. 서신은 고작 종이가 겹쳐 있을 뿐이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울 수가 없었다. 오델리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부왕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나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혈통뿐이고, 그 혈통마저 이을 생각이 없거늘.”
“저하께는 혈통마저 있으신 것이겠지요. 전하의 결정에는 저 또한 동의합니다. 저하께서는 능히 성군이 되실 수 있습니다.”
자카리가 대꾸했다. 자카리의 말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그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자카리와 오델리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믿음과 신뢰로 가득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이 대면하여 말이라도 섞어 본 것은 왕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있고 나서부터였으니까.
자카리의 신뢰가 의아했던 오델리는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건 공작의 생각인가?”
“아뇨. 제 아내의 생각입니다.”
자카리는 무표정으로, 천연덕스레 답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빤한 눈동자가 진심이라는 걸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여름에 내리는 서리를 모아 오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었다.
비앙카가 오델리를 믿었기에, 아버지인 블랑쉐포르 백작이 아닌 그녀에게 자코브의 약점을 잡아 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델리는 기대대로 비앙카의 부탁을 완벽하게 들어주었다.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보낸 서신에는 오델리라면 성군이 될 것이라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자카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게 당연했다.
“그래…. 비앙카, 그녀의 믿음이라면.”
오델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하늘이 그녀의 눈을 말갛게 메웠다. 오델리는 전쟁 중 그녀에게 날아왔던 비앙카의 서신을 떠올렸다.
그것이 오델리를 이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코브는 숙청당하지 않았을 테고, 어쩌면 살아남은 그가 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세브랑을 장악한 그는 오델리를 쫓아냈겠지.
아니면 고티에 오라버니처럼 죽였을 수도 있고.
더 최악은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물건처럼 팔려 가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오델리 그녀는….
오델리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더불어 그녀를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매번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는 비앙카에게 감사하며, 오델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창에서 시선을 뗀 채 자카리를 돌아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 * *
공작이 된 자카리는 가신들과 함께 위풍당당히 영지로 돌아왔다. 아르노 백작령은 공작령이 되었고, 좀 더 넓은 땅과 광산을 하사받았다. 이제 전쟁을 나가지 않아도, 비앙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 줄 수 있게 되었다.
뿐만이랴. 명실상부 세브랑의 최고 권력자가 된 자카리에게 축하와 뇌물이 쏟아졌다.
2왕자 파에 섰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카리가 아라곤과 맞설 당시 지원 나오지 않은 이들 또한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혹여나 자카리에게 보복이라도 당할까, 그들은 더욱 납작 엎드려서 어떻게 해서라도 자카리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자카리가 안되면 비앙카에게라도.
영지로 온갖 사치품이 쏟아져 들어온 덕에, 신이 난 건 비앙카였다. 간만에 의욕이 넘쳤던 그녀는 로비에 궤짝을 일렬로 늘어놓고 그 사이를 거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비앙카와 달리, 자카리는 비앙카의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발을 굴렀다. 자카리에겐 공작 위도, 주변의 칭송도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전부 비앙카에게 쏠려 있었다.
비앙카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자카리는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앙카의 안색에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비치면 당장 그녀를 침실로 돌려보낼 생각이었건만, 비앙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신이 난 상태였다.
궤짝 속에 있는 커다란 흑진주에 정신이 팔린 비앙카가 슬쩍 허리를 기울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화들짝 놀라며 덥석 비앙카의 팔을 잡았다.
“비앙카, 조심하시오.”
“괜찮아요. 몸이 휘청인 것도 아니고, 그저 진주가 궁금했을 뿐인걸요.”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허리 숙여 궤짝 안의 진주함을 꺼냈다. 그는 비앙카의 앞으로 들이밀며 간청했다.
“관심이 가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꺼내 보여주리다. 아니. 차라리 그대는 앉아 있는 것이 어떻소? 궤짝을 하나하나 그대 앞에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소.”
“아주 안 움직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운동하는 쪽이 낫다 그랬어요. 안 그래도 정원 산책은 밖이라 위험하다 한 게 누군데요. 이런 식으로라도 움직여야지요. 몸도 튼튼해지고, 마음도 평안해지고.”
자카리가 안절부절못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느긋하게 코앞의 진주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자카리의 우려를 비앙카가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자,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틀리지는 않았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비앙카를 아주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뱅상과 이본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자카리가 저렇게 팔불출처럼 행동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물론 그런 자카리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 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뱅상 또한 몇 날 며칠간 밤을 새 가며 비앙카의 건강을 진단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병약한 비앙카가 임신한 상태로 전쟁을 치렀으니 걱정이 안 되는 쪽이 이상하리라.
실제 비앙카는 용케 유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유산하지 않은 것은 비앙카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생명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배 속에 있는 것이 아들이라면 희대의 기사가 될 거라 다들 입을 모았다.
그래도 자카리는 해도 너무했다. 이본느가 혀를 내두르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마님 말씀이 맞아요, 공작님. 넘어지면 큰일 난다지만 조금은 움직여 주셔야 한다고요. 하지만 마님도 그렇게 허리를 숙이시면 안 돼요. 마님이 마르신 덕에 배가 덜 나와서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시는 것뿐이지, 충분히 조심하셔야 하는 시기라고요.”
“알았다, 알았어. 아주 기가 살아서 큰소리를 치는구나. 네가 결혼하고 임신했을 때 두고 보자.”
비앙카가 웃으며 농을 건넸다. 비앙카가 이본느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을 계기로, 그들은 그냥 시녀와 마님이라고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부쩍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본느는 엄살을 떨며 대꾸했다.
“아이고. 마님이 으름장 놓은 걸 잊어버리시게, 아이는 최대한 늦게 갖는 쪽으로 계획을 잡아 봐야겠네요.”
“가스파르가 나에게 달려올지도 모르겠군.”
비앙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재 아르노 영지는 자카리의 공작 서임과 비앙카의 임신과 더불어 이본느와 가스파르의 결혼식까지, 겹경사로 소란스러웠다.
원래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민들레가 피기 시작할 때쯤 결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어수선해진 영지를 재건하는 것을 비롯한 많은 일들로 인해 시기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비앙카가 해산을 한 뒤에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다며 비앙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여름은 어떠하느냐 제안하니, 비앙카는 봄의 신부가 행복해진다는 속설을 들어 봄이 지나기 전에 결혼하도록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민들레가 질 때쯤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최대한 당길 수 있는 만큼 당긴 시기였다.
곧 있으면 결혼하게 되는 새 신부였지만, 단지 결혼식 준비가 추가되었을 뿐 비앙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본느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본느 본인이 그러길 원했다. 자신이 비앙카에게 소홀한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비앙카의 임신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비앙카 본인이 심드렁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실제로, 누구보다도 후계자를 원했던 이가 비앙카 아니었던가?
최근의 비앙카는 어딘지 모르게 초탈해 보였다. 성인이 되었다 하여 신실하고 경견한 신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비앙카는 방금 전만 하더라도 흑진주를 보며 활짝 웃지 않았던가. 성인다운 금욕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모습에 이본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싱숭생숭하신 것이겠지. 전쟁을 통해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고….
비앙카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어차피 비앙카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주변 이들 모두가 그녀의 임신에 목을 매고 있으니까.
당시 아르노 영지를 지키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비앙카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 남편인 자카리는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인 귀스타브 또한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간 조아생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두가 펄쩍 뛸 정도로 놀라 하며 기뻐했다. 블랑쉐포르 백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일평생 한 번도 흘린 적 없던 눈물을 줄줄 흘려냈으며, 오델리는 왕위를 잇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카리를 통해 임신에 좋은 귀한 약재와 액운을 막아준다는 보석을 보냈다.
니콜라는 미래의 영주님이 누울 요람을 조각하는 데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어찌나 화려한지, 아이의 요람이 아니라 왕의 왕좌 같아 보일 정도로 웅장했다.
카트린은 아르노 영지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녀는 손수 수를 놓은 겉싸개를 선물하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비앙카의 실력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아니에요, 카트린. 정말 예뻐요. 색도 화사하고….”
“서둘러 수를 놓느라 잘 보면 엉성할 거예요. 너무 자세히 보지 마세요.”
“아녜요. 제가 온종일 수를 놓아도 이것보단 못할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비앙카는 감탄하며 천을 매만졌다. 자수로 문양이 안 들어간 곳이 없는 것이, 품이 많이 들어 보였다. 게다가 들어간 색실이 어림잡아 봐도 다섯 개 이상이다.
감격한 비앙카가 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카트린의 얼굴이 붉은 머리색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카트린은 손끝을 꾸물꾸물 얽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덕담을 건넸다.
“분명 비앙카를 닮은, 예쁜 아기가 태어날 거예요.”
“남편을 닮을 수도 있어요.”
“공작님을 닮는 쪽도 좋을 것 같아요. 부러워라. 저도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기는 하는데….”
카트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카트린은 비앙카보다 결혼 연차는 부족해도, 합방 시기는 훨씬 이른 편이었다. 하물며 한 번도 피임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애가 들어섰어도 진즉 들어서야 했지만 하늘은 야속했다.
“남편은 후계자가 급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지만…. 후계자의 문제가 아닌 걸요. 저는 그냥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일 뿐인데….”
“곧 생길 거예요, 카트린. 당신은 좋은 엄마가 될 테고, 준비된 자에겐 언제나 하늘에서 답을 내려주시죠.”
“고마워요, 비앙카.”
진심 어린 비앙카의 위로에 카트린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껏 마땅히 친한 사람 없어 여기저기 겉돌던 카트린으로서는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리고 그것은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비앙카는 시기, 질투, 경멸 등에 더 친숙했다. 그래서 그녀는 귀를 닫고 오히려 더 거만히 굴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나에게는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는 듯이.
그랬던 만큼, 이렇게 순수하게 축복 받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평화로운 일상의 행복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는 그제야 카트린에게 말해줘야지,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비앙카는 경험자로서,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은 괜찮다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굴지만 막상 카트린이 임신하게 되면 다보빌 백작은 분명 당신을 업고 다니려고 할 거예요.”
“네? 설마요.”
카트린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의 둥그런 눈에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뚝뚝 흘렀다. 비앙카는 그런 카트린을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카트린이 임신하면, 다보빌 백작 또한 자카리 못지않을 거라 비앙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심히 과하리라는 것도.
* * *
전쟁의 여파로 들썩들썩한 것은 비단 세브랑과 아르노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청 또한 성기사단의 승전을 기념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뿐만이랴. 지금껏 급박한 상황에 미뤄 두었던 프란시스 대주교의 추기경 서품이 이루어졌다.
프란시스의 서품식 이후, 추기경 회의가 이루어졌다. 추기경들은 모두 프란시스를 축복하는 덕담을 건넸다.
“하하하. 이제야 한시름 덜었군요.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조금만 더 늦게 성인의 존재를 알아채기라도 했다면….”
“그러게요. 프란시스 대주교, 아니. 이제 추기경이지요. 프란시스 추기경께서 큰일을 해주셨습니다.”
무의식처럼 내뱉은 대주교라는 호칭에서는 고의가 묻어났다.
모든 이들이 프란시스에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중 대표적인 이가 바로 마르소를 시켜 자카리를 지원하도록 한 마르소의 아버지, 요한 추기경이었다.
마르소를 시켜서 자카리를 지원한 것까지는 좋았다. 성기사단보다도 먼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프란시스가 성인을 발견한 공로가 있다면, 요한은 신의 뜻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울 생각이었다. 바로 아들인 마르소를 이용하여!
그러나 이야기를 듣자 하니 마르소가 세운 공은 자카리의 목숨을 구했다 하기엔 조금 부족했다. 그렇다 하여 자카리의 적인 2왕자 자코브를 없애는 데 그리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았다. 계략을 짠 것이 마르소라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명분이 부족하다면, 당사자의 입에서 들으면 그만이다.
교황이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 싸움이었다. 성인이 그가 보낸 마르소 덕에 신의 뜻을 지킬 수 있었다는 한마디만 해주면, 그는 크나큰 힘을 얻게 된다.
그러니 마르소가 자카리의 측근이 되어, 그에게 인정받아야 할 텐데….
하지만 마르소의 태도가 영 뜨뜻미지근했다. 자카리에게 달려가기는커녕, 자카리가 공작이 되기가 무섭게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다며 다보빌 영지에서 두문불출하는 것이 아닌가? 이럴 때일수록 더더욱 자카리의 옆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어쩌면 같은 백작이던 이가 하룻밤 사이에 공작이 되고 차기 왕의 협력자가 되었으니, 저도 사내라고 질투가 나는 게 분명하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못난 놈.
요한의 이름을 넌지시 언급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믿었던 마르소의 배신에 요한의 몸이 달았다.
프란시스가 추기경이 된 것은 이제 막이오, 아직 교황께서는 정정하시니 여유가 있다. 요한은 스스로를 타이르려 노력했지만, 저도 모르게 불쑥 뛰쳐나가는 뾰족한 말 한마디까지 삼킬 수는 없었다.
프란시스는 세브랑의 사교계 곁에서 십여 년을 버텨 온 이였다. 그가 요한의 덕담 속에 숨겨진 견제 어린 비꼼을 읽지 못할 리 없었다. 프란시스는 요한 추기경의 불퉁한 심정을 긁듯, 일부러 더욱 겸손하게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그게 어찌 제 덕인가요. 결국은 성기사단이 아르노 공작을 잘 보필해 준 덕분 아닙니까.”
짧은 시간, 두 사람은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른 추기경들의 덕담에 신경전은 금방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공작으로 서임되었다고 했나요. 일개 기사에서 공작이라…. 건국 시기를 제외하고는 어느 나라에서든 전무후무한 일 아닙니까.”
“그쯤 되는 인재이니 신께서도 살리고자 성인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이야기 주제는 프란시스에서 자카리로 넘어갔다. 안 그래도 성전을 끝내고 돌아온 성기사 앙리 경이 자카리의 칭찬을 입이 마르지 않도록 해댔다.
뛰어난 기사요, 아내 생각이 지극하고, 수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며…. 나중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잔다는, 별것 아닌 사소한 생활 습관마저 칭찬할 정도였다. 덕분에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게 많았다.
추기경들은 제가 들은 자카리의 무용담을 하나씩 늘어놓으며, 역시 신이 계시를 내릴 만큼 신경 쓰는 영웅이 틀림없다 입을 모았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얼마나 이뤄졌을까. 계속해서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한 추기경이 조심스레 화두를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전쟁은 끝났고, 이제 공작의 목숨은 안전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 누가 그에게 적대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아직도 신에게서 답이 오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하기 그지없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종식되며 불안함에 잠식되었다. 다들 수군수군 속삭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의 계시를 받아 불행한 미래를 보고 온 성인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어찌 보면 성인 스스로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신이 바라는 미래가 이루어지는 것이 전제 조건이었다.
그렇기에 신께서는 자신이 바라는 미래를 이룬 성인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하여, 신의 뜻이 실현되면 기적을 일으켜 성인을 축복했다.
하늘에 보랏빛 커튼과 같은 구름이 너울거리거나, 봄에 꽃이 피기도 했으며, 밤하늘이 한낮처럼 번쩍이기도 하는 등 사료에 남은 기적의 기록들은 여러 가지였다. 확실한 것은, 신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뜻을 피력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추기경들은 다들 목을 빼고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초조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성인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습니까? 무슨 징조를 발견하셨다든가….”
“딱히 없었습니다만….”
프란시스의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이 잘 풀렸다는 생각에 기뻐하느라 신의 계시가 이루어지고 난 뒤의 기적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추기경들은 서로 추측한 바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르노 공작에게 저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신변의 위협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공작이 되었다 하여 전쟁에 출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실 테니, 항상 신변의 위협은 있겠습니다만….”
“아니, 그러면 그때마다 매번 성기사단을 출전시켜야 합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 하여 세브랑에 아르노 공작을 출전시키지 말라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게 성인을 교황청으로 모셔 왔었어야죠. 성인을 교황청에서 직접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이미 출가한 분을 어떻게 교황청으로 모시고 온단 말입니까?”
프란시스가 말이 되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성인으로 발현되는 대상이나 시기가 제각각인 만큼, 성인이라 하여 반드시 교단에 적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건국 설화 또한 그런 예였다.
카스티야의 초대왕은 어부 무리의 족장이었는데, 다른 부족과의 다툼으로 심란하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산책을 하던 찰나 우연히 흰 조가비를 얻게 된다.
그 흰 조가비 안에는 다른 조가비 다섯 개가 들어 있었는데, 때마침 그와 마찰을 빚던 부족 또한 다섯 개의 부족이었다.
그를 통해 마음을 다잡은 그가 다른 부족을 통합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카스티야의 건국 설화였다.
하지만 그에는 뒷이야기가 있다. 바로 카스티야의 초대 왕이 마음을 다잡게 해준 흰 조가비를 만든 것이, 그의 어린 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바로 성인 이한나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사명이었다. 그리고 이한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의 뜻을 달성했다.
카스티야 왕국이 세워진 날, 파도에 하루 종일 물고기와 조개가 실려 왔다. 풍요로워진 먹거리에 카스티야 백성들을 기뻐했다. 그것이 바로 신이 화답해 준 기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한나가 성인으로 발현되고 바로 교단에 소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카스티야 왕국은 과연 건국되었을까?
신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성인이 교단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교단에서는 그저 성인을 자유롭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것이 신의 뜻을 받드는 길이었다.
비앙카의 신분이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교단에 귀의하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앙카가 그걸 원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의 답에 다른 추기경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다른 각도로 상황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르노 공작의 생존이 신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닐까요? 아르노 공작이 무언가 달성해야 하는 위업이 있다거나….”
“그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때, 지금까지 추기경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교황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제님들. 성인은 어디까지나 공작 부인, 비앙카입니다. 아르노 공작이 아닙니다.”
핵심을 짚어 내는 교황의 말에 추기경들은 그제야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맞다. 신께서 미래를 바꿀 의지를 건넨 것은 자카리가 아니라 비앙카였다. 자카리의 강한 존재감에 매몰되어 다른 쪽으로는 생각도 못 했다.
신이 바라는 미래. 비앙카가 바라는 미래. 그것이 정말로 자카리가 죽지 않는 미래가 맞을까? 비앙카가 착각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신께서 바라시는 바가 자카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성인께 남은 과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황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추기경 회의실의 천장에 그려진 성화 속 신이 그들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교황은 다시 추기경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결정을 내린 듯, 그의 눈은 견고하게 빛났다.
“일단 성인께 계시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도록 합시다. 작은 기적이라 전쟁에 묻혀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넘어가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추기경들을 모두 옳은 선택이라 입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성인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선택지가 몇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제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덤덤한 낯으로 충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그리고 아르노 영지에 대주교급의 인사를 파견하지요. 이번 일도 어찌 보면 그분과 긴밀한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분이 바로 교황청으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책이 필요해요.”
“대주교 말입니까? 하지만 대주교는….”
추기경의 희비가 교차했다. 추기경들에게 있어 교구는 일종의 땅따먹기였다. 모두 자신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주교령이 하나 더 생긴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추기경들로서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상황이 마냥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비기득권인 추기경들에게는 이번이 기회일 것이다. 게다가 성인을 전담하게 되니, 다른 대주교구와는 그 이득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교황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추기경들의 혼란 속에서,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대꾸했다.
“이제 아르노 영지도 공작령 아닙니까. 대주교가 파견되기엔 충분한 조건입니다. 게다가 성인께서 머무시는 영지이니까요.”
“만약 아르노 공작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영지에 교황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인과 관련된 일인 만큼, 아르노 공작도 저희의 제안을 마냥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쪽에서도 공작가의 체면을 생각하여 어느 정도 조율을 해야겠지요.”
교황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추기경들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어떻게든 아르노 영지에 가는 대주교는 자신의 세력이어야 했다. 추기경들의 눈이 빛났다.
아직 신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 뜻에 도움이 될 기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사람을 천거할 수 있을까. 추기경들은 모두 머리를 굴렸다. 꿍꿍이로 가득 들어찬 머릿속은 성직자라기엔 지나치게 간교하였으나, 인자한 미소만큼은 성인이 따로 없었다.
교황은 그런 추기경들의 의욕을 보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 * *
비앙카가 태교를 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와중, 교황청으로부터 서신이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프란시스가 추기경이 되었다 했지. 평범한 안부 인사인 줄 알았던 비앙카는 여상스레 서신을 잡아 들었다.
하지만 편지를 봉인한 인장은 교황의 직인이었다. 화들짝 놀란 비앙카가 인장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교황의 인장은 그대로였다.
비앙카는 조심스레 서신을 펼쳤다. 서신의 내용에 집중하는 비앙카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곁에 앉았다. 비앙카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서신을 핑계 삼아 뱅상 대신 찾아온 참이었다. 비앙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자카리는 넌지시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소?”
“아르노 영지를 대주교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에요. 대주교를 파견한대요. 딱히 공물의 양이 달라지지도 않고, 영지에 간섭도 없는….”
“그렇다면야 쌍수 들고 환영이지.”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주교구이면서 공물의 책임은 없다는 건, 아르노 영지에 있어서 무척이나 이득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서신이 뚫어질 정도로 그녀의 시선은 한데 못 박혀 있었으며, 서신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카리는 서신의 내용이 비단 대주교구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교황이 도대체 무어라 했기에….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물었다.
“단지 그뿐인 표정이 아닌데, 비앙카. 그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소?”
“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당신이 살았으니, 혹시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이 없냐고.”
비앙카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는 몹시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기적 같은 것은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전쟁에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 정도가 기적이랄까….
자코브를 죽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며 자카리는 살았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카리 또한 상황을 이해했다. 그의 낯 또한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기적은 없었지 않소.”
“네. 없었어요. 딱히, 아무것도….”
“그렇다면, 아직 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오?”
“어떻게 하죠?”
비앙카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임신한 뒤 억지로라도 챙겨 먹게 된 덕분에 혈색 있게 올라온 뺨이 차게 식었다. 비앙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전전긍긍했다.
“만약, 당신에게 또 목숨의 위협이 생기는 거라면….”
비앙카의 머릿속에 온갖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다. 태교를 하기 위해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지만, 갑자기 왕에게 불려 갔을 때도 그렇고,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또다시 아라곤이 침략하는 걸까요? 아니면 내전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닐까요?”
“비앙카. 비앙카. 진정하시오.”
자카리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앙카의 곁으로 다가갔다. 비앙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비앙카의 어깨와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럴 리가. 걱정 마시오.”
“하지만….”
“내 그대가 아이를 낳기까지 영지를 한 발짝도 나서지 않겠소.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서임식을 비롯하여 급한 일은 대충 다 처리되었으니, 다른 자잘한 일들은 부장들을 보내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변경의 침략 문제가 문제긴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라곤에서도 손해가 막심할 테고 그들과 내통한 자코브도 죽었다. 아라곤에서도 근 시일 내 선뜻 다시 군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설령 그가 참여해야만 하는 큰일이 벌어진다 해도 영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비앙카만 두고 영지를 떠났다가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영지가 침략당하고, 임신한 비앙카가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번 전쟁으로 가슴 철렁한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자카리는 단호한 어조로 비앙카를 설득했다.
“성인의 의무니 신의 계시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잊고 있으시오. 만약 지금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대 또한 큰일 나오. 나에겐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소.”
어떻게 다시 품에 안게 된 아내인데. 마음고생으로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위로였다.
“곧 있으면 이본느의 결혼식 아니오. 경사롭고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응?”
“…좋아요. 약속 지켜야 해요.”
“나만 믿으시오. 나, 자카리 드 아르노. 한번 입에 올린 말은 꼭 지키는 사내 아니오.”
“그게 뭐예요.”
답지 않게 목소리 높여 호언장담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구나 싶었다. 비앙카는 피식, 작게 웃었다.
자카리와 이야기하며 흥분도 많이 가라앉았고, 머리도 차분해졌다.
설마 신께서 자카리의 목숨을, 비앙카 홀로 지키기를 원하시는 건 아닐 테고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 잡겠지만.
이미 꿈속의 인생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대로만 가다 보면 신의 뜻에 다다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단지 그게 언제인지 모르는 것일 뿐이다.
그때만을 목 빼어 기다리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심력을 소모하느니, 그냥 느긋하게 보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비앙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좋은 일만 생각해요.”
* * *
5월. 비앙카가 임신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이제야 비앙카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오기 시작했다.
원체 마른 편에 배까지 홀쭉하니 아이가 도대체 어디에 들어찬 걸까, 건강은 한 걸까 걱정했는데, 활발한 태동에 그제야 다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지금껏 걱정한 것이 우습게도 아이의 움직임이 어찌나 활발한지, 하루 온종일 뒤집기를 하고 날뛰기를 반복했다. 태동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
수면 부족. 게다가 최근 비앙카는 허리가 아파 오래 걷지 못하고 쉽게 주저앉기가 일쑤였다. 자카리를 비롯한 측근들의 걱정도 더욱 커져만 갔다.
오래지 않아, 비앙카는 꼼짝없이 방에 누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지에 두문불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비앙카가 방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이본느와 가스파르의 결혼식이었다.
영지민들의 축하 속에서, 드디어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 도래했다.
결혼식은 아르노 성의 만찬장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가신의 결혼식이라 하여 성의 만찬장을 내주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비앙카를 곁에서 지킨 중역들이었다. 충분히 만찬장을 내어줄 자격이 있었을뿐더러, 몸이 무거운 비앙카가 부득불 결혼식에 참석하겠다 하니 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결혼식 장소를 잡아야만 했다.
비앙카가 우긴 덕에 오월의 신부가 된 이본느는 다른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평소보다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단장하고 있었다. 좋은 날이라 그런지, 이본느의 얼굴이 말갛게 피어올랐다.
항상 틀어 올렸던 연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렸고, 사이사이 꽃으로 장식했다. 단장을 돕던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예쁘다 입을 모았다.
“가스파르 경도 오늘만큼은 눈이 휘둥그레질걸?”
“무슨 소리야. 가스파르 경은 항상 이본느를 볼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 했어.”
“아, 이렇게 예쁜데. 베일이 없는 건 좀 아쉽네.”
“어쩔 수 없지. 우리 같은 평민 결혼식에 베일은 사치잖아. 그나마 이본느나 되니까 이렇게 호화롭게 결혼하는 거지.”
하녀들은 이본느의 머리를 매만지며 수다를 떨었다. 이본느는 살짝 웃었다. 베일이 없어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한 신부였다.
그때, 이본느의 단장실에 비앙카가 찾아왔다.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을 비롯해 이본느까지 모두 화들짝 놀랐다. 단장을 하던 이본느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것을 비앙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됐어. 앉아 있으렴. 축하 인사를 하러 온 거니까.”
“마님, 여기까지 어떻게…!”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하니?”
“그럼요!”
비앙카가 어이없어 하며 되묻자, 이본느는 사색이 된 낯으로 버럭 외쳤다.
안 그래도 비앙카는 낯을 가려 곁에 아무나 두지 않는 편이었다. 오늘 결혼 당사자인 이본느가 어쩔 수 없이 비앙카의 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비앙카는 혼자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걱정하는 이본느에게 비앙카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일축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던 찰나에 홀로 등장한 비앙카의 모습은 이본느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하녀인 그녀가 공작 부인인 비앙카에게 소리 높이는 모습에 다른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이본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걱정 마렴. 공작님이 앞까지 함께해 주셨단다.”
그제야 이본느는 안도할 수 있었다.
신부의 대기실에 오는 것은 친한 친구들, 혹은 가족들뿐이다. 비앙카가 일부러 대기실까지 찾아온 것에 감격한 이본느의 말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연회장에서 뵈어도 되는데….”
“이걸 먼저 건네주어야 할 것 같아서.”
별거 아니라는 듯 툭, 건네는 말과 함께 비앙카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모두의 눈이 비앙카가 건넨 물건에 꽂혔다. ‘그’ 비앙카가 건네는 물건이니 예사 물건은 아닐 것이다. 이본느가 꾸러미를 푸는 동안, 모두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꾸러미 속에서 드러난 것은 길고 화려한 레이스 베일이었다. 좋은 견사를 썼는지, 레이스는 비단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같은 부피만큼의 황금을 얹어주어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한 물건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하물며 비앙카, 그녀가 직접 짠 것이 아니던가?
“신부니까, 베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니니.”
민망했던 비앙카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남들의 감탄을 듣는 건 익숙했지만, 온전히 호의로 선물을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본느는 믿기지가 않는 듯 레이스를 몇 번이고 만져 보았다. 이렇게 커다란 레이스라면 분명 짜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을 텐데…. 비앙카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도대체 언제 짜신 거예요, 마님?”
“내 손에 걸리면 금방 뚝딱이지.”
비앙카가 젠체하며 우쭐해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덧붙이는 것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감격으로 말문이 막힌 이본느는 베일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손이 많이 들어갔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레이스였다. 오델리 왕녀조차도 이런 레이스를 갖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예쁜 것 이상으로, 비앙카가 그녀를 그렇게 챙겨 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이본느의 목에 울음이 끓었다.
“저, 이걸 가보로 여길 거예요. 대대로 물려주면서….”
“이렇게 나풀나풀한 건 네 딸까지도 못 물려질 게다, 이본느. 너나 열심히 걸치거라. 그러면 이따 보자.”
이본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렁그렁한 표정인 것과 달리,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툴툴대었다.
비앙카는 말을 끝내자마자 방을 후다닥 나섰다. 모두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대기실의 분위기를 들었다 놓은 것이, 마치 태풍 같았다.
비앙카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대기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이본느를 부러워하는 소리가 대기실 밖까지 울려 퍼졌고, 당연지사 비앙카의 귀에도 들렸다. 비앙카의 귀가 시뻘게졌다.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카리는 비앙카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는 비앙카의 팔을 자신의 팔뚝 위에 얹으며, 나직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대가 노력한 만큼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로군.”
“그럼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짰는데요.”
비앙카는 벌게진 얼굴로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이본느의 앞에서 애써 태연했던 얼굴은 방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사라진 뒤였다.
이본느에게 만큼은 꼭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평탄치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본느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이본느 몰래 조금씩 뜬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본느가 결혼 준비를 한다며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틈틈이 떴지만….
끝물쯤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자카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척 핑계를 대기까지 하며 이본느를 내보냈다. 그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비앙카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방치당한 원한에 자카리는 뚱해 있었다. 걱정되니 일찍 자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그놈의 레이스를 부득불 붙들고 있더니, 건네줄 게 이리도 신이 날까. 발그레하게 상기한 채 콧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기뻐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지나가듯 툭 하니 중얼거렸다.
“가끔은 그대가 나보다도 더 이본느를 신경 쓰는 것 같아.”
“네?”
비앙카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리곤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비앙카의 작은 손이 자카리의 팔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난 진지해.”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하는 게 취미잖아요.”
“날 놀리는군.”
자카리의 입술이 꽉 다물린 채 입꼬리 끝만 들썩였다. 이제 비앙카는 자카리의 저런 표정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알았다.
자카리는 입씨름으로는 도저히 비앙카에게 당해낼 수 없다며 투덜거렸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팔을 위로 쭉 뻗어야 닿을 정도로 그의 키는 컸다.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정말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꼈구나.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손끝이 제법 매울 텐데도, 자카리는 묵묵히 그녀에게 고개를 내어주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가, 튕기듯 놓았다. 그러고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르르 웃었다.
“당신이 사실은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라는 걸, 나만 아는 게 너무 좋아요.”
* * *
악단이 연주하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가스파르와 이본느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본느가 활짝 미소 지은 채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 정도로 여유로웠던 것과 달리, 가스파르는 결혼식 내내 눈에 띄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어 철벽의 기사라 불리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안색은 하루 종일 시시각각 변했다.
결혼식의 주례가 끝나고 서약서까지 썼음에도 믿기지 않는지, 그는 옆에 있는 이본느의 손을 꽉 쥐어 보았다. 그리고는 기어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뵈르는 마시던 와인을 뿜었고, 로베르는 얼굴을 구겼으며, 뱅상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결혼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상석에 앉아 있던 자카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같이 좋은 날, 상이 빠질 수 없지. 가스파르는 들으라.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를 성심껏 보필하였으며,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내 아내와 아르노가의 후계자를 지켜낸 공을 인정하여, 내 그대에게 남작 위와 함께 영지를 내리도록 하겠노라.”
자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환호가 치솟았다. 미리 알고 있던 비앙카는 빙그레 웃으며 박수를 쳤고, 로베르와 소뵈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바로 함성을 외치며 가스파르에게 달려갔다.
“아주 인생 폈구나, 가스파르!”
“축하한다, 짜식, 결혼도 출세도 네가 제일 먼저 가는구나!”
로베르와 소뵈르가 가스파르의 양옆에서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가스파르는 얼떨떨해하며 눈만 끔뻑였다. 이본느 또한 믿기지 않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스파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자카리의 앞에 부복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쉽사리 믿기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였다.
세습되지 않는 기사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신 또한 기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그런데 남작이라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이본느가 그저 기사의 부인이 아닌, 남작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감격에 겨웠던 가스파르는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영광입니다. 공작님.”
가스파르가 고개를 숙이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오늘만큼 행복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흥분으로 일렁거렸던 가스파르의 눈빛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그의 낯은 언제나와 같은 철벽, 그 자체가 되었다. 가스파르는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영지는 과분합니다. 아직 제가 아르노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만큼, 영지를 내려 주시는 것은 조금 더 시기를 미뤄주십시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가스파르가 그리 말하며 고사하니, 주변에서 숨을 들이켰다. 영지 없는 작위는 그저 명예직일 뿐이다. 가스파르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황한 소뵈르가 목소리를 낮추며 가스파르를 만류했다.
“야, 당장 취소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 가스파르의 옆에 이본느가 나란히 부복했다.
다들 이본느가 가스파르를 호되게 질책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지 없는 남작 부인은 그저 기사의 아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남작 부인으로서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그대로 뻥 차 버린 가스파르에게 단단히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
이본느는 머리를 조아리며 자카리에게 간청했다.
“저도 남편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는 본디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영지를 맡게 되어도 주먹구구식으로 엉망일 것입니다. 한동안 마님의 곁에서 영주 부인의 의무에 대해 배울 수 있게, 자비롭게 이해해 주십시오.”
가스파르에 이어 이본느까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나란히 던진 충격 선언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비앙카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영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영지를 꾸릴 수 있다는 선례가 바로 비앙카 아니던가.
모두에게 충격을 던진 이본느의 낯은 담담했다.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본느는 더듬더듬, 하지만 소신 있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님께선 아직 해산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제가 계속해서 마님의 시중을 들어 온 만큼, 계속 곁에 있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허락된다면, 아기씨까지 제가 키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부디, 마님을 좀 더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본느가 고개를 숙이며 빌었다. 이본느의 말인즉슨, 계속해서 시녀로 일하며 훗날 아이의 유모가 되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노가가 공작가가 된 만큼, 공작 부인의 시녀를 비롯해 후계자의 유모 또한 귀족가 여인으로 들이는 것이 관례이기는 했다. 그러니 남작 부인이 되고 나서도 시녀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될 걸 염두에 두고 작위를 준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이본느가 영지를 고사하는 것이 의무니 뭐니 하는 핑계들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비앙카 그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비앙카가 얼마나 사람을 가리는지 아니까. 얼마나 이본느에게 의지하는지 아니까.
전쟁을 치르고, 미래를 바꾸려 아등바등하는 동안 비앙카는 자신이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비앙카는 이본느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이본느는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침착한 그녀의 암갈색 눈동자가 절박하리만큼 빛났다.
이본느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시녀와 주인이기 때문에? 충성심으로?
아마 비앙카가 요 며칠 밤을 새 가며 이본느의 결혼 선물을 만들고, 전쟁 속 위험한 순간 그녀를 감싸 안은 것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이본느에게 있어 비앙카는 걱정스러운 막냇동생이었고, 비앙카에게 있어 이본느는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곁에 둔 이였다. 그렇기에 비앙카는 차마 나를 위해 이곳에 있을 필요 없다며 입을 떼지 못했다. 비앙카의 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치솟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비앙카는 울먹임을 꾹 내리눌렀다. 그녀는 눈을 휘어 웃으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대상이 잘못된 것 같구나, 이본느. 영주 부인으로서의 일을 배울 상대는 내가 아니라 뱅상이야.”
“마, 마님!”
뱅상이 시뻘게진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비앙카가 영지의 일이라면 손을 놓다시피 하여 뱅상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만큼,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을 수 없는 것은 뱅상뿐이었다. 노집사는 짐짓 표정을 엄히 하며 비앙카를 타일렀다.
“이제부터는 마님께서도 일을 배우셔야지요! 곧 있으면 어머니가 되지 않습니까! 본보기가 되셔야….”
“내 자식은 나보단 내 남편을 더 많이 닮을 것이라, 내가 좀 게을러도 잘 자랄 것이네.”
비앙카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확신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뱅상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남편을 닮았으니, 그 전쟁 통에도 꿈쩍도 안 했겠지. 날 닮았어 봐라.”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너무나 태연자약했다. 비앙카의 말에 묘하게 설득되어버린 뱅상의 입이 딱 다물렸다. 뱅상은 무언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비앙카의 논리를 깰 만한 주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여튼, 이본느.”
비앙카가 이본느의 앞에 다가가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에 머뭇머뭇 손을 얹었다.
비앙카가 이본느의 손을 잡아당겼다. 비앙카의 악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이본느는 비앙카의 의도를 읽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앙카는 이본느의 손을 양손으로 감싼 채, 그녀의 다정한 암갈색 눈동자에 눈을 맞추며 읊조리듯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내 아이를 잘 부탁하네. 나는 유모가 일찍 죽어서 홀로 외롭게 컸어. 그대는 내 아이에게 그런 슬픔을 주어서는 안 돼. 알았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고….”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기어코 울컥임을 참아내지 못한 비앙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걱정 마세요, 마님. 저는 마님과 달리 튼튼하잖아요.”
이본느는 입버릇처럼 항상 건네던 말을 중얼거리며, 비앙카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비앙카에게서 나는 장미향이 이본느의 머리를 장식한 마거리트 꽃향기와 뒤섞였다.
둘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주인과 시녀 관계가 아닌, 평생을 함께 지낼 친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반짝반짝,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서로의 행복을 빌듯이.
* * *
결국 가스파르에게 내려 준 영지는 일정 기간 동안 아르노에서 관리하고, 영지의 수익금을 봉급에 얹어서 내려 주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 가스파르도, 이본느도 그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피로연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떠들썩한 노랫소리가 결혼식장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아쉽게도 비앙카는 일찍 침실로 돌아갔다. 비앙카가 걱정되었던 자카리 또한 같이 자리를 비웠다. 더불어 이런 날일수록 상관이 일찍 빠져 주는 게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비앙카와 자카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팔베개를 해주었고, 비앙카도 자카리의 곁에 딱 달라붙었다.
창문 너머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에 머리를 뉘인 채, 고요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와중, 비앙카가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은 우리 결혼식 날 기억나요?”
“물론이지.”
자카리는 손가락으로 비앙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결혼식을 떠올린 자카리의 입가에 빙긋이 호선이 그려졌다.
비앙카는 결혼식을 떠올리려는 듯 인상을 썼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미간이 찡그려지며 주름이 잡혔지만, 야속하게도 기억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전 좀 가물가물해요. 엄청 울었던 것밖에.”
“그러면 전부 기억하는 거나 다름없지.”
자카리의 목소리 끝에 낮은 웃음이 번졌다. 결혼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엉엉 울던 어린 비앙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주장은 무력할 뿐이다. 비앙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요즘 당신, 은근히 능글맞아진 것 같아요.”
“당신 말대로 취미를 좀 바꿔 봤지.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는 걸로.”
“지금은 전혀 진지한 얼굴이 아닌걸요. 날 놀리는 걸 재밌어하고 있잖아요.”
비앙카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목소리만 들어도 자카리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훤히 느껴졌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달래듯 덧붙였다.
“그대가 아이를 낳고, 한 번 더 결혼식을 할까. 그러면 그대도 이번 결혼식은 기억하겠지.”
“됐어요. 떠들썩한 연회는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냥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추억은 다른 거로 쌓으면 되니까.”
비앙카는 졸음이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이 순식간에 훅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 안 그래도 어제 밤늦게까지 이본느의 결혼 선물을 짜느라 잠이 부족한 터였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어깨를 감싸듯 팔을 둘러,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작고 가녀린 어깨가 이내 고른 숨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창밖에서 낄낄대는 외침과 고함 소리가 윙윙이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술에 취한 소뵈르가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지, 로베르가 소뵈르에게 이런저런 잔소리하는 소리도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잠의 장막이 드리운 듯, 소란 또한 적막히 잦아들었다.
비앙카는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요즘 부쩍 잠들기 힘들어하곤 했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를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밤이었다.
* * *
수확제가 지나고, 비앙카의 출산일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출산 예정일 며칠 전부터 비앙카는 가진통으로 괴로워했다. 가진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가진통과 진통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비앙카는 일찍부터 준비된 산실로 옮겼고, 산파를 비롯한 이들은 일찍부터 대기하며 비앙카의 양수가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산파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가 산실을 들어간 것을 기점으로, 자카리 또한 하던 일을 손에서 놓았다. 애초에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기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카리는 바싹바싹 마르는 나무처럼 시들었다. 그의 안색이 퀭했다. 그는 마른 입을 몇 번이고 혀로 축이며 초조하게 산실 밖을 거닐었다.
산실 안에서 비앙카의 고통에 찬 신음과 비명이 간간이 흘러나왔다. 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자카리는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카리는 최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쟁에서도 패배를 염두에 두면, 잘 풀릴 전쟁도 진창에 처박게 되기 마련이었다. 자카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성경 외듯 입으로 중얼중얼거렸다.
그 곁에서 뱅상과 세 부장들도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여자인 이본느는 비앙카와 함께 산실에 들어가 그녀의 수발을 들 수 있었지만, 사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괜히 연무장에서 먼지 냄새나 묻히고 다닌다며 산파에게 등짝을 후려 맞을 뿐이었다.
걱정하는 것은 영지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체 몸이 약한 마님이다 보니, 이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일을 하던 와중에도 몇 번씩 걱정스레 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산파가 산실 밖으로 급히 뛰쳐나왔다. 산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카리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산파는 자카리에게 다가갔다. 산파의 늙은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카리는 바로 산파를 채근했다.
“비앙카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진통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아직도 진통만 계속된단 말이냐!”
자카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고, 턱이 바르르 떨렸다. 산파를 책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갈 데 없는 끓는 마음에 기어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산파는 아르노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을 받아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비앙카와 같은 경우도 없진 않았다. 물론, 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산파는 침중하게 덧붙였다.
“벌써부터 고통으로 힘이 다하시니, 정작 힘을 주셔야 할 때 지치셔서 힘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인즉슨….”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면 큰일 납니다.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산파가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했다. 자카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카리의 몸이 휘청이기가 무섭게 세 부장이 일시에 달려들어 자카리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망연자실하였다.
자카리는 간신히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비앙카는, 비앙카를.”
혀가 꼬이며, 발음이 불분명했다. 자카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가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자카리는 애써 이성을 긁어모았다. 어찌나 조각조각 나 흩뿌려졌는지, 정신을 차리는 데도 한참이었다.
자카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산파를 바라보았다. 결심을 내릴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단호히 빛났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비앙카만큼은 살려라. 알겠느냐?”
자카리의 명령은 애원에 가까울 정도로 절박했다. 산파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산실에서 산파를 돕던 하녀 하나가 다급히 뛰쳐나오며 산파를 불렀다.
“산파, 산파! 마님의 양수가 터졌어요!”
“그럼 전 이만…!”
“얼른 들어가 보거라, 얼른!”
산실 안의 상황이 걱정되었던 자카리는 산파의 등을 떠밀었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는 산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산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희미하게,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던 비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또렷했다. 거의 고문당하는 것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얼마나 좋을까. 비앙카는 종잇장에 손가락을 베이는 일조차 드문, 귀하디귀한 몸인데…. 저 고통을 어찌 견디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방 앞을 이리저리 쏘다니던 자카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비앙카가 무사하기를….
어찌나 간절했는지,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명이 일순간에 뚝 그쳤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자카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앙!”
비앙카의 비명 대신 울려 퍼진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어찌나 우렁찬지 산실 너머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자카리는 눈만 깜빡였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자카리가 사태 파악을 하기 전, 산실의 문이 열렸다. 나온 것은 이본느였다. 계속 고생했는지 그녀의 차림새는 흐트러져 엉망이었지만, 얼굴만큼은 활짝 피어 있었다. 이본느는 밝게 외쳤다.
“아가씨입니다! 아가씨예요!!”
“산모는? 산모는 무사한가?”
이본느의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이본느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산실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하녀들이 산실을 이리저리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한가운데, 비앙카는 침대에 해쓱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비앙카의 등에 하녀 하나가 쿠션을 대어주었다.
그녀의 하얗고 창백한 뺨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한계인 듯, 그녀의 웃음은 지쳐 있었다.
감격에 겨웠던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의 입술은 좀처럼 지금의 심정을 뱉어내지 못했다. 자카리는 하염없이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앙카였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애는 내가 낳았는데…. 당신이 고생한 얼굴이야.”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마음고생은 비앙카의 고생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자카리는 매가리 없이 침대 위에 널브러진 비앙카의 가는 팔뚝을 노려보았다. 목 너머로 울컥하는 것이 끊임없이 치솟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산파가 끼어들었다. 산파는 아이를 깨끗한 싸개에 싸서 비앙카에게 안겨 주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울음소리가 우렁차 사내 아기씨인 줄 알았는데, 여자 아기씨네요. 그래도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아주 어여쁩니다.”
비앙카는 아이를 안기 위해 팔을 들었다. 그녀의 가는 팔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비앙카는 기어코 아이를 품에 안았다.
비앙카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수리에 나 있는 은회색빛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자카리와 그녀의 아이…. 비앙카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이예요. 내가…. 당신 닮을 거라고 했죠?”
“응, 응…. 비앙카, 무사히 살아줘서 고맙소….”
그제야 자카리의 목을 막고 있던 것이 터져 나갔다. 드디어 말을 뱉어 낸 자카리는 오열하며 비앙카에게 무너졌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던가? 자카리는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자카리의 눈물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의 인생에서 눈물은 사치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무도 받아 줄 데 없는 천덕꾸러기가 된 그의 눈물을 기꺼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누르고 또 억눌러 왔다. 그렇게 아주 뿌리째 메말라, 그 존재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그것이, 드디어 제 울타리를 찾고 나서야 솟아올랐다.
비앙카가 자카리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카리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눈물 젖은 뺨이 비앙카의 손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첫 아이를 안게 된 기쁨에 젖어 있을 때,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천지개벽하는 것과도 같은 빛이 세상을 내리쬐었다.
갑자기 번쩍이는 빛에 모두가 창밖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듯 그들을 휘감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번쩍이는 빛은 세상의 더러운 때를 정화하듯 상서롭게 느껴졌다.
세상을 잠식한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면서 구름 너머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축복의 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찬가에 모두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건….”
“기적….”
자카리와 비앙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교황이 서신에서 언급했던 기적이 바로 이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신의 뜻….”
그제야 비앙카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그녀를 선택하여 내려 보낸 것은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가 회귀하자마자 다짐한 것은 바로 자카리의 후계자를 갖겠다는 의지였다. 신이 보여준 미래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신의 뜻을 각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자카리 또한 나직이 탄식했다.
신의 뜻이 자카리, 그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면 비앙카가 아닌 자카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었어도 되는 일이었다. 굳이 비앙카일 필요가 없었다.
신의 뜻이 그들 아이의 존재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카리와 비앙카, 그 둘이었으니까. 이 또한 굳이 비앙카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은, 비앙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자카리는 납득했다.
“왜 내가 선택받지 못했는지 알겠군.”
자카리는 눈물 젖은 뺨을 끌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꿈속에서 그대는 날 싫어했다고 했지.”
자카리 또한 비앙카가 꾼 꿈의 내용에 대해 어렴풋하게 들어 알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꿈속의 그녀는 그라면 질색을 했다고…. 자카리는 비앙카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난, 그대의 거부를 감내하며 손가락을 대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까.”
비앙카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최대한 멀어져 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결혼했다면 피임하는 것으로….
그 어떤 최악의 미래를 본다 해도 똑같다. 자카리는 차마 먼저 움직이지 못한 채, 똑같이 웅크리고, 똑같이 겁을 먹고, 똑같이 도망치겠지.
비앙카만이 자카리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나는 변하지 못하는 사내야, 비앙카. 이 모든 걸 바꿔 준 것은 그대야. 그대 덕에 나는 행복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
자카리는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 너머로, 지금껏 자카리와 그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순탄치 않은 많은 일이었다…. 신께서 보여준 꿈속에서든, 꿈 밖에서든. 하지만 단 하나 확실히 다른 것은, 꿈속에서 없던 행복이 지금 그녀의 품 안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비앙카는 살풋 웃으며 아기의 코끝을 어루만졌다.
“신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우리 딸아이가 엄청난 일을 해낼 위인이라도 되나 봐요.”
“그러게 말이오.”
아기는 코끝을 들썩이며 킁킁거렸다. 비앙카의 작은 몸에 비해 아기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었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산파의 말에 틀린 점 하나 없었다.
자카리가 신기하고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는 모습에, 비앙카는 충동적으로 자카리에게 아기를 넘겼다.
“한번 안아 봐요.”
“내, 내가? 울지는 않을까?”
“울면 달래면 되죠.”
너무나 간단한 해결책에 말문이 막힌 자카리는 엉거주춤 아기를 받아 들었다. 지금껏 아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만큼, 자카리는 당황해하며 어떻게 아기를 안아야 하는지 한참을 헤맸다.
그의 팔뚝보다도 작은 아이에게서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자카리에게서 나는 쇠붙이 냄새와도, 비앙카에게서 나는 고혹적인 장미향과도 달랐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훈수 아래, 한참 끝에서야 어설프나마 그럴듯하게 아기를 안아 들 수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마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전장의 늑대라는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한 미소였다.
“어때. 좀 아빠 같아 보이오?”
“그럼요.”
비앙카 또한 마주 웃었다. 자카리와 그를 닮은 딸아이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왜 이리 눈이 시린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비앙카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치켜세워 줬지만, 신께서 미래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이 어림없는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무사히 이 모습을 볼 수 있게 안배해 준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성인은 의무를 다했고, 신의 뜻은 이루어졌다.
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처음엔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자카리의 생존, 혹은 자코브의 죽음…. 그녀는 언제나 살아남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녀에게 쏟아져 내리는 불행을 피해내는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신께서 바라신 것은 불행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걸.
신의 뜻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행복이었다.